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자들과 장한가(長恨歌) 의뢰 브릿G추천

대상작품: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 (작가: 한정우기, 작품정보)
리뷰어: 주렁주렁, 18년 4월, 조회 236

1.

제가 브릿G에 리뷰어로 들어와서 생겼던 변화 중 하나라면 소설을 써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는 점일 거예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리뷰를 쓰기 위해 많이 읽고 또 작가들 육성을 많이 듣게되는 환경이라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끌렸던 건 어반판타지 공모전이었어요. 특정 공간이 주어진다는 한계가 제게는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공모전 요강을 본 순간 그냥 갑자기 타이베이로 어학 연수를 간 한국인 여자가 야시장에 갔다가 야시장 근처의 사당에서 대만 요괴들과 만나는….그런 스토리가 떠올랐던 겁니다. 동시에 바로 타이베이의 야시장, 사당의 구체적인 지형을 짜기 위해서 구글지도로 들어가 동선을 확인하게 됐지요. 이상하리만치 이 상상하고 자료를 찾는 과정이 너무 재밌는 겁니다. 그러다 제 얘기를 들은 친구가 “그딴 걸 누가 읽어???”라는 말에 흥분이 화르륵 사그라들었지만 말입니다. 크 가차없는 우정. 저도 제 친구 소논문을 교정보다가 빨간 줄을 좍좍 그으면서 “이게 지금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이 구사하는 한국어 문장이란 말이야? “라고 짜증을 내는 인간이기에….아주 절친이기에 가능한 것 같아요. 이렇게 신랄해도 관계가 깨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서로에게 있기에 가능한 대화이겠지요. 어쨌든 이때의 경험이 가르쳐준 건, 제가 어떤 공간이나 시대상에 꽂힌다는 점이었어요. 제가 꽂힐 수 있다는 건 남도 꽂힐 수 있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2.

사회주의 국가인 현대 중국 말고 과거 중국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에게는 저마다 매력을 느끼는 시대나 공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올드 상하이’일 겁니다. 상하이, 조계지, 이중첩자, 나이트클럽, 동방의 파리….정말 무궁무진 하지요. 한국 경우라면 아마 경성이 이런 공간이 아닐까 싶고요. 극장에서 [색,계]를 보면서 ‘장애령 원작을 가져와 양조위 캐릭터를 늘리고 멜로로 풀어내서 기껏 하는게 올드 상하이 재현이구만. 천하의 이안도 올드 상하이 뽕을 못 피해가는구나.’라 생각했었지요. [자객 섭은낭]을 보면서 ‘허우 샤오시엔 같은 唐나라 덕후가 당나라 배경의 무협을 영상화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느꼈고요. 저마다 꽂히는 시대와 공간이 있고 그걸 어떻게 재현해내는 지를 보는 게 재미의 하나겠지요. 그리고 이 흐름의 어딘가에,  브릿G라면, 올드 상하이의 강시를 주인공으로 데려 온, 한정우기 작가님의 [라오 상하이의 식인자들(이하 식인자)]이 있습니다.

 

3.

우선 저는 ‘라오(老) 상하이’라는 제목에서 약간 당혹감을 느꼈었고요. ‘올드 상하이’나 ‘구(舊) / 옛 상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었을텐데…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식인자]는 올드 상하이에서 부활한 강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강시의 이력이 특이합니다. 소설 곳곳에 뿌려진 정보를 종합해보면, 그는 명말청초의 과거시험 응시자로 짐작이 되고요, 약 스무살이었고, 청나라가 싫어 떠돌다가 당시 촌구석이었던 상하이에서 객사합니다. 그러다 서양인의 양(洋)기가 집중적으로 모인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부활하고요. 강시로 부활해 서양인 남자만 먹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은 ‘식인(食人)’이지 ‘살인’이 아닙니다. 부활한 곳이 프랑스 조계지였기에 양인들이 모여사는 노르망디 아파트먼트의 한 서양 남자를 식인한 뒤 그 방에 눌러앉아 이 아파트에 사는 유일한 동양인이 됩니다. 걸릴지도 모르니까 사냥감은 나가서 구하고요. 서양식으로 머리를 잘랐고 양복을 입었고 문명 지팡이를 들고 모던보이처럼 하고 다니면서도 그는 순진하리만치 누군가에게 발각되리란 의심을 안 합니다. 그러다 치파오 차림의 한 여자가 접근하자 그제서야 자신이 남들의 이목을 끌고 있고 위험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제 식인은 뒷전이고 자신의 정체가 발각될 지 모른다는 위험이 목전입니다.

 

4.

