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에도 여러 번 썼고, 리뷰 의뢰를 거절할 때마다 밝혀왔고, 프로필에도 박아놓았지만, 나는 장편을 잘 못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장르나 소재가 아니면 사실상 읽지 못(않?)하는 사람이다. 대단히 편식이 심하고, 좋아하는 소재나 익숙한 문법이 아니면 집중력이 금방 바닥난다. 거기다 가독성을 엄청 따지고 드는 편이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이 소설은 애초에 내가 손댈 작품이 아니었다. 범죄 스릴러는 내 취향의 장르가 아니고, 57화짜리 장편은 더더욱 아니다. 원칙대로라면 이 리뷰 의뢰는 거절했어야 맞다.
그럼에도 수락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소개글이 간결하면서도 무슨 이야기인지 한눈에 들어왔다.
둘째, 그 소개글과 장르에서 결말이 어느 정도 유추가 됨에도—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가 나오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을 것이다—오히려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졌다.(원래 스릴러란 범인이 얼마나 미친놈이고 어떻게 죽는지 보려고 하는 거 아임까)
셋째, 의뢰 수락 전,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아무 회차나 두어 개 찍어서 슥 훑어봤는데, 가독성이 상당히 좋았다. “어… 이 정도면… 필력도 볼만한 거 아닌가” 싶은 기대가 들었고, 결국 그 기대에 이끌려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만족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래서 이 리뷰는 장르 애호가의 시선이 아니라, “이 장르 안 좋아하는 사람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는가”라는 조금 다른 잣대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그렇다, 이 작품은 그걸 싫어하는 내가 보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영화로 나와도 볼 거 같다.
[형식이 곧 서스펜스다 — 소제목의 시간 표기]
이 소설을 처음 눌렀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07:10 오도리 공원”부터 마지막 에필로그 “2026.07.25. 바퀴는 굴러간다”까지, 매 화의 소제목에 정확히 박힌 시각이다. 이 장치는 단순한 형식적 재치가 아니라 소설 전체의 엔진이다. 외국드라마 『24』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미 소개글에도 있지만, 이 소설은 단 13시간동안 벌어지는 사건이다. 독자는 “지금 몇 시인지, 다음 사건까지 얼마 남았는지”를 무의식중에 계산하며 읽게 되고, 이는 관광버스의 스케줄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를, 벗어날 수 없는 카운트다운으로 바꿔놓는다. 아침 7시 10분의 평화로운 산책에서 시작해, 저녁 8시 3분 “지옥의 가이드”라는 처단의 순간까지, 단 13시간동안 벌어지는 이 압축된 시간 구조는 스릴러가 요구하는 긴박감을 형식 자체로 구현해낸 훌륭한 설계였다. 즉, 소제목 리스트만으로 어떤 이야기가 어떤식으로 오갈지 유추가능하면서 흥미도 끌고 있다.
[분위기 — 관광지의 양면성]
라벤더밭, 사계의 탑, 청의 호수 등 홋카이도의 실제 관광지를 무대로 삼은 점은 이 소설의 공포를 더욱 실감나게 만든다.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살인이 교차 편집되는 구조(“보라색 꽃그림자에 가려져 핏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등)는 전형적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스릴러적 대비다. 특히 “명절 연휴로 텅 빈 관공서”라는 설정으로 완벽한 밀실을 만들어낸 13화는, 현실적 디테일(오본 연휴, 공무원 휴가)을 이용해 개연성을 확보한 좋은 예다.
[카톡방이 서사의 살아있는 증인이 되다]
오픈채팅방이라는 장치는 처음에는 ‘챈짱(채은)’이라는 인물의 이중생활을 드러내는 코믹한 도구로 시작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한 무기로 진화한다.
