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신경써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당장 내일 먹고 살 일부터, 출근을 몇분 뒤에 할 것인지 옷은 뭘 입을 것인지 과제를 오늘 할 것인지 내일로 미룰 것인지 시험준비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인지 연차를 쓸 지 말 지 등등 개개인이 생각하는 눈 앞 ‘사건’에 대한 심적인 에너지 투자 비중은 모두 다를터인데, 만일 ‘어떻게 해야할까’의 고민 대상이 ‘필통 속 똑같은 지우개 두 개를 발견했다’라면 과연 여기에 심도있는 에너지집중을 할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지우개 패러독스>는 누군가가 보기엔 상당히 사소하기 짝이 없을 ‘작은 사건’이 소재가 된다
바로 필통 속에서 튀어나온, 똑같이 생긴 두 개의 지우개다
누구는 뭐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고, 누구는 괜히 찜찜한 마음에 하나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릴 수도 있겠고, 어느 누군가는 그 둘이 똑닮았다는 사실마저 알아채지 못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어떤 타입일까 생각해보니 좀체 답이 떠오르질 않는다
학창시절 물건을 두어개 더 챙겨가기 보다는 늘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축에 속했기 때문인가 보다
‘주호’의 반응은 뜨겁다
뜨겁다기보다는 아차, 싶을 만큼 따끔하다
필통 속 두 개의 지우개에 숨이 가빠지고, 헛것을 본 양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혼란스러움을 넘어 머리가 아파오기까지 한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정보를 기억하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탓이었다
그 누구보다 ‘정보’에 예민한 인물에게 이 용납할 수 없는 ‘정보’가 쉬이 받아들여질리가 없다
혼돈, 카오스 그 자체다
고작 지우개 하나에 온 뇌가 팽팽 돌아가고 속이 안좋아 견딜 수 없는 주호는 온갖 가능성을 되짚어본다
이 과정에서 표현되는 주호라는 인물이 흥미로워 글에 점점 더 몰입이 된다
인물 자체의 행동은 공감할 수 없으나, 그가 할 법한 행동과 생각들을 따라가는 건 제법 재미가 있다
그렇게 계속 읽어내려가는데 웬걸, 분량이 꽤 길다
읽고 읽어도 남은 분량이 줄지를 않는다
소개글만 보고서는 다분히 짧은, 아이디어 하나로 승부하는 글이겠거니 지레짐작해버린 탓에 더 그리 느껴진다
그렇게 지우개 하나에 온 정신과 에너지를 빼앗기고, 과대망상과 불안에 시달리던 주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자신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모 사이트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물건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그 규모의 범주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신선하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하다
이런 식의 전개가 있으리라 생각을 못했던 까닭이리라
작가의 이 SF적 망상이 더할나위없이 즐겁다
주호에게는 과학자들의 이론보다, 이 세계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보다 지금까지 쌓여온 자신의 ‘데이터’의 공고함을 지켜내는 것이 더 위대한 사명같아 보인다
누구도 몰랐던 진리를 밝혀내고 기뻐하는 과학자들 그리고 지우개 모순을 해결하고 속이 편안해진 주호를 바라보는 여자 혼자만 공포에 질려있다는 점도 괜찮은 포인트였다
왜, 모두 미쳤는데 나만 정상이면 거기선 내가 미친 게 맞는 거니까
처음에는 별 까탈스러운 놈이 다 있다, 했다
그런데 이 인물의 까탈스러움엔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었고 종내 자신만을 위한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식의 해피엔딩이라니, 발상도 재미나고 결말도 즐겁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나쁜 놈이 아니니 엔딩의 방향에 찜찜해할 이유도 없고, 지우개 하나에 방방 뛰며 난리치는 인간에게 그깟 개구리유니콘지우개가 대수일까?
지우개 패러독스에 대한 답을 얻었으니 그저 편안한 숙면만 남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