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는 기도 같은 걸 듣는다든지?”
“안 들어.”
루시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연구원은 굳은 얼굴로 예수를 바라보았지만,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설은 전 세계 수십억 명이 동시에 동일한 꿈을 꾸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일곱째 날에 주님이 오신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일반적인 종교 서사라면 이 꿈은 구원의 서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그 기대를 무참히 부숴버린다.
날개가 돋아 하늘로 솟구치는 DA(Dreamer Ascension), 승천 현상. 사람들은 처음에 그것을 천국으로 가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신은 우주 저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거기에 쓸 만한 군인들을 마구잡이로 징집 중이었다. 날개를 달고 빛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우주 최전방의 총알받이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꿈을 꾸지 못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NDD(Non-Dreamer Death) 현상은 더욱 냉혹하다. 전쟁에 쓸모없다고 판정된 부품들을 한꺼번에 폐기처분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지구는 수없이 많은 군사 기지들 중 하나였고, 인간은 소모품이었다.
이것이 이 소설의 진정한 스페이스 호러적 핵심이다. 코스믹 호러는 인간이 우주의 거대한 무관심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공포는 한 단계 더 깊다.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이 공포다. 신이 지구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 시선이 사랑이 아니라 효용의 시선이라는 사실. 라그랑주 포인트 L2에 떠 있던 존재들이 전송한 신호, 성간 공간을 떠도는 보이저 탐사선을 잠시 응시하다 시선을 거두는 신의 모습은 인류의 존재가 얼마나 부수적인 것인지를 소름 돋도록 명확히 보여준다. 우주의 끝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시선은 사랑이 아니라 품질 검사의 시선이었다.
이 부분은 내 생각과 많이 비슷하다. 신의 관심을 받는 사람은 인생에 고난이 많다 ㅋㅋㅋㅋㅋ 모든 신화를 들여다보더라도, 신의 관심을 받는 것은 세상을 구할 영웅들이고, 그들은 뭐 하나 순탄히 넘는 경우가 없다. 사람들은 신이 자신만을 봐주고,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길 바라지만, 신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뭐 하나 내 뜻대로, 내 ‘자유의지’대로 행할 수 없다는 의미다. 절벽으로 걸어가든 불구덩이로 뛰어들든 내 마음대로 해야 되는데, 신은 그럴때마다 강제로 나를 돌려세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망할, 갓 댐!
소설 속 통계는 묘하게 설계되어 있다. 첫째 날 꿈을 꾼 자는 전체 인구의 52퍼센트, 둘째 날은 16퍼센트. 합산 68퍼센트가 꿈을 꾸었고 32퍼센트는 끝내 꾸지 못했다. 기독교인 중 꿈을 꾼 비율은 93퍼센트로 압도적으로 높다. 그러나 이 숫자들은 대단히 무작위적이다. 이 통계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숫자 자체가 아니라, 그 숫자가 현실에 가져오는 균열 때문이다.
93퍼센트의 기독교인이 꿈을 꾸었다는 것은 동시에 7퍼센트의 기독교인이 꿈을 꾸지 못했다는 뜻이다. 평생을 신에게 바친 독실한 신자가 선택받지 못하고, 신을 부정해온 무신론자가 선택받는 상황. 그 모순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교황 아우렐리오의 사례다. 수십 년의 신앙, 교회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 첫째 날 꿈을 꾸지 못한다. 그는 기도한다. 간절히, 오래. 그리고 둘째 날에야 겨우 꿈을 꾼다. 그러나 예수가 알려주는 진실은 더욱 가혹하다.
“둘째 날에는 기준을 낮추었습니다. 첫째 날 꿈꾼 자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신이 기준을 낮춰서야 통과한 것이다. 전쟁에 쓸 만한 인원이 부족해서 자격 기준을 완화한 것이다. 평생의 신앙이 이것이었다. “추가 합격 통지.” 전쟁터니까 다 늙은 교황보다야 젊은인간들이 낫겠지
리처드 타이슨은 그 반대편에 있다. 철저한 무신론자인 그는 첫째 날, 가장 먼저 꿈을 꾼다. 반면 그의 아내 엘리자는 꿈을 꾸지 못한다. 믿는 자가 탈락하고 믿지 않는 자가 선택받는 이 역설은 단순한 반전 장치가 아니다. 소설은 이것을 통해 선택의 기준이 신앙이 아님을 직접 말한다. 기준은 전쟁에의 유용성이다. 리처드는 합리적 무신론자로서 오히려 그 전쟁에 필요한 어떤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작위에 가까운 선택이 사회에 가져오는 파장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담임 목사가 꿈을 꾸지 못했다며 꿈을 사탄의 시험이라 선언하자 교인들이 교회에 불을 지른다. 첫째 날 꿈꾼 이들이 둘째 날 꿈꾼 이들을 부정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타임스 스퀘어에서 계시 세력을 따르자는 시위대와 그것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시위대가 충돌해 압사자가 발생한다. 소설은 이 혼란을 통해 현대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은유한다. 종교적 신념, 선택받음에 대한 집착, 소외된 자들의 분노, 그 모든 것이 이 비합리적인 선택의 구조 안에서 한꺼번에 폭발한다.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자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역시 리처드 타이슨이다. 과학자이며 합리적 무신론자인 그는 이 사태를 과학자의 시선으로 판단하고, 결국 인류를 구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소설이 그를 통해 묻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꿈에서 온다. 들려올라가는 순간, 그는 신의 품을 향한 강렬한 갈망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 거부한다. 루시퍼는 이것이 진짜 DA의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리처드는 신에게 선택받고도 그 선택을 거절한 것이다.
“그대에게는 정말로 신이 필요 없는 거야.”
이 문장 속에서 자유의지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난다. 신이 부른다고 해서 가는 것이 자유의지가 아니다. 신이 불러도 스스로의 이유로 남는 것, 그것이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는 고통이다. 외로움, 불안, 책임.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서야만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
“그는 그 모든 고통을 받아들여 가슴 속에 담았다. 그리고 견뎠다. 그러자 그는 자유로워졌다.”
소설은 결국 신이 허락한 자유가 아니라, 신에게서 돌아서는 고통을 통해 얻어낸 자유,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유를 인류에게 돌려주기 위해, 예수는 신을 배신하고 스스로 소멸한다. 그 선택 역시, 자유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