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산맥>과 비경 탐험 소설들의 관계 비평

대상작품: 러브크래프트 전집 (작가: 러브크래프트, 작품정보)
리뷰어: OneTiger, 18년 7월, 조회 213

소설 <광기의 산맥>은 우주적 공포 소설입니다. 인류 이전에 각종 외계인들은 지구에 정착했고, 인류는 그저 그들의 피조물에 불과하고, 언젠가 그들은 인류를 날려버릴지 모릅니다. 무한하고 영원불멸한 우주에서 인류는 그저 한 순간의 먼지일 뿐입니다. 이런 감수성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여러 소설들을 관통하고, <광기의 산맥>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광기의 산맥>은 비경 탐험 소설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남극 탐사대 소속이고, 탐사대는 극지에서 외계인의 유골을 발굴하거나 고산 지대에서 외계 유적지를 찾습니다. <광기의 산맥>은 남극 탐사대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소설 주인공은 외계인의 광대한 도시와 유적지를 탐사합니다. 그래서 <아서 고든 핌의 모험>처럼 쇼거스는 “테켈리 리!”라고 외치겠죠. 사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비단 <광기의 산맥>만 아니라 다른 단편이나 중편 소설들에서도 탐험가를 집어넣곤 했습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에서 비경 탐험은 독자들이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요소들 중 하나일 겁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 속에서 주인공들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로 떠납니다. 그런 장소는 열대 밀림이 될 수 있고, 고산 지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장소는 환상적인 꿈나라가 될 수 있고, 깊고 깊은 바닷속이 될 수 있습니다. 머나먼 무인도나 외딴 시골 역시 소설의 무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소설 주인공이 언제나 탐험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소설 주인공들은 어쩌지 못하고 오지로 흘러가곤 합니다. 고산 지대에서 모험을 찾기 위해 누군가는 악귀들과 싸웁니다. 누군가는 해군 소속이고 잠수함이 침몰했기 때문에 해저 도시를 방문합니다. 누군가는 기이한 능력으로 꿈나라의 환상적인 지리를 탐색합니다. 바다에서 표류하는 동안 선원들은 무인도에 들리고 거기에서 괴수들이나 외계인들과 만납니다. 이는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언제나 적막하고 음산한 오지만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러브크래프트는 저런 비경이나 오지만큼 북적거리는 대도시를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비경과 오지는 낯선 외계인이나 괴수를 숨기기에 좋고, 그래서 러브크래프트는 비경 탐험을 곧잘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외계인의 장대한 유적이나 거대한 괴수는 북적거리는 대도시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은 당장 눈에 뜨일 겁니다. 때때로 흐느적거리는 괴물들은 도시의 뒷골목이나 폐가나 지하실에 도사릴 수 있으나, 러브크래프트는 그저 작은 괴물 따위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러브크래프트는 가상의 이질적인 문화를 보여주기 원했고, 그래서 드넓은 도시와 웅장한 건축물과 각종 유적이나 예술품, 종족들의 흥망을 설정했습니다. 특히 이 양반은 뒤틀리게 기하학적이고 웅장하고 거대한 건축물에 집착합니다. 소설 속에서 수많은 종족들은 서로 싸우거나 사라지거나 퇴행합니다. 이런 설정을 보여주기 원한다면, 작가는 거대 구조물이나 유적이 숨을 수 있도록 소설 배경을 비경이나 오지로 삼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장소들을 찾아가야 할 겁니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는 소설 주인공들을 다양한 수난들에 빠뜨립니다. 그러는 동안 소설 주인공들은 낯설고 적막한 비경에 당도하고, 거기에서 차마 ‘형용할 수 없이’ 까마득한 장대함과 마주칩니다. 운이 좋은 소설 주인공들은 도망칠 수 있으나, 대부분 미치거나 괴물들에게 잡아먹히죠. 이런 탐험의 결말은 비참한 광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주적 공포와 상관없이 이따금 러브크래프트는 환상적인 여정 그 자체에 매력을 느낀 것 같습니다. <광기의 산맥>이 우주적 공포와 비경 탐험의 조합이라면, <미지의 카다스를 향한 몽환의 추적>은 우주적 공포에서 몇 걸음 물러났습니다. <미지의 카다스>에도 외계인들이 나오고 인류의 앞길을 가로막으나, 여타 소설들 속 주인공들과 달리, 주인공 랜돌프 카터는 미치거나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습니다. 사실 <미지의 카다스>는 우주적 공포 소설이 아니라 약간 기이한 환상 소설에 가깝습니다. 랜돌프 카터는 이상향을 찾아 탐험을 떠나고 외계인들이나 반신과 만납니다. 그런 탐험의 결말은 비참한 광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실버 키>나 <실버 키의 관문을 지나> 역시 우주적 공포와 광기의 비경 탐험보다 환상적인 여정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소설 주인공이 탐험을 떠나고 온갖 외계인들과 마주치고 이질적인 문화를 둘러본다고 해도, 독자들은 무조건 이런 소설들이 <광기의 산맥>과 비슷한 유형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저는 러브크래프트의 상상력이 가장 빛을 발하는 작품들이 기이하고 적막한 비경 탐험이라고 생각합니다.

