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 소설의 젠더 감수성과 여성 인물들의 주체성에 대하여 비평

대상작품: 오버 더 호라이즌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페퍼로니, 18년 3월, 조회 6714

1. 들어가며

누구나 이른바 인생의 레퍼런스로 삼는 작품이나 작가가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삶의 어느 순간에서 불현듯 떠올리게 되는 작품의 장면이나 구절, 혹은 그 작가의 작품들─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걸 누군가의 ‘인생의 레퍼런스’ 내지는 ‘인생 작가’, ‘인생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예컨대 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노라면 종종 어떤 정치 · 외교적 사건을 얘기할 때 『은하영웅전설』, 통칭 은영전의 이야기를 가져오면서 관련짓는 분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곤 해요. 그런 이른바 ‘인생의 레퍼런스’가 누구에게는 스타워즈일 수도 있겠고, 혹은 스타트렉일 수도 있겠고, 셰익스피어일 수도 있을 것이고, 해리 포터일 수도 있을 것이며, 어슐러 르귄, 나쓰메 소세키,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사무엘 베켓,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일 수도 있겠고, 스티븐 스필버그일 수도, 마블이나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만화나 영화들일 수도 있겠죠.

이런 얘길 할 때 제가 언제나 떠올리게 되는 인생 작가는 그 누구보다도 이영도 작가입니다. 『드래곤 라자』에서부터,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같은 주요 장편들, 3일 뒤면 『그림자 자국』 이후 10년 만의 신작 장편 『오버 더 초이스』로 브릿G에서 연재를 시작하게 될 ‘오버 더’ 시리즈나 「키메라」 같은 판타지 단편들, 팬들의 원성(?)을 사곤 했던 SF 단편들, 잘 알려지지 않은 「봄이 왔다」와 같은 소소한 단편에 이르기까지. (사족이지만 몇 년 전 SF 판타지 도서관에서 지금은 폐간된 잡지 판타스틱에만 수록됐던 단편인 「나를 보는 눈」을 읽은 뒤에 ‘아, 이제 이영도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라고 뿌듯했던 기억이 있었더랍니다. 자랑(?)입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대체로 수박 겉핥기식의 미적지근한 덕질만을 하며 살아왔던, 그리고 살고 있는 제가 이렇게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작품들을 찾아 읽어봤다고 자신할 수 있는 덕질의 대상, 인생 작가는 아무래도 아직까지 이영도 작가뿐입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어쩌면 제가 살면서 처음으로 접했던 ‘일종의 페미니즘적 텍스트’가 이영도 작가의 작품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조차도 접하기 이전이었던 2000년대 초중반, 중고등학생이던 그때의 저에게 이영도 작가의 작품들과 그가 여성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른바 ‘pre-feminism(?)’ 텍스트로서 저의 인생과 문화적 수용에 제법 크나 큰 영향을 주었지 않나 싶었거든요. 물론 이영도의 작품들이 대단한 페미니즘적 가치나 전형성, 혹은 전복성을 함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오히려 한계라고 생각될 수 있는 측면 또한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페미니즘 텍스트로서 이야기하기에 훨씬 더 전위적인 작품들이나 혁명적이고, 역사적이었으면서 적절한 작품들은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다 익히 떠올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혹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사랑(?)을 얘기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수사라는 얘길 했던 게 문득 기억이 나는군요.), 이영도의 작품들과 페미니즘을 연관시켜 이야기 할 수 있는 나름의 의의─ 이영도 나름의 젠더 감수성은 물론, 젠더에 대한 일종의 작가적 탐색 과정이 이영도의 작품들 전반을 비롯한 작품들 속의 ‘수많은 여성 인물들’에게 분명히 녹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수많은 이영도의 여성 인물들을 거칠게나마 한번 되짚어봄으로서, 이영도 작품 속의 pre-페미니즘적 가치를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이영도의 작품이 갖는 시대적 함의를 고려해볼 것이고, 둘째로는 『드래곤 라자』에서부터 『폴라리스 랩소디』에 이르는 ‘전반기’(제 자의적 기준입니다) 작품들의 여성들을 살펴보고 그 한계점을 고려해볼 것이며, 마지막으로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를 통해 조금이나마 진일보했던 ‘후반기’ 여성 인물들과 그 가치를 생각해보며 글을 마쳐볼까 합니다.

