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이뤄낸 전복, [꽃의 전야]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꽃의 전야 (작가: 모로Moreau, 작품정보)
리뷰어: 한정우기, 18년 2월, 조회 159

* 저는 개인적으로 텍스트를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주는 평론을 선호합니다. 그 관점이 텍스트의 내용 전반을 관통할 수도 있고 텍스트의 아주 일부분에만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저렇게도 볼 수 있구나 라고 편하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뮤지컬과 영화로도 제작된 <킹키부츠>란 작품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작품을 보면 ‘롤라’라는 캐릭터가 나옵니다. 골격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누가 봐도 우람한(?) 남성의 몸을 지닌 롤라는 ‘The Sex Is In The Heel’을 외치며 부츠를 신고 화장을 하는 조금은 특이한 캐릭터입니다. (여기서의 ‘특이한’이란, 저와 매우 ‘다름’을 의미합니다. 저는 여자지만, 절대 힐을 신지 않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힐은, 중국의 전족과 다를 바가 없거든요. 발이 너무 불편해요.) 롤라는 [꽃의 전야]의 꽃집 주인처럼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캐릭터지요. 그게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는 이성애자인 저도 가늠할 수 있는 일이구요. 주인공인 L이 꽃집주인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마 이 점 때문일 겁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신이 아니고서야, 모두가 틀렸다고 말하는 걸 다르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특히 주인공처럼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겠죠.

실제로, 제가 대학원을 다닐 때, 대학에 입학한 학부 남학생 중 한 명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제가 학부 학생이었을 때도, 학교에는 동성애자 모임(행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비공식 활동이었습니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말 조용히 활동을 했죠. 화장실 칸 안에 모임 주최자의 연락처가 적힌 아주 작은 사이즈의 종이가 붙어있었는데, 그 종이를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저도 그런 게 있었다는 걸 몰랐을 겁니다. 학부 졸업 후 오랜만에 다시 학교를 가니 ‘춤추는 Q’라는 공식적인(물론 학교가 행정적으로 인정을 해준 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퀴어자치연대가 생겼더군요. 성소수자의 입학을 환영한다는 무지개 빛 현수막이 교내에 걸려 당당하게 펄럭이는 걸 보았던 그 때 그 충격이란! 카타르시스를 느낄 정도였죠. 하지만 아직 세상이 그 정도로 바뀌지는 않았더군요. 내가 알지 못하는 자치연대가 생겨나 교내 언저리에 플래카드를 거는 것 정도는 수용할 수 있지만(수용이라는 말도 참 웃긴 말이죠, 자기가 강자이고 다수라는 걸 전제에 깔고 상대방의 위에 올라서 하는 말이니까요) 내 대학 동기가 게이인 건 받아들일 수가 없었나봅니다. 후배는 왕따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꽃집 주인처럼 린치를 당해 살해당하지 않았다는 점에 안도해야 하는 걸까요?

 

그래서 주인공 L은 자신의 욕망을, 정체성을 부정하기로 결심합니다. 주인공은 ‘장미꽃’을 먹어버립니다. 아무도 알 수 없게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숨겨버리죠. 그 뒤로, 주인공은 ‘장미꽃’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은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는 꽃’을 혐오하니까요. 주인공 또한 세상의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이 욕망하던 ‘꽃’의 아름다움을 공포로 치환시킵니다. 주인공이 ‘장미꽃’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공포(Phobia)는 결국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입니다. 사회에서 수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이었지요. 출근을 하고 동료들과 잡담을 하며 살아가는 그는 ‘사회인’으로서 살아가지만 ‘자신’으로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상처입고 행복해하는 그 모든 일상이,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니 그의 맥박은 희미할 수밖에요.

하지만 그 욕망은 누른다고 눌리는 게 아닙니다. 이성애자인 제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요. 누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저보고 여자를 좋아하라고 세뇌한다고 제가 여자를 좋아하게 될 수는 없으니까요. 억누른 욕망은 더 높이 뛰어오르게 됩니다. 주인공이 그렇게 부정하던 ‘꽃’이, 공포의 ‘꽃’이 비가 되어 내립니다. 세상을 가득 뒤덮어버리죠. 아무리 주인공이 도망쳐도, 결국에는 꽃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꽃의 아름다움을 긍정하게 되지요.

 

세상은 꽃을 ‘낭만’으로 규정 지었습니다. ‘낭만’은 추상적 개념이지 결코 실질적 존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꽃의 전야]의 꽃은 추상적 개념인 ‘낭만’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질식시키고 가로수를 쓰러트리는, 자동차를 떠내려 보내고 근교를 잠식하는 실질적 사물로 다시 태어납니다. [꽃의 전야]를 읽고 개인적으로 가장 감탄한 부분은 바로 ‘꽃’이 이룩한 전복이었습니다. 아마 이 부분이 없었다면, [꽃의 전야]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개인을 다룬 텍스트로만 남았을 겁니다. 반면 ‘꽃’이 이룩한 전복은 텍스트의 층위를 더 다양하게 만들어주었죠.