재밌는 소재가 곳곳에 뿌려져있는 소설입니다. 우선 강시가 있고요, 올드 상하이가 있고, 인육만두(일종의)가 있고, 치파오를 입은 ‘삼낭자’란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있고요. 식인을 부각시켜서 호러로 글을 풀어갈 수도 있고, 강시란 非인간을 통해 특별한 능력을 지닌 탐정물로 풀어갈 수도 있고, 또 알고봤더니 양기로 부활한 게 아니라 어떤 사악한 자가 부활시킨 것으로 “내가 니 애비다”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고뇌로 풀어갈 수도 있겠고요. 또 삼낭자와 강시가 짝을 이뤄 사건을 해결하는 액션 활극으로도 풀어나갈 수 있겠지요. 올드 상하이란 배경 자체가 가진 무궁무진함 만큼 [식인자]에는 많은 원석들이 숨어있어요. 때문에 저는 이 소설이 단편으로 끝나기엔 아깝다고 느꼈습니다. 이 배경과 캐릭터를 가지고 연작 소설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어요. 장편소설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단편 분량으로 올드 상하이와 강시란 설정만 설명해도 길이가 길어져요. 지금 [식인자]가 195매라 중편 소설 분량인데 소설 내용의 절반 이상이 상하이와 강시 설명입니다. 낯선 공간과 존재를 설명해야 하기에 설명이 길어질수밖에 없고 때문에 배경설명이 자세하고 반짝거릴수록 소설의 살인사건 해결은 내용이 빈약하다고 느껴질 수 밖에 없어요. 만약 장편으로 개작한다면 1화에 사견해결과 강시로서의 능력을 맛보기하고 2화에서 강시의 과거를 얘기하고 식으로 좀더 촘촘하게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겁니다. 지금 단편 [식인귀]는 분량이 너무 길고 담긴 정보가 너무 많아요. 단편에 담긴 정보를 쳐내서 좀더 짧고 매끈한 단편이 어울릴지, 쳐낸 정보를 뒤에 중간중간 심는 장편이 어울릴지, 어떤 방향이든 만약 가능하다면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참, 더불어 저는 [식인귀]의 설정과 캐릭터가 웹툰화하기 좋은 컨텐츠라고 느꼈어요. 이미지가 상당히 생생하고 새롭고 그러면서도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으니까요. 가령 주인공 강시를 겁나 수트빨 날리는 꽃미남으로 그릴 수도 있겠고 삼낭자를 아주 요염하게 그릴 수도 있겠고….이 캐릭터들을 그림으로 시각화한다면 어떨까, 어쨌든 저에게는 단편으로 끝내긴 아까운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감상이 어쩌면 저에게는 그래도 나름 익숙한 소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한계가 분명 있습니다. 중국적인 것에 흥미를 느껴 중문과를 졸업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그런 입장에서 느낀 점들입니다.

 

5.

[식인자]는 1인칭 시점의 소설입니다. 올드 상하이에서 부활한 남자 강시가 많은 것들을 독자에게 설명하는 형식을 띄고 있어요. 이질적인 장소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직접 설명을 합니다. 독자와 작중 화자간의 거리가 줄어드는 이점이 있겠지요. 하지만 곳곳에서 사진이나 주석으로 작가가 개입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작가님은 리뷰 의뢰에서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고 허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넣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음…..글쎄요. 강시가 주인공인데 이걸 실제로 받아들일 독자가 있을까요? 그것도 한국에서요. 이미 배경과 캐릭터만으로도 한국에서는 충분히 이질적이기 때문에 그 이질성을 더 환상적으로 사용하는게 낫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느꼈어요.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개입이 [식인자]를 더 이질적으로 보이게도 해줍니다. 그게 무엇을 위해서란 물음은 차치하고요.

 

6.

[식인자]가 독서의 몰입을 막으면서, 계속해서 낯선 느낌을 던지는건 수시로 중국어 발음으로 명사를 표기하는 점에도 있어요. 상하이나 상시 정도야 지명이니 그렇다고 해도 스쿠먼(石庫門)이나 사합원이나 삼낭자까지 원어 발음으로 표기하는 건 글쎄요…..뭐랄까요, 통일이 안 되어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이런 부분이요

 

6월부터 이렇게 더웠습니다! 햇무리는 마치 용광로 속에서 피어나는 불꽃같고, 무더위는 동쪽, 중국, 대상해를 정복하고야 말았습니다!’
– ‘대상해의 뜨거운 모습(大上海的熱景)’, 1934년 8월 15일

 

여기서는 대 상하이나 따 상하이라고 하지 않고 대상해라고 표기를 했습니다. 大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거니 싶으면서도 저는 모르겠는 겁니다. 계속해서 이때 상하이가 더웠다는 얘기를 하고 얼마나 더웠는지를 알리기 위해 저 사료까지 인용을 하는데 제가 궁금한건, 강시도 더위를 타는가 였어요. 햇빛이야 싫어하는게 이해가 가는데 추위나 더위도 탄다는건가, 더위가 강시랑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는 겁니다. 또 이런 부분이요.