 

2. 시대적 문맥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이영도의 작품이 페미니즘적 가치를 함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일단 우선적으로 고려해봐야 할 측면으로 시대적인 문맥과 대한민국이라는 배경이 있습니다. 『드래곤 라자』의 대성공 이후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던 2000년대 초반 ‘대여점 양산형 판타지 소설’의 물결 속에서 작품들 속 여성 인물들은 십중팔구 한국의 흔한 대중매체 속 여성 인물들이 (당시에나 지금에나) 그렇듯 도구적으로 기능할 따름이었습니다. 나아가 한국의 이른바 ‘순문학’ 내지는 ‘문단문학’ (남성 작가들의) 작품들 역시도 이러한 양상에서 결코 자유롭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이 남성 인물, 남성 주인공의 들러리에 그치게 되는 식으로 얄팍하게 그려지고 있을 따름인 작품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 문화 전반에 가득합니다. 더욱 심각하게는 여성에 대한 몰이해나 이해의 부재(근래 들어 많은 비판을 받은 김훈 작가의 작품 속 여성이 겪는 생리에 대한 서술이 그 좋은 예시겠죠.)를 일말의 성찰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은, 거듭 적지만 2000년대 초반이나 지금이나 예를 들 수도 없을 만큼 많습니다.

사족으로, 이 맥락에서라면 ─저는 비록 직접적으로 그 시절을 겪은 세대는 아니기에 여러 가지 얻어 들은 것으로 추론할 뿐입니다만─ 이영도 작가의 원산지(?)로 들 수 있는 PC통신-하이텔 그룹이 갖는 나름의 특별한 면모 또한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70년대 뉴웨이브 SF 작품들을 비롯한 외국의 장르문학을 활발하게 수용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내의 뒤쳐진 젠더 인식과는 조금이나마 결을 달리 할 수 있었던 요인이 작용하진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죠. 2018년 현재는 국내 SF 팬덤이 이때의 전통을 계승하여 거듭해서 이어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전반기작품 속 여성들과 그 한계

이런 전반적 한국 문화의 문맥을 바탕에 두었을 때, 놀랍게도 이영도의 작품들 속에서 그런 식의 대상화로 얄팍하게 ‘소비’되는 여성 인물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수도 없는 주체적 여성 인물들이 작품들 속에 가득합니다. 1998년 (책으로) 세상에 선보인 첫 작품 『드래곤 라자』에서부터 이미 그렇습니다. 작품의 여러 설익은 면모들에도 불구하고, 주요 여성인물들은 남성인물들과 동등한 주체적 인물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엘프 이루릴은 이후 양판소들에서 소비된 대다수의 엘프 여성 캐릭터들(아마 한국 남성들의 백인 여성에 대한 성적 판타지와 조응하지 않을까 싶은)과는 달리 성적 대상화의 시선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인 소년 후치 네드발이 작중의 기나긴 모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이종족인 이루릴을 통해 인간인 자신을 비추어 보며, 인간으로서의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스승 내지는 길라잡이에 가까운 인물로 그려지고 있죠. 주인공 ‘파티’의 동료였던 네리아 역시 도적이라는 미천한 신분과 과거의 어두웠던 행적들에도 불구하고, 모험의 과정 속에서 한 (여성) 인물로서의 특색과 주체성을 모두 드러내는 주체적 인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네리아와 운차이 발탄의 로맨스 과정도 남성 위주의 대상화적 로맨스로 묘사되지 않습니다(오히려 적극적인 주체는 네리아죠!). 이 커플의 연애(?) 속에서 희화화되는 자이펀의 극단적인 남성 위주의 사회상에 대한 조소는 물론입니다.

