(이 글은 스포일러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은 그 목적이 어떠하든 글을 쓴 사람의 생각을 담는다. 하다못해 ‘누구 왔다 가다’ 같은 낙서에도 그걸 쓴 사람의 생각이 담긴다. 그래서 그 글이 독자들의 손을 잡아 이끄는 힘, 즉 재미가 있어야 하지만 함께 따라간 그 여정이나 목적지에서 내 영혼을 건드리는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면 실망하게 된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SF나 판타지같은 장르물의 경우 여러가지 장치를 필요로 하고 그 도구성에 집중하게 되면 내 손을 잡아 이끌었던 작가의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알기 어려워질 때가 있는 것 같다. 정 반대로 낚시꾼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해 – 나의 경우에 특히 – 독자를 감았다 풀었다 하는 최소한의 밀당도 없이 맛 없는 요리를 억지로 먹이려는 터무니 없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Lure의 경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묵직한 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저께의 연인>에서는 인간의 꿈과 기억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노후 주거구역 : 철거 예정>에선 지구에 기거하는 ‘인류’의 행적에 대해서, <신의 마법과 얼음 마녀>에선 실재와 욕망, <움츠린 거상>에서는 자유의지와 국가론, <텔레포트 마법>에선 존재의 연속성에 대해서, <요리 재료의 중요성에 관하여>는 표현과 본질에 대해서,<스틱스>에선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의 영역에 속한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내내 심각하게 이야기를 끌어간 <스틱스> 이후, 그는 낚시줄에 매달린 미끼(Lure)를 풀었다 놓았다 하며 독자들을 흥미롭게 끌어당긴다.
그의 단편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런 최소한의 구도 속에서 이야기를 긴장감있게 풀어가는 실력이 탁월하다. 같은 세계관으로 꾸며진 연작 형태의 작품들 <요리 재료의 중요성에 관하여>, <텔레포트 마법>, <움츠린 거상>에서는 마법사와 마법사의 제자, 그리고 제 3의 대상(골렘과 요정)을 통해서, <신의 마법과 얼음 마녀>에서는 마법에 집착하는 제자와 교수를 통해서. 또 Lure의 작품 가운데 가장 분량이 긴 <그저께의 연인>에서도 나와 여자, 그리고 의사인 친구를 빼면 등장인물이 거의 없지만 이야기가 전혀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그저께의 연인>의 경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미래의 모습이 탄탄하게 설계되어 있는데다 혼란스러울 법도 한 과거, 현재, 꿈 그리고 기억을 독자들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영리하게 배치했다. 이야기가 품고 있는 드라마는 장편으로 구성해도 될 만큼 커다란 것인데 적절한 시점에서 시작해 여러 암시를 품은 열린 씬(Scene)으로 마무리지었다. 개인적으로는, <그저께의 연인>에 담긴 생각과 드라마, 미래에 대한 스케치, 회화적 이미지까지 최근에 보았던 어떤 SF 영화 보다도 좋았다.
기억에 남는 몇몇 대목, 요정의 세계에 정착한 <움추린 거상>의 마지막 질문, <신의 마법과 얼음 마녀>에서 마법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창조자의 설명, <노후 주거구역>에서 꿈을 식량으로 삼는 존재라는 발상 등등은 Lure로부터 빼앗을 수 있다면 빼앗고 싶은 탁월함이었다.
“SF 소설을 쓰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들어오게 된 브릿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만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슬프지만,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