 

 

SF 소설들 속에서 비경은 열대 밀림이나 고산 지대나 사막이나 심해나 외계 행성이나 외계 건조물을 가리킵니다. 저런 비경들에서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차마 목격하지 못하는 것들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경’은 비단 열대 밀림이나 고산 지대나 심해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광기의 산맥>과 달리, 소설 <벽 속의 쥐>는 전형적인 비경 탐험 소설이 아닙니다. 소설 주인공은 저택을 관리하기 원할 뿐이었고 탐험을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택에 머무는 동안 소설 주인공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고 저택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원정대를 조직합니다. 저택 지하에서 원정대는 광대한 동굴을 발견하고, 이후 <광기의 산맥>처럼 <벽 속의 쥐>는 비경 탐험의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아, 그리고 보면, 러브크래프트는 어둡고 적막한 동굴을 괴물들의 은거지로 잘 써먹었군요. 게다가 이런 지하 세계는 대도시 아래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작가는 구태여 소설 주인공을 열대 밀림이나 고산 지대로 보내지 않습니다. <픽맨의 모델> 같은 소설은 전형적인 비경 탐험 소설이 아니나, 픽맨이 끔찍한 지하 세계를 탐험했음을 암시합니다.

 

 

<찰스 덱스터 워드의 사례> 역시 탐험의 기운을 풍깁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열대 밀림이나 사막이나 심해가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저택의 지하실로 탐험을 떠납니다. 음, 이건 사이언스 픽션의 비경 탐험보다 중세 판타지의 던전 탐험에 훨씬 가깝군요. 만약 던전 탐험을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찰스 덱스터 워드의 사례>는 아주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러브크래프트는 폐가나 폐허를 묘사하기 좋아했고, 이런 음산한 지하실을 구성하기 위해 꽤나 공을 들였습니다. 음산한 지하실이 이루 말하지 못할 공포를 풍기기 때문에 러브크래프트는 그런 감성을 자기 소설에 녹이느라 애썼죠. 이 양반은 공간적인 설정에 아주 고심하는 작가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지하실보다 열대 밀림이나 고산 지대나 심해가 러브크래프트에게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지하 공간에서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터무니없이 웅장하고 방대한 상상력은 좀처럼 펼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지하 공간보다 무인도나 해저, 사막에서 외계인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나 대도시 유적은 그 규모를 쉽게 자랑할 수 있겠죠. 그렇다고 해도 이는 <찰스 덱스터 워드의 사례>가 <광기의 산맥>보다 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 다 좋은 소설이나, 저는 <광기의 산맥>이 보다 러브크래프트답다고 생각해요.

 

 

