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손.
소유자의 소원을 원치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주는 요물입니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가 자각하지 못했던 욕망의 어두운 측면들이 드러나는 재미가 쏠쏠해서 정말 좋아하는 소재입니다.
덕분에 이 소설도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느낀 바를 최대한 표현하고 싶어져서 리뷰를 씁니다. 때문에 제 자의적인 해석이 너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가 불쾌할 정도로 오해하고 있거나 내용과 합치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요청에 따라 정정하거나 지우겠습니다.
먼저 이 소설에서는 민주가 서린의 원숭이 손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영원을 원한다는 서린에게 민주는 서린이 원하는 영원을 얻을 기회를 주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린이 원하는 영원이란 것이 무엇이고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알게 되고요.
사실 서린이 품은 욕망은 소설 초반부부터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우수한 재능에 힘입어 대단한 아이들이 모이는 학교에 들어온 서린, 이곳에 오면 자신도 저런 아이들처럼 대단해질 수 있을 줄 알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서린은 높은 사회적 명성이나 지위를 원하거나, 그를 가진 이들처럼 되고싶어 하고 있습니다. 얼마지나지 않아 불가능함을 깨닫고 분해하지만요.
그러자 서린은 자신이 잘하는 학문의 세계를 파고드는데, 그 이유로 물리학에서는 영원한 것이 있다는 이유를 댑니다. 많은 이들이 열심히 노력해 배우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관념적인 것-이게 적절한 말인지는 모르겠네요…-에 매혹된 것이죠. 이건 정말 제 해석일 뿐이지만 서린은 자신이 사회적 지위나 부, 사교술 등에서 부족하다는 걸 자각하자 이번에는 지성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것을 원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처음의 욕망을 이루지 못했으니 버전만 바꾸어서 이룰 수 있을 법한 곳으로 이동해 다시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죠.
사회적으로 숭앙되는 것에서 학문적으로 숭앙되는 것으로 욕망의 추가 이동한 것입니다. 실제로 서린은 자신이 미래에 이룰 학문적 성과의 가치를 따지면서 이름을 남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있습니다. 이게 나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가치평가가 서린에게는 중요한 요소이자 원동력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민주가 서린에게 손을 내밀죠. 학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혁신을 실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기반된 아이디어를 낸 서린도 어마어마한 천재일 것은 틀림없습니다.
여하튼 서린은 민주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전우주에 남겨줄 블랙홀 발전기를 제작하기 시작하고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어마어마한 희생이 발생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서린은 민주를 막으려하죠.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서린은 블랙홀 발전기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 민주가 밀어붙이는 쪽입니다. 그런 구도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도 민주는 아랫것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얀데레 악역영애처럼 보이게 됩니다(사실 맞는 것같습니다ㄷ). 그러나 덕분에 서린은 자신의 죄의 책임을 민주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주가 멈추지 않으니 블랙홀 발전기를 막지 못하는 것이라고요. 이 또한 민주가 의도한 듯한 묘사가 있고요.
블랙홀 발전기의 어둠을 알게 된 서린은 도망치고, 반대시위를 벌이고 종국에는 민주를 죽이려합니다. 어떻게보면 자신의 죄를 외면하고,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려하고, 자신의 무고함의 진정성을 보여주려는 행동 또는 죄의 증좌를 없애버리려는 행동입니다.
원숭이 손 이야기에서는 종종 이것이 네가 원한 것 아니냐는 조소어린 질문이 제기되곤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민주가 “나의 꿈”이라고 말하며 죄책감과 책임까지 모두 떠안고 가줍니다.
여기서 서린이 민주를 죽이는데 성공했다면 끝까지 비겁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님께선 정말 예상치 못했던 전개를 보여줍니다. 최소한 저는 너무 놀란 나머지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칼찌 실패 후 청혼이라니…정말 예상치 못했으면서도 작품의 주제의식을 깔끔하게 완성시키는데다 백합적으로도 완벽한 선택…
아무리 발버둥쳐도 죄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안 서린은 민주에게 청혼을 합니다. 블랙홀 발전기를-상징적으로-결혼반지로 내밀면서요. 자신의 죄와 그에 따른 죄악감을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는 죄의식을 어떻게든 없애버리려고 서린은 아등바등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조리 불발로 돌아가고나서야 서린은 새로운 관점을 터득합니다. 자신 또한 죄의 원천이라는 것을. 그러니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자각합니다.
이 부분이 제일 좋았습니다.
환희와 카타르시스와 함께 깨달음, 자유가 찾아오는 기분.
이 시점의 서린은 아주 비참한 기분이겠지만 동시에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서린을 괴롭히는 죄를 통제할 수 있는 건 민주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면서 공은 다시 서린에게로 돌아오게 된 겁니다. 그리고 서린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악명을 감수하고 죄책감까지 짊어지려한 민주와 같은 죄인으로써 함께기로 합니다.
…사실 민주는 블랙홀 발전기로 욕을 먹어도 별 생각이 없지 않을까 싶기는 하지만 서린의 가치관에서는 민주가 자신 때문에 영원히 피해를 본다라고 여겨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입니다.
또 좋았던 부분은 민주가 서린을 압박하는 부분이었는데요, 자기한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행성들에 경제재제를 가해 판결을 뒤집어엎어버리는 모습…요즘 러시아에서 구글페이가 막히는 걸 보니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특히 재미있는 부분이 서린과 민주의 관계네요. 서린이 저렇게 괴로워한들 정작 민주는 사람들의 죽음에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을 것 같다는 거ㅋㅋㅋㅋ민주는 서린이 괴로워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할 뿐일 것 같아서 재미있습니다. 왠지 민주는 자신의 탄생에 대해서 ‘영원이 필요해서 만들어졌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서린을 만나기 전까지는 삶에 대한 집착도 희미할 것 같아요. 필요해서 만들어졌을 뿐인 자신이나 영원은 쓰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와중에 영원을 가질 수도 없으면서, 영원을 욕망하고 우러러보는(?) 서린이 나타나죠. 아마 민주에겐 서린이 자신의 가치를 그 자체로 인정해준 사람이 아닐까요. 어쩌면 에너지 균형이 깨지는 것을 막아 영원한 삶을 지키려한 것도 서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리뷰를 쓰고나니 너무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드네요. 스토리 이야기가 많아서 비평을 고르긴했지만…오타쿠리뷰쓰던 버릇을 못버려서 제멋대로 사소한 부분을 부풀려 과장된 감상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지, 자기 생각에 빠져서 그냥 무례한 헛소리나 하는 건 아닌지…만약 그렇다면 글을 내리던 뭐든 할테니 주저없이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덕분에 좋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