 

애란의 작가가 썼다는 이 괴기소설은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개화 좀 했다는 사람들 중에 이 소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제목이 더라쿠라, 아니 드라쿠라 백작이었던가? 나는 사람의 피를 먹는 흡혈귀가 나온다는 말에 사실 읽어보지도 않았다. 피를 빠는 자가 뭐 어쨌다는 것인가. 양놈들에게는 괴기할 수 있어도 나에게는 아니었다.

스쿠먼까지 원어발음으로 표기하면서 아일랜드의 한자 음역인 애란은 한국어 발음 애란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1인칭 시점이기 때문에 30년대 상하이에서 사는 화자인 강시가 당시 표기였을 애란이나 드라쿠라 백작이라고 발음하는 건 이해할 수 있고, 시대상을 생생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나 프랑켄슈타인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려요. 즉 이 강시 화자는 어떨땐 원어 발음으로 말하다가 당시 발음으로 말하다가 어떨땐 현재 발음으로 말하고 한국어 발음으로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이자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강시’ 캐릭터가 계속 흔들립니다.

 

7.

[라오 상하이의 식인자들]의 제목 ‘식인’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작가가 있지요. 루쉰입니다. 그는 [광인일기(1918)]에서 미치광이의 일기를 빌어 중국 유교 역사를 ‘사람을 잡아먹는(食人)’ 역사라 대못을 박아버렸지요. 한정우기 작가님은 일찌감치 루쉰을 언급합니다.

 

루쉰이 쓴 [광인일기]에도 나오지 않는가. 식인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었다. 기근이 들었을 때도, 역병이 들었을 때도, 나라에 난이 생겼을 때도, 사람들은 살기위해 사람들을 먹었다. 죽은 자를 먹을 때도 있었고 산 자를 먹을 때도 있었다. 먹물을 먹는 자들은 식인을 하는 세상을 만든 원흉이었지만 자식의 살을 먹어야만 하는 어미의 마음을 이해하려들지 않았다. 루쉰만 해도 모든 식인을 다 싸잡아 욕하지 않는가.

 

이렇게 대놓고 언급을 해주는 이상 저같은 사람은 뚫어지게 이 부분을 팝니다. 저에게는 주인공 강시가 루쉰의 상징인가? 이렇게 주의가 환기됩니다. 그리고 이걸 느낀 순간, 계속해서 강시가 흔들린다는 인상이 강해졌어요. 주인공이 향시에 응시했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다고 하는 걸 봐서 식자층이겠지요. 인간으로 스무해를 살았다고 했으니 약 20살이겠고요. 명말청초에 죽었다가 30년대 상하이에서 부활했습니다.

 

사람들과의 교류 없이 신문과 잡지로만 세상을 파악하는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워한 것은 ‘말’이었다. 삼백년 동안 사람들의 억양, 어휘 심지어는 글을 쓰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말하는 방식 그대로 글을 쓰는 세상이라니. 지금 세상은 내가 살았던 시기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강시가 살았던 시대는 말하는 방식 그대로 글을 쓰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문언문(文言文)이 따로 존재했고 강시는 그런 문언문을 공부했던 사람이고요. 그는 관직에 나가기 위해 공부를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명말청초에 죽었기 때문에 청대 소설의 결정체인 [요재지이], [홍루몽], [유림외사] 등을 다 못 읽었을 사람입니다, 부활하고 나서 봤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중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위치는 굉장히 낮았어요. 小說이라는 단어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별 볼일 없는 자질구레한 말 모음/ 허구 이야기라고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다 양계초의 ‘소설계혁명’을 거쳐서 루쉰이 “말하는 방식 그대로 글을” 쓴 최초의 현대 소설 [광인일기]를 등장합니다. 이 강시는 소설이 천대받던 시기에 죽었다 부활했는데, 이 문학관의 간극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현대 소설가인 루쉰이나 빠진을 언급하고 있어요. 원래 소설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저는 이 부분이 가장 낯설었습니다. 삼백년 전에 죽은 사람이 부활해서 (중간에 뭔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화감 없이 현대 중국 소설을 읽고 얘기한다는게요. 그가 살았던 시절의 중문학사에서 소설의 위치를 생각해본다면 굳이 정보수집을 위해 소설을 안 봐도 될텐데요. 또 정보수집이나 언어 공부를 위해 잡지나 소설을 읽는다면 굳이 루쉰이나 빠진이 아니라 당시 베스트셀러 소설을 읽는게 더 나을텐데요. 그니까 이런 느낌인 겁니다. 조선 중기에 사망해서 지금 부활한 한국인 강시가 갑자기 한강 소설이나 조남주 작가를 말하는 듯한.