사실 비경 탐험과 기이한 문명의 조합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러브크래프트 이전에 여러 작가들은 비경 탐험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 주인공들은 다양한 장소들로 탐험을 떠났고, 일부는 차원을 넘거나 시간을 거스르거나 외계 행성에 진출했습니다. 비록 그런 소설들은 우주적 공포를 읊조리지 않으나, 우주적 공포처럼 기이하고 낯설고 암울한 세계를 묘사했습니다. SF 작가들의 상상력은 그저 ‘문명 세계’에만 머물지 않았고, 장소와 시간을 뛰어넘곤 했습니다. 그 결과 SF 소설은 우주적 공포에 필적하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가령, 허버트 웰즈의 작풍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와 완전히 다릅니다. 하지만 <타임 머신>에서 소설 주인공은 ‘문명 세계’를 떠나고 낯설고 적막한 세계에 도착합니다. 거기에서 소설 주인공은 끝도 없는 암울함에 빠지거나 잔인하고 추악한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이는 러브크래프트가 허버트 웰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SF 소설들은 탐험과 낯선 문명과 절망을 혼합하곤 했으나, 러브크래프트가 거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러브크래프트는 어느 정도 그런 흐름에 심취했을지 모릅니다. (분명히 러브크래프트는 장르 소설의 흐름에 심취했을 겁니다.) SF 비경 탐험 소설들과 러브크래프트와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핀다면 좋겠으나, 저에게는 그런 지식이 없군요.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다른 SF 소설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저는 장담하지 못하겠으나, 일련의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은 SF 비경 탐험 소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여러 러브크래프트 소설들 중 <광기의 산맥>은 SF 비경 탐험의 분위기를 가장 강하게 풍깁니다. 흔히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러브크래프트의 최대 야심작이라고 평가합니다. 만약 그런 평론이 옳다면, 그건 러브크래프트가 자신의 최대 야심작을 SF 비경 탐험 소설로서 썼다는 뜻입니다. 물론 러브크래프트는 사이언스 픽션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 겁니다. 소설을 쓸 때 공포를 강조하기 위해 이 양반은 장르를 최대한 활용했으나, 사이언스 픽션이니 무슨 하위 장르니 하는 것들에 별반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류는 탐험의 장소를 넓혔고, 러브크래프트 역시 그런 탐험의 로망을 우주적 공포와 결합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과학의 발달이나 기술의 발달은 이런 방식으로 창작가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들이야말로 기술 발달과 상상력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런 관계는 <광기의 산맥> 같은 결과물을 낳을 수 있겠죠.

 

 

저는 이런 탐험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장르에 가장 충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열대 우림과 지구 공동과 깊고 깊은 심해와 낯선 우주와 외계 유적으로 떠나는 탐험. 이런 탐험들은 다른 소재들에 비해 좀 더 순수하게 사이언스 픽션에 충실합니다. 이는 비경 탐험이 시간 여행이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사이버펑크나 디스토피아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미지는 저 멀리에 있고, 인류가 그 미지를 찾고 싶다면, 인류는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인류는 친근하고 익숙한 문명을 떠나고 낯선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은 극지와 사막과 고산 지대와 열대 우림을 탐험했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동식물들을 만났고, 진화론 같은 혁명적인 사상을 도출했죠. 이런 탐험은 분명히 SF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허버트 웰즈나 쥘 베른이 쓴 소설에는 자주 비경 탐험들이 등장합니다. 쥘 베른은 <해저 2만리>라는 명작을 썼습니다. 허버트 웰즈는 각종 중편과 단편 소설들에서 열대 밀림, 이상한 생명체들, 탐험가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가 SF 장르에 끼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SF 장르에서 비경 탐험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하지 못하겠죠.

 

 

게다가 <라마와의 랑데부> 같은 우주 탐사 소설 역시 이런 탐험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하드 SF 소설이고, <광기의 산맥>은 우주적인 공포 소설입니다. 양쪽은 완전히 서로 다른 장르입니다. 하지만 두 소설은 똑같이 인류 탐사대가 아주 장대하고 기하학적인 외계 유적을 탐험한다는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주제, 분위기, 설정이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탐험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탐험은 미지를 찾아가는 행위입니다. SF 소설은 미지와 조우하는 소설입니다. 따라서 <광기의 산맥>이나 <라마와의 랑데부> 같은 비경 탐험은 사이언스 픽션에 가장 충실한 하위 장르일지 모릅니다. 고전적인 소설 <잃어버린 세계>부터 최신 비디오 게임 <서브노티카>까지, SF 역사에서 탐험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광기의 산맥> 역시 그런 흐름에 들어갈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탐험 이야기를 쓰거나 읽을 때, 저는 작가들과 독자들이 한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역사에서 대항해 시대는 가장 유명하고 특징적인 탐험 시대였습니다. 여전히 숱한 작가들은 대항해 시대에게서 영향을 받습니다.