나아가 『드라』의 후속작인 『퓨처 워커』(1999)에서는 아예 작품의 주인공이 미래를 보는 ‘퓨처 워커’, 미 V. 그라시엘과 그녀의 동생 파 L. 그라시엘 자매입니다. (안타깝게도 『퓨워』의 경우 작품을 재독한지가 워낙 오래 되었기에 두 자매가 보여준 세세한 면모들을 지금 곧바로 복기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또한 『드라』 세계관에 속한 <어느 실험실의 풍경> 시리즈의 세 단편 중 하나인 「키메라」는 남성성의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재기발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작품입니다. 이 <실험실> 시리즈의 주요 인물인 영특한 헐스루인 공주 캐릭터는 아마도 이후 『폴라리스 랩소디』(2000)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율리아나 카밀카르 공주의 캐릭터와 조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보다 일반적이고 (남성중심적이고) 전통적인 판타지 장르의 작품에서의 수동적인 ‘공주’ 캐릭터의 전형성에서 탈피한 이영도 나름의 클리셰 비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영도의 ‘공주’ 캐릭터들은 일종의 ‘트로피’로 간주되지도 않고, 남성 주역들에 비해 전혀 뒤쳐지지 않을뿐더러 대개는 오히려 그 대다수의 남성 인물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지성적 면모들을 보여줍니다. 비교적 근래 작품인 「에소릴의 드래곤」(2010)에서도 나리메 공주의 걸출한 입담을 통해 드러나듯 ‘공주’ 캐릭터의 클리셰 비틀기는 이영도만의 ‘공주’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지요. 다시 『폴라리스 랩소디』로 돌아가보자면, 근세기의 해적들과 그들이 펼치는 무용담과 전쟁에 중점이 놓여 있기에 앞선 장편들에 비해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숫자가 많은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적은 여성 인물들의 면면 ─율리아나 공주, 마법사 세실리아, 플로라와 벨로린─ 을 살펴본다면 이 여성 인물들 누구도 다른 인물들의 완성도와 매력에 뒤처지지 않으며, 오히려 웬만한 남성 인물들의 그것보다도 월등히 빼어난 인물로서 섬세하게 조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의 여성 인물들이 과연 “얼마나 온전한 여성 인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점이 등장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는 그 유명한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이라는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정적 대상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앞선 이영도의 ‘공주’ 캐릭터들이 보여준 지적인 우월성은, 어쩌면 여성을 ‘창녀’로 삼지 않았을 뿐이지 ‘성녀’로 바라보는 단편적인 대상화적 시선에 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즉, 그저 캐릭터의 성별만 여성으로 설정되었을 뿐이지, 온전한 여성-인물로서의 면모들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일종의 관념적 상(想)으로서 과도하게 이상화된 여성으로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제 생각에 이영도의 ‘전반기’ 작품들(『드라』에서 『폴랩』)까지는 이러한 ‘관념적 여성’, 다시 말해 폭력적인 성적 대상화와 같은 부정적 방향으로 착취되거나 소비되지 않았을 뿐이지, 여성-인물로서의 현실성이 결여된 것은 물론, 심지어는 과도하게 이상적인 대상으로만 그려진 여성 인물들이었다는 비판이 가능한 지점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 말해 여성으로서의 입체성과 깊이, 다면성을 온전하게 갖춘 여성 인물들이었다기보다는 과도한 이상화와 대상화의 ‘대상’일 뿐이지 않았나─ 라는 혐의인 것이지요.

 

