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없는, 그래서 담백한 여우 이야기 공모 브릿G추천

대상작품: 기나긴 꿈의 저편 (작가: Xx, 작품정보)
리뷰어: Ello, 18년 1월, 조회 106

0.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덮힌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 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1.

여우 특히 구미호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겨나게 된걸까요. 저는 발생의 원인에서는 우렁각시나 선녀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해왔습니다. 우렁각시나 선녀 모두 ‘혼자’ 살고 있는 혼기가 지난 나무꾼과 결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혼기가 지나지 않았다거나 꼭 나무꾼이 아니라도 혼자 살고 있는 남성에게 짝을 지어주기 위해 만들어 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재가가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에 과부의 수가 늘자 성행한 도깨비 이야기처럼요.

물론 이 이야기에는 제대로 된 논거는 없습니다. 그저 제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죠. 하지만 그럴싸하지 않나요?

혼자 된 남성과 결합하는 민담에서 뿐만 아니라 강감찬의 이야기에서는 신적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특별한 인물의 비정상적이고 신성한 출생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쓰이죠. 그렇게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존재, 비범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이한 존재에서 언제부터 간을 빼먹고 인간의 정기를 취하는 부정적인 존재가 된 걸까요.

아마 유교관념이 자리를 잡은 이후부터겠죠. 여우는 여성형의 요괴니까요.

 

2.

부정적인 이미지의 구미호라고 하면 <전설의 고향>이 먼저 떠오릅니다.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채로 간을 빼먹느라 피범벅이 된 하얗고 무서운 모습으로요.

이 소설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건 사람과 비슷한 크기였으나 한 눈에 보기에도 인간이 아니었다. 구부정하게 등이 굽은 상태에서 네 발로 달리던 그것의 입가에는 벌건 피가 묻어 있었다. 뾰족한 귀 사이로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이 갈기처럼 휘날렸다. 마치 짐승 분장을 한 여자가 엎드려 달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불쾌감과 공포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여우는 후대에 만들어진 여우의 요소를 따르고 있습니다. 또한 남성의 간을 빼먹는 다는 점에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고요. 하지만 그 정도의 차용만으로는 한계라 규정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저는 특히 색으로 남성을 홀리기 보다 며칠 동안 염탐을 하다 기회를 노려 덮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네요.

 

3.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던 구미호는 한이 많은 요괴입니다.

1. 사람이 되고 싶어 2. 남성을 홀리고 3. 마지막 남성을 믿었다가 4 결국 배신을 당하고 5. 인간이 되지 못한 비극적인 존재죠.

이 소설에서 선대에서 후대로 내려오며 여우(구미호)가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차용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아쉽기는 하지만 이는 이미 많은 미디어에서 차차 굳혀온 것으로 이 소설에게서만 느끼는 아쉬움은 아닙니다.

<천년여우 여우비>처럼 외계인과 함께 살고 있는 구미호가 아니라면 현실에서는 어려울거라고 생각해요. 뒤에 다룰 내용이지만 <여우아내> 설화처럼 여기에도 믿음으로 굳건한 관계가 있으니까요.

이 작품이 설화의 비틀기를 시도했다는 건 작품을 끝까지 읽은 분이라면 위에 적은 1번에서부터 이뤄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겁니다.

일단 수현이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인간이 되기 위해 간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도록 저주가 걸렸을 뿐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되겠다는 목표의식이 없기 때문에 2~5번까지의 항목도 힘을 잃고 말죠.

남성을 홀릴 필요가 없어요. 그저 다시 태어나기 위해 간을 먹어야 할 뿐이에요. 그렇지만 작품 내에서는 왜 남성만 노렸는가에 대한 답이 필요할 것 같아요. 수현이의 성별을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 였을까요? 여우가 여자라는 제목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일까요?

게다가 남성을 홀릴 필요가 없으니 남성을 믿을 일도 없고, 따라서 배신을 당할 일도 없어요. 더해서 여성과 사랑을 나누어도 됩니다. 남자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화와는 아주 딴판인 주인공이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요괴(현실과는 다른 비일상의 존재)들은 모두 인간이 되고 싶어하죠. 인간이 만든 이야기라 그렇습니다. 심지어 외계인들도 자꾸 지구를 침공하려고 하잖아요.

 

하지만 인간이 되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 자체가 저주라면 어떨까요.

저는 수현이가 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요. 인간이 되는 것을 딱히 원하지 않았지만 본능에 따라 행동한 죄로 벌을 받은 것 뿐이죠. 그렇다면 이 지겨운 윤회를 거듭하면서 “잊었다- 깨달았다”의 고리를 넘어 ‘나는 무엇인가,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한 성찰이 조금 더 있기를 바랐어요.

 

4.

아. 어쩌면 은주에 대한 사랑을 되새긴 것도 성찰의 한 과정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은주의 역할은 사랑하는 이의 본연의 모습을 일깨우고 잠들어버리는 설화 속 여우(여우아내의 남편)의 모습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말아요. 요괴 이야기를 통해 얻고자 했던 ‘일탈’의 욕구를 은주를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네요.

수현에게도 욕망이 적어서 작품을 다 읽고나면 원색보다는 파스텔 톤이 뜨겁거나 시원하기보다는 미적지근함이 남아요.

윤회를 거듭하며 본연에 모습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괴담이 유행한다는 윤선생의 말에 솔깃했습니다만 그래서 그 욕구가 다만 다시 살기 위한 영양보충이라는 건 아무래도 조금 아쉽네요.

하지만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없었던 대전제에서부터 예정되어있던 전개였으므로 이쯤에서 아쉬움은 접도록 하겠습니다.

잘 봤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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