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리거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이 있으니 우울증이 있는 분들은 주의하여 주세요.
나는 거부당했어요. 이것마저 실패했어요. 나는 어쩜 이렇게 잘하는 게 단 하나도 없을까요.
출입국 관리소 직원은 내 서류가 잘못되어서 날 입국시켜 줄 수 없다고 했어요. 내 서류에 ‘모론(moron 멍청이)협회’라고 적혀 있대요. 그런 기관은 없다며, 이 서류는 가짜라고 했어요.그런데, 그 말은, 내가 ‘모론’이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모론’은 엄마아빠가 날 부르던 말이죠. 엄마아빠가 날 ‘모론’이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그 말을 ‘모란’이라고 들으려고 노력했어요.엄마아빠가 아니라 내 머릿 속에서 ‘모론’이라는 말이 들릴 때에도요. 나는 ‘모란’이지 ‘모론’이 아니라고. 그런데 이제는 그 꽃이 필 때까지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운다는 ‘모란’도 싫어요. 꽃이 피지 않는 허브였으면 좋겠어요. 아니, 허브처럼 쓸모 있는 식물도 싫어요.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잡초였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게.
그래요, 어쩌면 나는 ‘모론’이 아닐지도 몰라요. 밖에서는 한번도‘모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요. 난 늘 무람이 앞선 애였죠.흠 잡히지 않으려고. 늘 잘하려고요. 남들은 날 모범생이라고 했어요. 난 늘 어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어요. 어린애들이 부모에게 관심 받고, 칭찬받으려고 하듯이요. 엄마아빠는 내가 공부를 잘 하면, 1등을 하면 날 칭찬해 줬어요. 난 그게 사랑인 줄 알았어요. 내가 2등을 하면, 한 문제를 틀리면, ‘모론’이라고 했죠. 난 내가 벌받을 짓을 한 줄 알았어요. 난 공부만 했어요.처음엔 엄마아빠가 시켜서 했고, 조금 커서부터는 내가 ‘스스로’했어요. 엄마아빠는 공부만 잘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했죠. 친구가 없으면,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갖고, 돈을 많이 벌면 매력적인 사람이 될 거라고 했죠.나는 공부 말고는 한 게 없어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다른 걸 잘 할 수는 있는지조차 몰라요. 남들이 내게 말 붙일 수 있는 화제거리는, 날 좋아해 줄 수 있는 건 성적 뿐이죠. 나는 그게 늘 불안했어요. 성적이 떨어지면 남들이, 엄마아빠가 떨어진 점수만큼 날 덜 사랑할까 봐.
왜 그렇게 부모들은 맹수를 좋아할까요. 아들의 이름을‘타이거’라고 짓고 인간이 아니라 골프선수로만 기른 아버지가 그렇고 스스로를 ‘타이거맘’이라고 부르고 아이들을 나 같은 모범생으로 양육했다며 책까지 팔아먹은 예일대 로스쿨 교수도 그렇고요. 사자는 벼랑에서 새끼들을 떨어트려서 살아남는 강한 새끼만 기른다는 전설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왜 스파르타 전사 훈련시키듯 학생들을 가둬두고 몰아붙이는 학원에 날 보냈어요? 스파르타와 아테네 중 고르라면 아테네를 고르실 분들이. 왜 자식을 호랑이로, 사자로 길러야 할까요? 세상은 정글이니까 가장 강한 맹수가 되어 백수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요?
나는 ‘라이언킹’을 볼 때마다 생각했어요. 왜 굳이 갓 태어난 심바 앞에 모든 동물이 예를 표해야 하나. 심바는 그냥 아빠를 멀리 떠나 하쿠나마타타 하고 즐겁게 살기를 원할 수도 있는데. 왜 심바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을까요. 알아요, 심바의 아버지도, ‘라이언킹’이 되는 것 외의 삶은 생각조차 안 해 봤겠죠. 그러니 아들에게도 라이언킹의 삶을, 강요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정해줬겠죠. 때로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데려가기도 해요. 누구는 그걸 소유욕이라고 하죠.그런데, 엄마아빠도 만약, 나보다 먼저 여기 오게 되었다면 날 데려왔을 거예요. 엄마아빠가 정한 삶의 기준만큼 살지 못 하면 안 사는 게 낫고, 부모 없는 아이들은 그런 기준선 아래로 떨어질 확률이 너무나도 큰 사회니까요. 그런데, 엄마아빠는 그런 사회에 아이들을 내놓기 전에 왜 사회를 바꾸진 않았어요? 나만 사자가 되면 되는 건가요? 주토피아처럼 모든 동물이 서로 갈등하긴 하지만 평화롭게 사는 사회를 만들지 않고요?
내가 몰라몰라처럼 나약해서 이런 짓을 했다고 하겠죠. 그것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닐걸요. 변호사 시험에 떨어지고 막막했어요. 나의 이십년 넘는 삶은 오직 외길직진이었어요. 이제 내게 길이 없어진 거예요.변호사가 아닌 나는 상상할 수 없어요. 이걸 누구에게도 무람 없이 말할 수가 없었어요. 애꿎은 내 손만 물어뜯었어요. 내게는 실패한 나도 사랑해 줄 부모가, 추억을 나눈 친구가 없었고, 나 혼자였으니까요. 나는 고립되었어요.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못 했어요. 절망했어요. 내가 만약 공부, 변호사 말고 다른 걸 알고 할 줄 알았다면, 이러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지금 말할게요.더는 착한 아이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나는 나를 이렇게 몰고간 엄마아빠를, 반항하지 않은 나를 원망해요.
나는 처음으로 공부말고 다른 걸 해 봤어요. 역시나 실패했네요.결국 이렇게 된 내 인생이 불쌍했어요. 이제 삶에서, 지겨운 공부에서, 내 인생에서, 엄마아빠의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행복했는데. 엄마아빠에게 상처줄 수 있어서, 내 진심을 이런 식으로라도 알릴 수 있을 것 같아서 통쾌했는데.
나는 변호사가 되지 못 했지만, 처음으로 나 자신을 변호했어요.출입국 사무소 직원, 당신은 날 ’모론’이라고 했어요. 동시에‘모론’이 아니라서 입국시킬 수 없다고 했죠. 당신이 누구건,과거에 어땠건, 위악이건 아니건 상관없어. 당신에게 모욕당할 입국자는 없어. 당신은 날 몰라. 나는 ‘모론’이 아니야. 이건 내가 이 일을 벌이기 전에 했어야 했다는 말이었어요. 나는 이제 내가 살던 곳으로 추방되겠죠. 나에겐 무량한 날들이 남겠죠. 그렇지만 더 이상 무료하지는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