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과 마주한다는 것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엘 문도 (작가: 장아미, 작품정보)
리뷰어: Ello, 18년 3월, 조회 127

 

1.

처음 이 작품의 연재를 따라가면서 결말에 대한 걱정을 했었어요. 그래서 결국 엄마를 찾게 될까, 기대게 될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마무리가 될까봐요.

어딘가에 있을 해답을 찾아가는 여행, 탐색에 대한 이야기는 외형의 변화건 내적인 변화건 늘 변화를 결말로 들고 나타나니까요.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 둘이 남게된 주인공 나래는 자기 주변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좋아하는 엄마와 분명 겉보기엔 친해보였을 거예요. 하지만 바람부는 언덕이라는 소중한 장소를 공유하고, 자연이 만들어준 보물창고(나무의 구멍 속)에 나래를 위한 선물을 남겨놓는 아버지에게 기대어왔으리란 건 자명한 사실일 거예요.

그런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친구와 다정해지는 어머니를 보는 주인공은 아무래도 상실감에 젖을 수 밖에 없었겠죠. 더 의심하고, 더 나약해지고, 자신을 더더욱 비참한 굴레에 밀어넣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어머니와 투닥거리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나눴던 언덕에 올라 아버지의 유작을 발견하고, 정현철 아저씨를 찾아 유작의 여부에 대해 추궁할 때까지 끊임없이 응원했어요. 지지 말았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덤덤한 잿빛이었고, 고작 코코아 단맛에도 눈물이 핑도는 척박함이었지만요.

그런가하면 시공의 통로를 통과해서 처음 만난 그 친구는 아주 붉은 머리를 하고 있었어요. 그림자 없는 세상, 아니면 그림자만 남았던 콜로니아에서 벗어나 처음 맛보는 색깔인 것 처럼 강렬하죠. 그러고보면 1회에 알로 시작했다는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겠네요.

나래는 알에서 깨어나 아리를 보고 각인을 한거에요. 아기새처럼.

그리고 만나게 되는 ‘검은’ 바람의 마법사나 총천연색의 가발, ‘붉은’ 전갈 같은 혹은 ‘보라색’ 꽃 한 송이라던가.

주인공 나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아버지를 잃었던 상실감을 호기심으로 한껏 채워줍니다. 카다는 잉걸불을 살리는 부채의 역할을 맡으면 되겠네요.

떠나 온 뒤에야 소중항을 알게 된다고, 나래는 종종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 엄마.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진 않게 되죠. 조건 반사처럼 익숙한 것을 찾으려는 시도였을 뿐이에요.

하지만 결국 이세계의 끝이 다가왔을 때 그리고 다시 자신이 속했던 세계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를 잃었던 상실감은 채워지고 무언가를 깨닫고 말아요. 엄마가 속한 세계는 엄마에게 엘문도였고, 그건 나래가 비추는 거울 속의 세상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어떤 세계도 자신이 중심이고, 결국 자신만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엄마의 행복을 빌기로 하죠.

나래는 완전한 독립체니까요.

대가가 크긴 했지만 그만큼 깨달음도 컸으니 충분한 보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래는 큰 내적성장을 해서 돌아왔네요. 다시 나래 스스로의 엘문도를 창조한 것에 대해 큰 박수를 보냅니다.

 

2.

이젠 몇가지의 궁금증과 아쉬움에 적어볼까요.

저는 엘문도로의 여행이 나래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건 알아요. 나래는 엘문도라는 세계를 알지도 못했고 스스로 알아서 떠나기에도 소극적인 학생인 것이 분명했거든요. 나래에게 최대 반항은 학교 축제를 이용(심지어 땡땡이도 아니고!)해서 적절히 자유롭게 현철아저씨를 만나러 온 것 정도였어요. 그리고 사춘기 소녀들이 할 수 있는 충동적인 행동이라곤 엄마가 간직하고 있던 아빠와 나래 사이의 추억을 찢어버린 정도였죠.

그렇지만 결론적으론 아버지의 유작을 찾기위해 발걸음을 떼었고, 의도치 않게 과학실의 도둑과 휘말려 버렸지만 결국 아버지의 유작은 찾지 못한게 되었잖아요. 물론 글로 써진 나무 둥치에 감춰져 있던 그 소설말이에요. 그 소설은 독자라면 누구든 짐작할 수 있는, 엘문도에 대한 그리고 카다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래서 아버지는 모나가의 아리에 대해 쓰고 엘문도에 대해 쓴 건 아버지 고유의 창작물이 아니라 엘문도의 세계를 엿본 관찰자의 시선에 불과했나요?

