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머리 까만 눈의 사람들의 목마다 걸려있는 넥타이
어느 틈에 우리를 둘러싼 우리에게서 오지 않는 것들
우리는 어떤 의미를 입고 먹고 마시는가
—故 신해철, ‘재즈 카페’ (1991)中
개인적으로 신해철의 노래 중 ‘재즈 카페’를 좋아한다. 신해철의 대표곡 ‘재즈 카페’가 발표된 때가 1991년이니 벌써 세상에 나온 지 27년이 된 셈이다. 이 노래를 통해 나는 개인의 ‘고독’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우리는 그렇게 콜라와 위스키와 피자를 먹고 마시는 것처럼. 그럼 27년이 지난 2018년인 오늘, 이 고독은 사라졌을까? 장아미 작가 역시 PC통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개인의 고독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다. 분량도 길지 않고, 인물과계도가 복잡한 것도 아니며 PC통신이라는 구시대적 통신 방법을 알아야 작품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참고로 나 역시 PC통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PC통신을 통해 알게 된 ‘당신’이라는 인물이 나에게 “라면 사줄게요.” 라는 말을 툭 던지고 나는 라면을 언제든지 사 주겠다는 당신의 말을 들은 채 수많은 날을 기다리다 결국은 만나지 못한다는 조금은 쓸쓸한 이야기. 얼굴도 모르고 그저 사이버 상으로 만난 사람에게 라면 먹기를 기대하는 ‘내’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터. 그러나 ‘당신이 숨진 것이 나와의 만남이 계획돼 있던 바로 그 날인지, 아니면 그 다음날, 혹은 이틀 뒤였는지. (중략) 그래도 나는 때때로 궁금해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강조는 인용자)’ 라는 대목을 통해 당신의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된 나의 어리둥절한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 안타까움은 앞에서 말한 주인공의 순진함 때문이며 이 순진함이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숙함이 아니라 꾸밈없이 순박한 순수함일 것이다. 더 나아가 PC통신으로 대표되는 90년대에 주인공이 느낀 고독감은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대표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더 심화되고 있다. 작가는 PC통신을 쓰던 시대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때와 지금의 고독은 연속선 위에 있다’는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고독을 끝낼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 있고, 당신은 그 너머에 있는데 (강조는 인용자) 당신이 있는 그 너머에는 고독이 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섣불리 정답을 내릴 수 없으며 정답을 내리는 것조차 의미있는 행동도 아닐 것이다. 다만, 작가의 코멘트처럼 고독을 느끼되 누군가의 기억 속에 가끔씩 생각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