4. <> 시리즈의 젠더 실험과 진일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영도 작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했으며, 유명한 대표작인 『드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영도의 팬들은 『드라』를 그의 가장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꼽지는 않습니다. 2002년 선보인 『눈물을 마시는 새』로 탄생한<새>의 세계관, 그리고 『눈마새』는 이전까지의 한국 판타지 장르의 작품들은 물론, 그 이후로도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독창성과 한국적 면모를 온전히 갖춘 한국 판타지 장르의 걸작 중의 걸작이자, 작가의 가장 완성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그는 페미니즘과 젠더 측면에서도 진일보한, 혹은 진일보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마새』의 세계에서는 근래 유명해진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 성별 반전의 사회상이 작품 속 주된 설정 중 하나로 두드러집니다(물론 이러한 성별반전 사회의 설정은 장르문학에서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통적이기까지 한 장르적 요소이겠습니다만). 작중 등장하는 네 이종족인 인간, 도깨비, 레콘, 그리고 나가들은 저마다 다른 사회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나가들의 사회는 남녀의 성별이 반전된 강력한 가모장(家母長) 사회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모장의 사회 구조는 『눈마새』의 광대한 세계와 그 서사 속에서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작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나가 여성 사모 페이와 그의 남동생 륜 페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절묘하게 녹아있습니다. 특히나 나가들의 가모장 사회는 남녀의 성별을 기계적으로 뒤바꾼 것이 아니라, 나가 사회 전반의 거시적인 면에서 미시적인 면에까지 가모장의 권력 구조가 만들어 내는 억압과 그 폭력성을 훌륭한 문학적 상상을 통해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폭력의 구조가 가모장제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도 여실하리라는 것과, 이것이 시사하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함의하고 있는 건 물론입니다. 나아가 나가들의 출산과 ‘비늘 벗기’의 과정이 함의하는 월경에 대한 은유 또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비늘 벗기와 출산의 과정은 작품 초반에서 나타나는 륜 페이의 일화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가 인물들의 이야기에서도 거듭해서 드러나며, 나아가 서사적 지점과 소설적 구성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로 작품 속에 완벽하게 녹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모장의 사회 구조와 세부적인 설정들의 결합을 통해 나가 인물들이 남성과 여성의 역전에만 그치게 묘사된 것이 아니라,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묘한 중성적 함의 또한 전달하게 된 것은 물론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나가 인물들은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누구도 앞선 대상화의 혐의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보다 입체적인 동기와 면모를 갖춘 보다 깊이 있는 인물로 빚어져 있습니다. (언뜻 사모 페이가 앞선 ‘공주’ 캐릭터의 연장선이나 맥락에 속하는 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모에게는 역시 그 계보에 넣을 수 없는 중대한 차이와 특별성이 있으니까요. 륜 페이는 물론이구요.) 물론 나가 외 종족들의 여성 인물들이 그다지 두드러지지는 못했단 점은 여전히, 그리고 『눈마새』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아쉬운 지점으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눈마새』의 이러한 (일종의) 페미니즘적 혹은 젠더적 ‘실험’과 시도는 후속작 『피를 마시는 새』(2004)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채로운 여성 인물들의 존재로서 결실을 맺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원고지 1만 6,000장 분량에 달하는 8권의 대하소설인 『피마새』에는 실로 수많은 인물들과 서사가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품 속에는 분명히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는 중심인물들이 있으며, 우리는 정우 규리하와 아실이라는 대표적 여성 주인공들이 이야기의 전개에 크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정우 규리하와 규리하)와 목표(아실의 숙원)를 가지고 이야기를 헤쳐 나가는 주체적 여성 인물입니다. 정우 규리하가 지나가듯 이야기한 자신의 월경 경험은 앞선 예시로 든 김훈의 얄팍한 서술에는 비할 수 없이 작품 속에 잘 녹아들어 있는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로 드러나고 있으며, 아실의 분노 어린 토로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녀의 여성성과 그에 대한 일종의 자기인식은 물론입니다. 비록 앞선 ‘공주’ 캐릭터들의 양상에 이 두 여성들의 빼어남이 겹쳐 보일 수는 있어도, 이야기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난관과 서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경험들을 구체적으로 겪어 가면서 온전한 여성-인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발전이 분명 두드러집니다. 게다가 이제는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작중 최고의 군인이자 지휘관 중 하나인 니어엘 헨로 수교위를 비롯하여, 니어엘의 동생인 부냐 헨로의 수난과 방황, 발케네 공 락토 빌파의 딸 헤어릿 에렉스의 역경, 지키멜 퍼스의 도전, 발케네의 하녀 소리 로베자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 인물들이 자신만의 서사 속에서 온전한 여성-인물로서 저마다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여성 인물들을 비롯한 작중 인물들의 하늘 위에 만인지상(萬人之上)으로 자리 잡고 있던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인 나가 여성…… 치천제(治天帝)는 물론이지요.

또한 일종의 젠더-사회 구조의 실험은 『눈마새』에서 나가들의 가모장제 사회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피마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레콘들의 사회상은 나가들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일부다처제의 사회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걸 여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레콘들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인간 사회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나아가 일부다처제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나 환상을 무너뜨리기까지 한다고 할 수도 있겠죠. 이러한 레콘들의 사회 구조가 작품의 중심 서사에 다시금 큰 역할을 하는 핵심으로서 녹아들어 있는 건 물론입니다. 이처럼 『피마새』는 ‘전반기’의 작품들에서 드러났던 페미니즘적 한계를 극복하고, 그 의의와 가치는 더욱 더 강화시키고 발전시켜 작품에 녹여 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맺으며