이야기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 나래를 이끌기 위한 힌트였을까요. 아, 아니라면 그 나무둥치에 숨겨져 있던 엘문도는 아버지가 쓴 소설이 아니라 나래를 엘문도로 끌어들이기 위한 고양이의 음모일 수도 있겠어요.

여기에 뚜렷한 답을 주시건 주시지 않건 좋을대로 상상하고 가장 그럴싸한 답변을 끌어다 댈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 소설이 정말 아버지의 유작이 맞다면 전 아버지에게 조금 실망할 것 같아요. 아버지는 나래라는 이름을 짓기 위해 어머니에게 즉석에서 만들어낸 (아닐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들여주고 어머니는 그 꿈 이야기를 곱게 눈 흘기며 못이긴 척 받아주는 사람이었죠. 아버지의 솜씨가 단지 관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진 않네요.

 

그리고 카다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요? 검은 바람의 마법사이자 이미 충분히 불행한, 저주를 받은, 단어가 아닌 아름다운 문장으로 주문을 외는 어린아이인 척, 소년인척, 청년인 척 하는 나이 많은 마법사인 것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래를 아주 오래 기다려왔다고 했어요. 카다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존재가 나래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떤 저주가 걸려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왜 걸려있었던 걸까요. 이건 인간적으로(?) 작가와 독자와의 의리(?)로 카다의 저주에 대해 외전이나 단편을 써주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카다 앓이….

 

나래는 아주 큰 힘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 나는 빛이요, 바람, 불이요, 물이었으니까. 잎눈 속에서 꼬물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돌고래가 수면 밖으로 뛰어오를 때 그 꼬리에 부딪쳐 힘차게 튕겨 나가던, 화로 속에서 붉은 혀를 날름거리다 똑똑 녹아 떨어져 먹이를 찾기 위해 흙더미를 파헤치는 풍뎅이를 기겁하게 만드는 존재, 나는 세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집에서부터 써도 되는 순간이동을 열심히 달려간 뒤에야 늦을 것 같으니, 고작 화장실 청소가 하기 싫어서 교문 앞에서야 순간이동을 하는 그런 …. 주인공이긴 하지만요. 어릴 때는 이웃 언니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고. 아리의 목숨이나 카다를 구한 적도 있죠. 자주 쓰지 않아서 그렇지 큰 힘이 있다는 건 나래를 버티게 하는 든든하고 굳건한 심지였을텐데 그런 힘이 사라졌는데도 나래는 여전히 밝네요. 이 부분이 의아했어요. 나래는 너무 여전해요.

왜일까요. 나래에게는 피아트 룩스가 남아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요.

 

 

18. 보스케 편을 보면 나래의 실수로 아리가 분노한 숲을 뛰어들게 돼요. 앞서서도 각인이란 표현을 썼지만 그건 나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아리는 나래를 돌려보내줘야 하는 사람 이상으로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아요. 그저 책임감. 그것도 막중하지 않은 책임감일 뿐이라고 느꼈어요. 우리 모두 아리 성격 알잖아요. 호기심이 책임감보다 앞서는거.

그런 아리가 과연 여행 첫날 말 안듣고 사고를 친 나래를 위해 그 숲이 어떤 숲인지 알면서도 물불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너무 욱하는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아리를 나래에게 떼어놔야 하는 이유가 있나 싶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카다랑 이렇다 하게 비밀 이야기를 하거나 가까워지진 않고 다시 아리가 합류하더라구요. 이 장면이 계속 밟히긴 하네요.

 

3.

판타지지만 끝까지 현실성이 남아있는 건 다정한 대화 때문도 아니요 끈끈한 우정 사랑 때문도 아닌 것 같은 이유는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그린 것이 따로 있는 까닭입니다. 현실성이 조금 사라지려고 하는 찰라마다 신발과 음식에 대한 묘사가 배경을 메꾸고 있어요. 신발의 앞코, 신발끈을 묶는 행위,

달콤함과 알싸함의 조화, 따뜻함과 푸짐함의 조화, 뱃머리의 바람을 맞으며 먹는 아이스크림 같은 배경들이요.

콜로니아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음식과 신발을 엘문도에서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요. 그것이 나래를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세상으로 날리지 않고 한 쪽 끝을 꼭 잡고 있어요.

사실 나래가 피아트 룩스를 쓸지 안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아주 단단하게 열린 결말이라 써도,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떤 결말을 됐건 나래가 확신에 차서 선택했으리란걸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선택이었어도 괜찮아요. 그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지 않고 끝까지 주인공에게 맡겨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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