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와 다른 과학자들이 사용한 이른바 ‘사고실험’의 목적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 즉 현재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이다(실제로 슈뢰딩거의 유명한 사고실험은 ‘미래’는 양적 수준에서 예언 ‘될 수 없다 cannot’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과학소설은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하는 것이다.
(…) 소설가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허구와 거짓말이다.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 과학소설은 은유이다. 이 과학소설을 고전적인 허구 형태와 달라 보이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대생활의 골격을 이루는 어떤 거대한 지배체제 – 그 가운데는 과학, 즉 각 분야의 학문과 기술, 그리고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관점 등이 있다 – 로부터 도출된 새로운 은유들을 사용하는 것과 관계있지 않나 생각한다. 우주여행은 이 은유들 중의 하나이다.
– 어슐러 K. 르귄의 [어둠의 왼손(시공사, 1995)] 머리말 중에서
(이 리뷰는 최대한 [어머니들의 아이] 소설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작성할 생각이다.)
바벨 작가의 [어머니들의 아이]는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한 SF 단편이다. 읽으면서 두 작품이 떠올랐는데 하나는 르귄의 헤인 시리즈이고 또 다른 하나는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과 [라마와의 랑데뷰]였다. 아마 그래서 어둠의 왼손 서문이 떠올랐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뭐라고 해야하나, 어떤 고전적인 과학소설의 느낌을 살려낸다. 헤인 시리즈나 클라크 소설이 연상됐다고 말했듯이, 어떤 미지와의 존재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이게 외계인이든 새로운 환경이든 뭐든 우리가 몰랐던 존재 혹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에 대한 그리움,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 낯선 존재와 소통할 수 있을 거란 긍정, 나아가 연대할 수 있을거란 희망을 보여준다. 이 희망의 정서가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내내 애틋하고 눈물이 날 것도 같고 이게 설사 썩은 동앗줄일지라도 믿어보고 싶고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읽는 내내 마음 속에서 이렇게 솟아나는 이 감정들이 확 끓어오르는 것도 아니다. 소설 자체가 가진 리듬에 휩쓸려 뿜어져나오는 감정이 아니라 안에 잔잔하게 고여있는 느낌이랄까. 이게 가능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작가가 구사하는 문장이라고 본다. 문장이 선명하다. 아주 가끔 왜 갑자기 모호해지지? 싶기도 했는데, 또 바로 뒤에 가서 작가가 다시 그 모호함을 풀어버린다. 리듬이 좋은 단편이다. 아주 천천히 소설 속 세계를 만들면서 폭을 넓히는데 그게 지루하지 않고 호흡이 좋다. 다 읽고 나면 작가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소설이다. 작가가 아주 안정감있게 소설 전체를 끌어가고 있다.
한편 성소수자가 연상되지 않을 수가 없도록 쓰여진 소설로 작가가 태그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밝히고 있고. 독자 입장에서 ‘아 어쩌면 웹소설에는 이런 장점이 있겠구나’, 작가가 이야기가 끝났지만 태그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 – 이 부분이 좀 신기했다. 이전까지는 못 느껴본 점이었다.
[어머니들의 아이]는 위에 말한 점 외에도 많은 장점을 가진 소설이다.
또한 아주 아름다우면서 희망이 살아있다. 이 희망은 과학소설이 줄 수 있는 희망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과학소설이란 장르와 과학소설가에게 독자인 내가 기꺼이 계속 품어나갈 수 있는 희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