하수구가 막혀 오물이 넘쳐나고, 공사장의 철골과 동네의 축대들이 무너집니다. 예배당의 벽을 무너뜨리고 전기와 통신을 단절시키기도 합니다. ‘꽃’은 자신을 억눌러왔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전복시키고,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인프라들을 무너뜨립니다. 인간들은 이런 재앙이 닥치고 나서야 ‘꽃’의 무서움을 실감합니다. 이런 재앙은 이제껏 우리가 ‘꽃’에게 가했던 재앙임에도 말이죠. 간통제도 폐지된 사회에서, ‘꽃’들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못합니다. 이성애자들이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는 권리를(심지어는 정부에서 제발 결혼 좀 해달라고 사정을 하는 데도 거부하는 그 권리를), 성소수자들은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당연하게 누려왔던 모든 인프라들은 이성애자를 위한 것이지 성소수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인지는, ‘꽃비’가 세상을 덮어 우리가 의지했던 문명이 붕괴되고 나서야, 실감할 수가 있죠. 이제껏 ‘꽃’은 이런 무너진 세상에서 살아왔습니다. 개인이 직접적으로 행하는 폭력만 폭력인건 아니니까요. 사회 구조 내에서, 사회 제도에서 ‘꽃’을 제외시키고 그들의 목소리를 앗아가는 것도 엄연히 폭력입니다. 어쩌면 더 잔인하고 치사한 폭력이라고도 볼 수 있죠.

 

세상이 바뀐 것은 맞습니다. 음지에만 숨어있던 성소수자들도 이제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이라면 성소수자의 입학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교내에 걸 수 없었을 겁니다.(심지어 실천적 지식인을 추구한다는 학생회조차, 동성애는 일그러진 욕망이 가득 들어찬 미국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었죠) 예전보다는 많이 개방된 사회겠죠. 문제는 그 개방이라는 게 기존의 사회 가치를 흔들지 않는, 즉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라는 거죠. 한정된 발언권이라고나 할까요? 하리수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을 지니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대중의 앞에 나설 수 있었을까요? [꽃의 전야]에서 ‘꽃’이 주요 소재가 된 것도, 사실 여기서 분리해서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꽃’은 모두가 인정하는 아름다운 사물이죠. 그래서 일종의 완충재로써 작용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성애자인 제가 보기에도 [꽃의 전야]는 전혀 거부감이 없었거든요! [꽃의 전야]에서 ‘꽃’은 ‘꽃’이 가진 상징을 기반으로 전복을 이뤄냈지만 그와 동시에 ‘꽃’이 상징하는 범주 내에 갇혀버리게 되었죠.

 

개인적으로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마운틴]이란 영화를 정말 좋아합니다. 마지막 장면이었던 뒤바뀐 ‘셔츠’를 보았을 때, 그때 전 펑펑 울었답니다. 저에게 있어서 [브로크백마운틴]은 남자와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퀴어영화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사랑을 한 사랑 영화였습니다. ‘퀴어’라는 태그가 필요 없는 영화죠. 이 영화는 제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사랑영화로 남을 겁니다. 제가 리안 감독을 숭배하는 이유가 바로 이점 때문이지요. (제가 리안 감독을 어느 정도로 좋아하냐면요. 몇 년 전에 리안 감독과 악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저 그날 하루 종일 손 안 씻었답니다.) 그리고 전 그 가능성을 모로님에게서 보았답니다. 모로님이라면 ‘퀴어’를 ‘퀴어’만은 아닌 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대하겠습니다.

 

 

# [꽃의 전야]를 읽으면서 떠올린 노래가 하나 있는데요. 대만의 이효리라고 하는 채의림이 발표한 노래랍니다. 채의림의 노래는 정말, 레알, 순도 100%의 대중음악이랍니다. 학자들이 쓰는 대중문화 칼럼에서 반면교재로 언급 된 적이 있을 정도로 대중성과 시장성을 따르는 사람이죠. 근데 그런 채의림이 도대체 갑자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성애에 관한 노래를 발표한 적이 있답니다. 그때 마침 대만 내에서 동성 결혼 합법화를 다룬 법안이 제출되면서 엄청난 이슈로 떠올랐었고(이 법안에서는 동성 결혼이 급진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형태의 가족도 제도 안에 편입시키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문소리와 고두심 그리고 정유미를 구성원으로 했던 가족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쉽게 말해 혼인과 입양이 아닌 다른 형태로 구성된 가족도 제도권 안으로 들여오는 법이었습니다. 동성 결혼은 실질적으로 합법화가 되었지만, 이 부분이.. 너무 급진적이다 보니 이때 제안했던 법안 자체는 아직도 의회에서 계류 중인 걸로 알고 있어요ㅠ) 이 노래도 큰 호응을 얻었었죠.