 

 

숱한 SF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비경 탐험은 백인 남자들의 탐험입니다. 헨리 라이더 해거드 같은 고전적인 탐험 작가부터 아서 클라크 같은 하드 SF 작가까지, 숱한 SF 작가들은 백인 남자 탐험가들을 이야기합니다. 어슐라 르 귄이나 제프 밴더미어는 <정복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소멸의 땅>에서 여자 탐험가들을 이야기했으나, 이런 사례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각종 탐험 소설들에서 숱한 백인 남자 탐험가들은 비경을 탐험하고, 때때로 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나 남아메리카 문명은 야만으로 밀려납니다. <광기의 산맥>을 비롯해 러브크래프트의 비경 탐험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경 탐험 이야기에서 유색 인종들이나 여자들은 주연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대항해 시대가 충격적인 탐험 시대였고, 대항해 시대가 서구적인 근대화를 정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서구적인 근대화 속에서 SF 탐험 이야기들은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SF 탐험 이야기들은 백인 남자들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명들은 야만적인 주변부로 밀려나죠.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에서 독자들은 (이른바) 원주민들을 야만적으로 취급하는 표현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원주민들을 언제나 야만인으로 몰아붙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는 서구적인 근대화를 깨지 못한 작가였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1930년대라는 시대적인 한계를 지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시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라마와의 랑데부>는 제임스 쿡 선장을 오마쥬하는 탐험 이야기입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몇 번씩 제임스 쿡 선장에게 존경을 바칩니다. 하지만 제임스 쿡은 대항해 시대에 속한 탐험가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유럽 탐험가들처럼, 제임스 쿡은 식민지 침략으로 이어지는 발판을 열었습니다. 제임스 쿡은 나름대로 마오리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하지만 이 양반은 원주민들이 야만적인 짐승이라고 생각했고, 대영 제국이 뉴질랜드를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임스 쿡은 위대한 탐험가인 동시에 흔한 제국주의자였어요. 다른 탐험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 쿡이 다녀간 이후, 유럽 침략자들은 토착민들을 학살했고 토착 문화들을 파괴했습니다. 오세아니아 사람들에게 제임스 쿡은 대대적인 재앙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제임스 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요? 제임스 쿡 선장이 정말 발견했나요? 인간이 인간을 발견할 수 있나요? 아니죠. 이는 분명히 제국주의적인 시각입니다. 이는 유럽 침략자가 정당하다는 시각이죠. 이런 제국주의적인 시각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식민지 침략이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대항해 시대 동안, 유럽은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부를 끌어모았고, 상업 자본주의를 발달시켰습니다. 대항해 시대와 자본주의 발달은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입니다. 누군가가 대항해 시대를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자본주의 역시 부정해야 합니다. 유럽은 여전히 자본주의 강대국이고, 그래서 대항해 시대를 좋게 포장하느라 애씁니다. 유럽은 식민지 침략을 사과하고 보상하지 않아요. 유럽은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착취와 침략 덕분에 그런 기득권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착취와 침략 덕분에 서구적인 근대화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이유는 그런 착취와 침략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서 정당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탐험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흔히 우리는 백인 남자 탐험가들이 제3세계를 탐험하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다이안 포시나 제인 구달을 떠올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고릴라와 침팬지가 아프리카 동물임에도, 왜 서구 여자가 고릴라나 침팬지를 연구해야 하나요? 왜 흑인 여자들이 뛰어난 과학자가 되지 못했을까요? 깜둥이들이 야만적이기 때문에? 깜둥이들이 짐승이고 미련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건 아닙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서구적인 근대화가 세계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러브크래프트의 탐험 이야기들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게다가 저는 (비단 러브크래프트 소설들만 아니라) 비경 탐험을 전반적으로 논의하고 싶습니다. 비경 탐험 소설들은 대항해 시대와 서구적인 근대화를 추종하고, 제국주의 시각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와 조지 워싱턴이 학살자가 아니라 위인이 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관념이고, 각종 탐험 소설들 역시 그런 지배적인 관념을 따라갑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탐험 소설들을 아무 비판 없이 쓰거나 읽는다면, 우리는 그런 지배적인 관념을 맹신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서구적인 근대화가 옳다는 관념들을 밀어넣고, 우리는 그런 관념들을 받아들이고, 문화 예술들을 통해 그것을 재생산합니다. 비경 탐험 이야기 역시 그런 흐름에 속했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이 폭력적인 체계는 그런 관념을 계속 재생산하겠죠.

 

 

이는 우리가 비경 탐험 소설들을 읽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 역시 <광기의 산맥>을 비롯해 각종 탐험 소설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읽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백인 남자 탐험가들을 맹목적으로 쫓아가겠죠.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의 비평문을 편집 및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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