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중에 ‘원형의 폐허’라는 게 있습니다. 어느 날 주인공이 어떤 꿈을 꾸는데 꿈 속의 모든 것이 너무나 현실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꿈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꿈 속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저 실제 세계로 여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원형의 폐허에 갔다가 갑자기 발생한 화재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자신의 몸이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는 데도 몸이 타기는 커녕 뜨거움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주인공은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자신 또한 누군가가 꾼 꿈 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장자의 유명한 고사인 ‘호접지몽’의 또 다른 버전인 것을.
하지만 영화 ‘매트릭스’가 대표하듯이, 장자의 ‘호접지몽’과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는 오늘날 대중 문화 창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었죠. 여기엔 근본적으로 우리가 실제라고 감각하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 하는 의심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먼저 했던 것이죠. 그는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진짜라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악마의 술수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의심의 여과기를 최대한 가동한 끝에 걸러낸 것이 바로 ‘생각하는 나’였는데,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6’에서도 보여주었듯, 이조차 이제는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죠.
이 단편 ‘시야’도 그런 흐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진짜와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면 진짜와 거짓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발달된 기술의 ‘의안’을 통해 묻는 것이죠.
미래가 배경입니다. 그 때는 의안 기술이 초고도로 발달하여 인터넷이나 영화 같은 영상매체는 물론 증강 현실 기술의 도움을 받아 가상 현실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집 안 인테리어를 실제 바꾸지 않고도 의안의 옵션을 터치하는 식으로 바꾸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죠. 진짜 집 안이 전혀 바뀌지 않았더라도 눈으로 보이는 것 모두가 바뀌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인테리어를 한 것만 같은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비록 의안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앞다투어 의안을 이식했습니다. 아이폰X를 공짜로 손에 쥐어준다고 하면 나타나게 될 상황처럼 말입니다.
영화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일부러 아이맥스 영화관을 찾지 않아도 아무 때나 아이맥스 화면으로 영화 보는 것이 가능하니 극장이 망했고, 영화보다 훨씬 더 실감나고 자신을 이야기 속 진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가상 현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아무도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설 속 시간대에선 이미 영화 산업이 몰락한 뒤입니다. 주인공 롱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죠. 그는 원래 영화배우였으니까요. 자신의 눈에도 이식된 의안 때문에 그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그가 오지에 있는 어떤 곳을 찾아옵니다. 그의 의안이 어떤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바로 지금은 헤어진, 과거의 연인 리엔이 보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미련 때문에 그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먼 오지까지 오게 된 것인데 정작 거기서 마주하는 진실은 충격적입니다. 그 여파로 인해 롱은 더욱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저 시야에 나타난 모든 정보들이 혼돈의 더미일 뿐입니다. 마치 리엔을 찾아간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노인이 했던 다음과 같은 말처럼.
사람의 감각이란 건 그렇게 정교하지 않다네. 간단한 눈속임에도 쉽게 속고 말지.
그렇다면 그런 감각을 통해 형성되는 우리 자아는 어떨까요? 그건 과연 환영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 주체라는 게 실은 누군가 꾸는 꿈처럼 망상과도 같은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지는 않을까요?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를만큼 소설은 처음 택시기사와의 대화부터 시작하여 노인을 만나 진실을 확인하는 것을 지나쳐 늑대를 물리치는 액션으로 대부분 채워진 후반까지, 보인다고 해서 무턱대고 진짜라고 여길 수 없는 시야의 불확실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해 나갑니다. 사실 처음엔 택시기사 부분이 산만하다고 여겼는데 다 읽고 보니 그 또한 소설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더군요. 특히 택시기사가 건네주는 구급 상자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전 이 구급상자 때문에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제법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네요. 그 덕분에 보르헤스의 소설이나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나 상상들을 다시금 즐겁게 누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여기저기서 너무나 많은 정보로 마음이 현혹되기 참 쉬운 시대입니다. 눈으로 봤다고 해도 얼른 믿을 수 없는 것도 허다하고 말이죠. 부동산이나 주식을 투자 목적으로 공부했던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알면 알수록 더욱 모르게 된다는 거.
왠지 이 소설 롱의 상황과 다르지 않아 보이네요. 그런 경험이 있으시다면 이 단편을 더욱 재밌게 읽지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