저는 사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오열했답니다. 수십 년 동안 같이 산 여자 커플이 있는데, 한 명이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거든요.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사인을 받아야하는데, 반려자인 여자는 (합법적인) 가족이 아니라 사인을 하지 못하죠. 비슷한 메시지를 던지는 페미니즘 영화도 하나 있었는데, 제목이 기억 안 나네요 ㅠ 사랑하던 반려자가 죽자 집이 죽은 반려자의 친척인 조카에게 넘어가서 거리로 내몰린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거였어요. 조카가 혹시나 둘의 관계를 눈치 채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했었죠. 일단 시기적으로 이 영화가 훨씬 더 이전 영화이고, 워낙 유명했기에, 뮤직비디오가 영화를 오마쥬한 것 같아요. 가사에도 “유산”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너무 현실적이라서 슬펐죠. 결국 조카가 와서 사인을 해주고 쓰러진 여자는 수술을 받죠. 수술은 받았지만, 여자는 숨을 거둡니다. 죽은 여자의 손을 잡으며 살아남은 여자는 둘이 결혼하는 걸 상상하구요. 맨 마지막 장면에서 간호사가 죽은 환자와 관계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하는데, 그때 할머니가 대답하죠. 자기 부인이라고. (이거 뮤비 링크는 제가 자유게시판에 올릴게요!)

아래는 그 노래의 가사입니다. 아리까리 한 건 대만인 교수님한테 여쭤 보긴 했는데, 기본적으로는 제가 이해한 바대로 의역했기에, 원래의 의미와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不一樣也一樣(We’re All Different, Yet The Same)

 

女方女方愛對方 不簡單也很平凡

여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는 건 쉽지는 않아도 매우 평범한 셈이야.

在同一張床 讓人生變不平凡

같은 침대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인생 전체를 평범하지 않게 만들었어.

是什麼樣 就怎麼辦 非一般又怎麼樣

그게 어떤 모습인데, 그럼 어쩌면 좋아. 평범하지 않은 게 또 뭐가 어때서.

還不是照樣 尋找最愛是誰的答案

그래봤자 그대로인거지. 가장 사랑하는 걸 찾겠어. 이건 누구의 답이겠어.

庸俗地海枯石爛 世俗又憑什麼為難

변치 않을 사랑의 맹세도 속된 말이 되어버렸지. 그게 속되다 할지라도, 도대체 뭘 근거로 난처하게 만드는 거야.

不一樣 都一樣 有各樣的患難

다른 건 다 같은 거야. 각자의 어려움이 있는 거지.

不一樣 也一樣 有分合有聚散

다른 것도 같은 거야. 만남도 있고 헤어짐도 있지.

各有各一生一世 各有各的溫柔鄉

각자 자신만의 삶이 있는 거고, 각자 자신만의 따뜻한 안식처가 있는 거야.

愛不是抽象的信仰 有血有汗

사랑은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야. 피도 있고 살도 있지.

另一半變成老伴 留下非一般的遺產

반쪽은 임자가 되고, 일반적이지 않은 유산을 남겨주지.

愛一個人 看究竟需要多勇敢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얼마나 용기를 가져야 하는 지를 보라고

另一種愛情的結晶 就是更單純的浪漫~

또 다른 사랑의 결정체, 더 단순한 낭만이야.

不一樣 都一樣 有各樣的患難

다른 건 다 같은 거야. 각자의 어려움이 있는 거지.

不一樣 也一樣 有分合有聚散

다른 것도 같은 거야. 만남도 있고 헤어짐도 있지.

各有各一生一世 各有各的溫柔鄉

각자 자신만의 삶이 있는 거고, 각자 자신만의 따뜻한 안식처가 있는 거야.

愛不是抽象的信仰 有血有汗

사랑은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야. 피도 있고 살도 있지.

另一半變成老伴 留下非一般的遺產

반쪽은 임자가 되고, 일반적이지 않은 유산을 남겨주지.

愛一個人 看究竟需要多勇敢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얼마나 용기를 가져야 하는 지를 보라고

另一種愛情的結晶 就是更單純的浪漫~

또 다른 사랑의 결정체, 더 단순하고 낭만적이지.

誰比誰美滿 由誰來衡量

누가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지, 그걸 누가 측량하지.

不用誰原諒 就讓感動萬世留芳

누가 용서할 필요도 없어. 그 감동을 오랫동안 남기는 거야.

不一樣 都一樣

다른 건 다 같은 거야.

信望愛 都一樣

신념과 희망 그리고 사랑, 다 같아.

不一樣 都一樣 從缺憾 找圓滿

다른 건 다 같은 거야. 결핍에서 충족을 찾지.

不一樣 也一樣 會快樂 會悲傷

다른 것도 같은 거야. 기뻐할 수도 있고 슬퍼할 수도 있지.

各有各一生一世 各有各的溫柔鄉

각자 자신만의 삶이 있는 거고, 각자 자신만의 따뜻한 안식처가 있는 거야.

神不神聖 愛這種信仰 誰說了算

신성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랑이라는 신앙을, 도대체 누가 결정지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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