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한 리뷰입니다.
부자들이 요새처럼 모여사는 부촌이 좀비의 공격을 받는다. 부잣집에서 공주님처럼 오냐오냐 부족함 없이 자란 주인공 혜성은 가족을 잃고 좀비에 감염되지만, ‘좀비잡는 경찰 특공대원’인 뱀파이어가 피를 준 덕분에 ‘좀비이자 뱀파이어’가 되어 경찰에 지원한다.
뱀파이어는 원래 천대받고 있었으나 뱀파이어만의 강한 신체능력으로 좀비를 죽일 수 있기에 인간들은 뱀파이어와 공생하기로 한다. 혜성과 은수(재벌집 딸이자 경찰 특공대장)은 재벌 산하 연구소에서 좀비를 일부러 풀어놓았음을 알게 된다. (좀비 발생 과정과 뱀파이어-좀비의 생물학적 특징 같은 게 복잡하게 나와 있는데 단순하게 경영권 상속이라든지 하는 재벌물 클리셰가 좀비, 뱀파이어의 원인이다, 로 읽어도 된다.)
무척 매력적이고 복잡하고 세밀한 설정이다. 완성된 작가의 테크닉(필력)덕분에 설정들은 충돌하지 않고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며 덜컹대는 부분 없이 매끄럽게 결말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달린다. 그렇지만 나는 천의무봉에서 굳이 색실로 스티치한 장식을 찾고 싶어하는 독자라서 이 설정들 위주로 리뷰를 작성할 것이다.
인간–뱀파이어–좀비
재벌–부자들–인간
이 작품 속 사회는 촘촘하고 정교한 위계(계급)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가 복잡하게 짜여 있다. 인간이 가장 위, 위치추척장치를 몸에 심은 채 좀비를 잡는 뱀파이어는 어떤 인간에게는 아이돌처럼 덕질의 대상이자 좀비 퇴치라는 위험한 일을 하기 위해 인간과 공생하기도 하고 어떤 인간에게는 같은 공간에 있기도 싫은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좀비는 (대사도 없다) 벌레처럼 나오면 죽여야 하는 가장 하층 계급이지만 좀비가 없으면 뱀파이어도 인간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고 어떤 재벌에게는 꼭 필요하기에, 어찌 보면 인간과 뱀파이어와 기묘한 ‘공생’ 관계이기도 하다. 인간도 재벌과 부자들과 평범한 서민으로 상하가 있다.
주인공 혜성은 인간이었고, 뱀파이어이자 좀비로 설정되어 있다.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다. 경계에 걸칠 수도 있고 교집합에 속할 수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부잣집 딸에서 튕겨져 나간 혜성이 선택한 정체성은 ‘좀비 잡는 뱀파이어 경찰’이고, 잃어버린 가족 대신 경찰 대원(+뱀파이어)에게서 동료애를 찾고 싶어한다. 혜성이 선택한 정체성은 확고한데, 그러면 ‘좀비이자 뱀파이어’,’과거에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인외’,’과거에 부유층이었으나 지금은 약자’라는 복합적인 설정을 한 이유가 약해진다. 어느 날은 좀비, 어느 날은 뱀파이어이거나 좀비와 뱀파이어의 특성을 모두 갖거나(작중에는 좀비+뱀파이어의 특성을 모두 가져서 해를 봐도 말짱한 뱀파이어라고 나옴)한다면 ‘좀비를 죽이는 뱀파이어지만 사실 나의 일부분은 좀비’라는 소수자성, 교차성이 강해질 수도 있다. (현실에도 소수자가 자기 증명을 위해 극우가 되는 사례가 있듯이 정체성을 인정받는다는 건 복잡하다.)
혜성의 주변 인물들 입장에서도 ‘반좀반뱀’을 좀비로 봐야 하나 뱀파이어로 봐야 하나 고민스러울 수도 있고, 좀비를 진압할 때 과연 ‘반좀반뱀’을 동료로서 신뢰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수도 있는데, 혜성의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이 ‘쉽게’ 해결되어 넘어간다. (혜성이 뱀파이어가 된 후 집값 떨어진다며 혜성을 쫓아내려고 하는 나쁜 부자 인간들과 혜성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착한 경찰 동료를 대조시키기 위함인 듯 하다.)과거(부자, 인간)-현재(약자, 소수자, 인외)를 대비시키면 혜성에게서 정체성 재정립 과정에서 오는 혼란을 더 부각시킬 수도 있다. (혜성은 ‘핍박’을 느껴도 10대 소녀답게(?) 씩씩하게 넘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수자, 정체성, 계급 등 복잡한 설정을 단순하게 해결하는 대신 속도감 있는 전개를 택했다.
좋은 점이 될 수도 조금 재미없는(?) 부분이 될 수도 있는데, 전반적으로 ‘나이브’하게 해결되는 전개가 있다. 인물의 선악이 뚜렷한 편이어서 마음 푹 놓고 응원할 인물을 응원하면서 따라가면 된다. 혜성이 경찰이 되기 위한 훈련 과정은 미생이나 스포츠 만화 주인공처럼 훈련–돌발상황–해결의 레벨업(파워업)으로 즐기면 된다. 액션 씬도 쾌감이 있다. 재벌이 ‘금지된 실험’을 하는 악당으로 나오는데, 흔한 재벌물 클리셰라서 독자는 속도를 늦출 필요 없이 쭉 읽어나가면 된다.
그런데, 이대로 좋은가? 혜성의 상사인 은수는 좀비 사태에 책임이 있는 재벌가의 딸이자 경찰인데(이 지점에서 은수–혜성이 동류 같다.) 불법 실험을 해댄 오빠를 잡고 사직서를 냈다가 동료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복직한다. 혜성처럼 좀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재벌에 소송을 걸지 않을까? 은수는 결백한가? 만약 현실에서 재벌이 독극물을 살포했는데 재벌2세가 환경부에서 오염물질 관리 업무를 하다가 ‘내가 이 일을 저지른 친오빠를 조사해서 구속시켰으니 사직은 하겠지만 나 정말 유능하고 팀웍 좋았어요’한다면 시민의 입장에서는 복직을 시켜주고 싶을까? 좀비가 사라진다면 좀비를 잡기 위해 인정받았던 뱀파이어들은 어떻게 될까? 혜성의 친구가 뱀파이어가 영웅적으로 좀비를 잡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지만 인간은 이국종 의사선생님을 존경해도 자기 동네에 구급차 사이렌 울리는 건 싫어한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과 뱀파이어가 함께 살아야 한다고 계속 힘주어 말하지만, ‘체제에서 일탈하지 않는’ ‘모범적인’ 뱀파이어일 때 그렇다. 좀비는 어떠한가? 인간과 공존 가능한가?
어떤 면에서 이 작품은 보수적이다. (그 점이 이 작품의 재미를 보장한다. 불편한 구석이 없으니 마음 편히 ‘장르소설’을 즐기면 된다.) 선한 이들은 선하고 악한 이들은 악하며 권선징악일 것이다.당신의 세계는 부서지지 않는다. 균열은 봉합되고 단단하고 견고하고 안전할 것이다. 당신이 누구든. 무엇이 되었든. 당신이 굳이 돌진해서 충돌하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