 

저는 이 위화감을, 작가가 개입해서 본인이 좋아하거나 혹은 호감을 갖고 있는 중국 현대 소설사 정보를 주려고 하는 걸로 보였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의 소설입니다. 강시가 1인칭이다가 작가가 1인칭으로 개입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모든 창작물에 창작자의 욕망이 담겨 있겠지요.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첫번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요. 무엇을 위해서 말입니까?

 

8.

[식인자]를 읽은 뒤에 한정우기 작가님의 다른 소설 [다시 쓰는 장한가(長恨歌)(이하 장한가)]를 읽었습니다. 제목부터 분명하지요. 백거이의 ‘장한가’를 다시 쓴다는 건, 양귀비와 현종 이야기를 재해석하겠다는 의지이지요. 만약 제목을 [장한가]라고 했다면 멋지다는 느낌을 전 못받았을 거예요. 이 단편 역시 186매로 깁니다. 현종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양귀비에게 ‘귀비’라는 궁궐의 직함 대신 ‘(양)옥환’이란 본래 이름을 돌려주는 소설입니다. 양귀비에 대한 재해석은 그다지 크게 새롭지는 않습니다. 통속적이란 인상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저는 [식인자]보다 [장한가]가 더 뛰어나다고 느꼈습니다. 심지어 통속적인데도 불구하고 뭔가 울컥하면서 어느새 이들의 해피엔딩을 응원하게 되더군요. 이 단편 역시 길고 주석이 간간히 나오는데도 개입하고 있는 인상을 못받았고요.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우선은 작중 화자가 양귀비가 아닙니다. 다른 시점 인물이 있어요. 이 시점인물이 계속해서 양귀비와의 거리를 조절해줍니다. 독자인 저는 이 시점인물의 눈을 통해 양귀비와의 거리를 확보하고요. 만약 양귀비의 1인칭이었다면 핑계가 아닐까 계속 의심을 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 3자가 등장하니 좀더 떨어져서 볼 수 있고 또 이 제3자, 작중 시점인물의 사연에도 몰입할 수 있었고요.

[장한가]의 주석은 [식인자]의 주석이라는 좀 다른데, 인용문일 경우 주석이 있더군요. 즉 다른 곳에 있는 글을 가끔 본문에 인용하고 있는데 출처를 밝혀줌으로써 이 소설과 작가에 대한 신뢰감이 쌓입니다. 개입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요. 솔직히 좀 더 폼 나 보이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단편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장한가]가 더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식인자]처럼 장편으로 봤음 좋겠다는 느낌은 또 없었어요. [식인자]는 불완전하고 헛점이 있지만 장편으로 발전했음 좋겠는데, [장한가]는 크게 이런저런 부분이 바꼈음 좋겠다고 느끼지를 않았습니다. [장한가]는 단편이란 딱 맞는 옷을 입었달까요.

 

9.

두 작품의 차이가 소설의 시점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唐대와 1930년대에 대한 작가님의 거리가 다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전 논문 테마를 못 잡아서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어느날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시, 소설, 산문, 비평 이렇게 장르를 정해서 그 중에서 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래도 못 정하겠으면 시대로 한 번 해봐라. 누구는 자기랑 먼 시대를 좋아한다, 나와는 무관한 느낌이고 좀더 객관적일 수 있을 것 같고 멀먼 멀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랑 먼 시대를 뭐하러 하느냐 나랑 가까울수록 더 나와 연관된 것 같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 이렇게요.  현대는 저랑 가까워서 싫었고 당송시대는 저랑 멀어서 싫었어요. 저한테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시대를 선택했지요. 시대를 먼저 정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지면서 그 시대에 연구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나 살펴보았고요.

두 작품을 읽으면서 시대로 한 번 해보라는 교수님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막연한 추측입니다만 저는 작가님이 30년대 상하이에는 좀더 개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작가 본인을 약간은 좀더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 란 생각을 잠깐 했더랬습니다.

 

 

덧.

1) 장한가 설명에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양귀비라 설명하셨던데 멸망은 아니지요. 당 제국 쇠퇴의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요. 설명이 좀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2) [라오 상하이의 식인자들]이나 [다시 쓰는 장한가(長恨歌)]나 소설 전체의 내용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좋은 제목입니다. 하지만 읽는 이의 흥미를 끄는 제목인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음…..말하기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좋은 논문 제목이라고 느꼈습니다.  

3) 두 작품 다 깁니다. 긴 단편 소설을 한 번에 읽기란 독자 입장에서 벅찹니다. 다음번엔 회차를 끊어서 올리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어떤 장면에서 회차를 끊어야 독자의 애가 탈지 연습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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