지금까지 저는 1998년(연재 당시 1997년)의 『드라』에서부터 시작하여 2004년의 『피마새』에 이르는 6년의 문학적 여정 속에서 작가 이영도의 여성 인물들이 어떤 특질과 한계, 그리고 그 극복을 보였는지를 짚어보았습니다. 먼저 그의 ‘전반기’ 작품들을 되짚어 보며 남성 인물들과 다를 것 없는 주체적 여성 인물로서의 가치와 과도한 이상화를 통한 대상화의 여지라는, 긍정적인 부분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유추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새> 시리즈를 통해 그의 상상력이 젠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상상과 고려의 지평을 어떻게 넓혀 갔으며, 그의 작품 세계 속에서 마침내 보다 온전한 여성 인물들을 빚어낼 수 있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해보았을 때, 『피마새』의 마지막 장을 덮은 분들에게 한번 건네고 싶은 질문은, “과연 한국 남성 작가들의 장편 중에서 이 『피마새』보다 여성 인물들의 주체성과 온전함이 드러나는 작품이 존재할까요?” 라는 것입니다. 즉, 제가 지금까지 이 글을 통해 얘기해보고 싶었던 것은 이영도 작가가 여성 작가들보다도 페미니즘적 가치나 감수성에 부합하는 훌륭한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였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 문화와 그 문화적 산물들 속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만연한 성차별적 혐의와 폭력성에 대한 비판에서는 조금이나마 거리가 멀었습니다. 90년대 후반의 첫 작품에서부터 말입니다. 이는 한국 문화 속의 (남성) 창작자들이 갖추거나, 최소한 고민은 해보아야 할 젠더 문제, 그리고 응당 갖추어져 있어야 마땅할 기본적인 젠더 인식에 대한 기준점, 내지는 마지노선으로서의 가치를 살펴보는 데에 적합하지 않을까, 라는 의견인 것 같습니다. 작가 이영도는 주체적 인물로서의 여성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그려보고자 하였고, 일정한 한계도 내어보였으며,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작가적 탐구의 과정 또한 계속해서 펼쳐보였던 작가인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던 주류 문단의 수많은 작품과 작가들이 ‘한남 문학’ 또는 ‘알탕 문학’의 악순환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어가던 반대편에서 말입니다.

다만 이러한 그의 성취를 이후 한국 판타지 장르 전체의 성취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 장르팬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의 문학적 고향 내지는 근원이랄 수 있을 PC통신-하이텔 그룹의 문화는 물론, 그 그룹과 작가 이영도에게 이래저래 큰 영향을 끼쳤을 외국 SF의 영향을 가늠해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른바 1세대 판타지의 탄생과 흥망성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혹은 끊기게 된 것인지, 또는 최근의 한국 SF 팬덤으로 계승되었을지도 모르는 명맥과 작가들, 그리고 가능성 등을 생각해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영도 작가의 이런 페미니즘적-문학적 여정(?)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오래전 여성 작가들과 고딕(gothic) 장르의 소설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처럼 장르문학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움의 일면이 큰 영향을 끼친 덕분은 아니었을까 하네요.

여하튼, 사실은 마지막으로 이영도 작가의 장편을 읽은 지도 어느새 2,3년은 된 것 같아서 (물론 그전에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지금 이걸 이렇게 쓸 수 있을까요, 저도 좀 신기하네요.) 지금 다시 읽는다면 지금까지의 생각을 어떻게 뒤바꾸게 될지, 혹시 완전히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을 건지 조금 두렵습니다. 이영도 작가의 독자님이시라면 그 누구든 이 졸문의 비판점에 언제든 고견을 나누어주시길 바라며, 그리고 이러한 이영도 소설의 페미니즘적 가치(?)에 대해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떤지 정말 궁금해서 이렇게 적어보았습니다. 여기까지 못난 글을 어찌저찌 두드려볼 수 있는 작은 응원의 힘(?) 내지는 비슷한 생각-목소리를 짧게나마 전해준 페미위키의 이영도 항목 – “4.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본 비평”을 썼을 이영도 독자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번쯤 더 손보고 올려보고 싶은데, 신작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고 할 일도 많아서 더 붙잡고 있기가 힘드네요. 흑흑. 여기까지 줄입니다.

 

덧. 단편 「봄이 왔다」를 언급할 타이밍을 찾지 못해서 아쉬운데, 가벼운 서술 트릭에 가깝지만 가볍게 읽어볼 수 있으니 아직 안 읽어보신 분들이 있다면 검색해서 읽어보시길!

 

덧덧. 원래는 듀나게시판에만 올려보려던 글을 브릿g에도 써볼까, 라는 마음가짐으로 썼더니 너무 길어져버린 데다가, 짧고 간명하게 써보려던 애시당초의 목표는 저 멀리 가버렸군요. 더욱이 일단 애초의 목표는 공개게시판에 올리는 글이었기 때문에 이곳 리뷰-비평의 성격에 걸맞은 문체일지도 걱정이 됩니다. 혹시나 못난 글 고역스럽게 다 읽으신 분들에게 다시 한번 죄송하단 말을 덧붙입니다.

 

덧덧덧. 오버 더 호라이즌 카테고리에 넣을 글이 아닌데 마땅한 카테고리가 여기 밖에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덧덧덧덧. 글의 첫 제목이었던 “이영도 소설의 페미니즘적 가치와 한계, 탐구?”를 브릿지와 듀게의 유저분들께서 내어주신 의견에 따라 보다 글의 주제와 알맞은 성격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수정(“이영도 소설의 젠더 감수성과 여성 인물들의 주체성에 대하여”)하였습니다. (2018.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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