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의 남편으로 선택받기 위해 세 남자, 혹은 둘 이상의 남자가 그녀가 혼약 조건으로 낸 과제를 각자의 방식대로 해결하려 애쓰는 옛날 이야기를 어릴 적에 몇 편인가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이 여성과 맺어진다는 소원을 성취하는 남성 캐릭터란 이야기가 좇는 이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라 정의할 수 있겠지요.
설화를 사랑하는 김춘일의 마음과 그의 해답으로 대변되는 <별>이라는 이야기의 이상이란 ‘누군가를 사랑함은 사랑의 관계에 내걸리는 조건 밑 상대의 진심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미리 첨언하자면, 혼인이 사랑의 결실이라는 믿음, 사랑은 혼인이든 무엇을 통해서든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믿음은 사회가 만든 신화(어떤 대단하신 분의 말씀을 빌리자면 ‘무해한 음모’라고까지 칭해도 무방할)에 가깝기에 오늘날에는 오히려 부단히 의문을 제기해야 할 대상입니다만, <별>에서는 설화가 처한 복잡한 상황이 설화로 하여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남성과 그녀를 원하는 다른 두 남성을 상대로 혼인 조건을 내걸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에, 사랑과 혼인이 한 묶음이라 전제하고 감상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설화의 혼인 조건을 들은 세 남자 중 김춘일만이 설화에게 ‘왜 하필 산갈치인가’를 묻고, ‘그 까닭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조건이 까닭에 우선할 수 없건만 조건을 들은 누구도 까닭을 묻지 않았음에 놀라고, 조건에만 압도되어 있던 자기 자신도 반성하지요.
조건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거래라면 까닭은 그 거래, 즉 조건의 저변에 깔린 사정이고 진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조건이라는 겉면에만 치중하느라 조건 밑의 진심을 읽지 못하고 각자의 이해타산만 앞세우다 어긋나 버립니다. 마치 설화의 까닭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이희광의 뒤를 따라와 십만 금이라는 거액에 공감하고 만 군중들처럼 말이지요. 안타깝고 씁쓸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 싶습니다.
설화가 산갈치를 조건으로 내건 까닭은 생각도 않고 각자의 방식대로 ‘조건을 충족한’ 홍엽과 이희광과는 달리, 김춘일은 기적적으로 설화의 까닭을 찾아내 돌아옵니다. 김춘일이 까닭을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이 극적인 우연이나 행운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세상 만사의 연결고리는 그 연결고리를 간절히 찾는 자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법인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고 싶네요.
설화는 기생인 자신을 원하는 그 많은 남자들 중에서 김춘일만이 유일하게 사랑의 마음을 줄 가치가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음이 틀림없지만, 김춘일은 설화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가치가 빛나는 남자인 것 같습니다. 설화의 처지와 사정을 늘 헤아리는 것은 물론, 설화도 물으리라 기대치 않았던 까닭을 중시하여 묻고, 셋 중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서얼로 키울지언정 관비로는 만들고 싶지’ 않은 아이의 아비 될 자를 고르고 싶다는 설화의 ‘까닭’을 찾아내, 무엇 하나 묻지 않고 그 아이를 자신의 적자로 삼는다며, ‘별이 되고 싶다’는 설화의 오랜 소원을 들어 주고야 마니까요.
김춘일이 ‘산갈치’라는 조건 밑에 감추어진 까닭을 읽고 설화와의 사랑을 성취함으로써 이 이야기의 이상을 실현하는 한편, 홍엽과 이희광은 각자의 개성대로 결점을 갖추고 김춘일과 대조를 이룹니다.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될 만큼 돈은 많으나 인품이 저급하고 기생 신분의 여성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 취급하며 드러내 놓고 ‘조건’에 치중하다 뱃속의 아이 이야기에 길길이 뛰는 이희광은 그렇다 치고, 언뜻 보기에는 인물 훤하고 능력도 좋고 점잖게 옳은 말만 하는 듯한데 무언가가 영 부족한 홍엽은 무엇이 부족한 걸까요. 생각해 보니 홍엽은 상대방의 심정과 처지에 공감하는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지 싶습니다. 설화의 아이가 태어나거든 일단 관비로 기르다 나중에 생김새로 아비를 찾으면 되지 않느냐는 대사에서 뚜렷이 드러나네요.
조건이 까닭에 우선할 수 없고, 까닭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다시 한 번 명심해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