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향’ 판타지라면 여자만의 역량과 욕망을 판타지적으로라도 이야기하는(꼭 이능력 같은 설정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면이 좀 있어야 할텐데, 어째 한국의 여성향 컨텐츠는(드라마 같은) 그런 판타지를 모조리 상실한 듯합니다. 요즘 들어서는 장르 판타지의 기조도 바뀐 것 같아요. 어떤 여성적인 느낌을 상실했죠. 로맨스판타지라는 성별분리적 장르 신설이 영향을 미친 모양인데…(-_-ㅗ)
“루시펠과 예수” 는 십몇 년 전 판타지의 어떤 매력을 갖추고 있는 듯합니다. 발랄하고(느낌표 갯수 좀 보십쇼!!!!) 진취적이고 비대칭적 로맨스에 얽혀 있지도 않고, 친한 사람이 모여서 사적으로 소규모 파티를 벌이는 행복 같은 것에 관한 장면이 많고, 장발 창백 미청년이라는 미학을 거리낌없이 추구하고, 남자들(천사지만…)과의 섹스가 가볍게 등장하고, 대한민국과 다른 세계가 작중에서 동시에 나오고… “정령왕 엘퀴네스” 시절 느낌이 나네요.(아니면 요즘 순정만화가 그럴까요? 제 시야각에서는 잘 모르겠군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무데도 걸리지 않고서 실현하는 글은 즐거움이 묻어나는 만큼이나 독자에게도 매력을 발휘하죠.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 브릿G에서는 “언제나 밤인 세계”가 좀 그렇네요. 글 쓰는 실력이 대문호급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소중한 매력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세상을 그려내보고자 하는 글입니다. 더 상식에 가까운, 상식을 잊지 않은, ‘아직 너무 늙지 않은’ 글입니다. 상식이 무엇인지에 관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펼쳐놓고 스스로 조립한 글입니다. 단순한 만큼이나 대담한 논리들이죠. ‘남자가 가사일을 여자에게 미뤄 두었다 -> 가사일을 하는 기특한 남천사’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괴롭힌다 -> 패버린다.’ ‘맘에 들지 않는 결혼 -> 낙원을 떠나 여행을 시작한다.’ 그래야만 하는 바대로.
성경이 상식에 가까워질 때, 그러한 시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혹은 그러한 시도를 절대적으로 불손하다고 주장하는 사회가 있음으로 하여 이 글은 마녀의 웃음처럼 됩니다. 무한히 긍정적인 웃음이지만, 자신이 (상식을 말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불손하다는 사실을 알며, 그렇기에 스스로의 역량을 알고 있는 웃음이죠.
성경이라는 원초에 관한 이야기를 각색해서 이 글은 제시합니다. 여성에게 원초적인 힘이 있고 그것을 남성들이 비열한 방식으로(학살, 폭력, 거짓말) 막아 오려 했지만, 그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가지고, 불의함을 고발하며 동시에 자신의 힘을 되찾아오려 시도할 수 있게 된다.
또 하나. ‘뻔한 불의가 있다 -> 저항한다(가령 신에 대한 몇백만년짜리 전쟁을 일으킨다)’ 식의 단순한 대항의 논리를 제시합니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 류 대안 신학 이야기는 언제 봐도 재밌네요. 아니 사실 항상 재밌진 않은데… “루시펠과 예수” 는 여성주의 대안신학 이야기이면서도 과거 (여성향) 장르 판타지의 분위기를 갖췄다는 점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