소설 중반부에서 가장 예리하게 설계된 장면은 단연 34~35화의 “권외(圏外)” 부분이다. 버스가 전복되고, 다나카 기사와 중년 부인까지 잃은 두 생존자가 신호조차 잡히지 않는 산속에서 서로를 부축하며 걷는 그 처참한 상황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아주 작은 숨구멍 하나를 열어준다. “안테나 한 칸이 위태롭게 깜빡이고 있었다”는 문장이 등장하는 순간, 독자는 본능적으로 안도한다. 음성 통화는 끊겨도 카톡 메시지는 전송되고, ‘읽음’ 숫자가 줄어드는 걸 보며 “이제 살았다, 곧 경찰이 온다”는 확신이 생긴다. 이건 소설이 지금까지 쌓아온 ‘오픈채팅방’이라는 장치—챈짱의 이중 자아를 드러내던 그 친근한 형식—를 살려주는 구조이기도 해서, 독자는 이 채팅방을 “구원의 통로”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답장이 온다. 그것도 죽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ㅋㅋㅋㅋㅋㅋㅋ”라는 웃음소리, “여기 따뜻해 챈짱 얼른 와”라는 말.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 선생 본인의 카톡 계정으로 죽은 아들의 목소리를 흉내 낸 메시지가 올라오는 순간, 독자와 등장인물들이 방금 전까지 느꼈던 안도감은 그대로 배신당한다. 이 낙차가 무섭도록 효과적인 이유는, 희망을 준 주체와 절망을 준 주체가 동일하다는 데 있다. 구조의 통로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처음부터 가해자의 감시망이었다는 사실—겐지가 죽은 자들의 핸드폰을 전리품처럼 챙기던 떡밥회수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조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독자는 단순히 “속았다”는 느낌을 넘어 “안전한 곳이 없다” “도움을 구할 방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근원적인 공포를 체감하게 된다. 이후 36화에서 스마트폰들이 나무에 매달려 “생일 축하합니다”를 반복 재생하는 장면은, 이 절망을 시각적·청각적 이미지로 확장시켜 소설 전체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완성한다. 희망 고문이라는 장치를 이토록 잔인하고 정교하게 활용한 전개는, 이 작품이 단순한 추격 활극이 아니라 심리적 학대의 서사를 다루는 스릴러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유있는 악당’으로 끌고가지 않는, 잘 만들어진 빌런 캐릭터]
이 소설에서 최고로 마음에 든 부분은 단연 범인 캐릭터의 조형이다. 초반에 그는 “정체불명의 위협”으로만 존재하다가, 18화의 도축장 트라우마, 37~38화의 “티켓의 주인” 에피소드,
그리고 43화 “짐승의 이름”에서 밝혀지는 진짜 정체(사카이 겐지를 죽이고 신분을 훔친 강현수)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레이어를 쌓아 완성된다. 특히 43화에서 그가 “이름이라는 세상의 모든 권위와 존엄은 얇은 피부 한 장 차이”라는 철학을 토로하는 장면은, 그가 그냥 흔한 반사회적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만의 논리 체계를 완성한 괴물임을 증명한다. 아버지의 학대, 혼혈이라는 정체성의 분열, 도축장에서의 각성이 순차적으로 배치되며 그의 폭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하되, 그 설명이 결코 면죄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인다.
이 배치가 중요한 이유는, 공포를 먼저 체험시킨 뒤에 설명을 배치함으로써 캐릭터가 “이해받아 동정받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막아준다는 점이다. 살인의 동기를 개인사로 설명하되, 그것이 면죄부가 아니라 오히려 더 소름 끼치는 패턴(약자·아이에 대한 집착이 자기 학대의 반복 의식이라는 점)으로 제시되는 방식은 절제되어 있다. 정말로 잔인한 악당 캐릭터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이유가 없으면 그냥 미친 3류악당이 되거나, 이유가 있으면 연민을 자아내곤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저 이 캐릭터의 유래를 설명할 뿐이다. “인간은 그저 말하는 고기일 뿐”이라는 대사, 그리고 자신의 죽음마저 “관객이 저 멍청한 가이드 놈 뿐이라 아쉽다”고 여기는 연극적 자의식은, 그를 잊을 수 없는 빌런으로 만드는 핵심 축이다.
특히 26~28화, 겐지의 시점으로 전환해 흰수염 폭포 살해 장면을 서술하는 방식은 대담한 선택이다. 독자는 이미 벌어질 일을 알면서도, 가해자의 내면에서 “레디, 큐”라는 연출 용어로 아이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이는 잔인하지만 동시에 매우 효과적인 장치로, 겐지라는 인물이 살인을 “공연”으로 인식한다는 캐릭터의 핵심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인다.
37~38화의 플래시백에서 밝혀지는 “티켓의 주인” 에피소드—겐지가 버스에 타기 위해 무고한 커플을 죽이고 그들의 취소 문자를 대신 보낸 사건—는 이 캐릭터의 용의주도함과 동시에 얼마나 무가치하게 생명을 소비하는지를 동시에 증명하는 훌륭한 장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김 선생 가족을 “어제 호텔 로비에서부터” 점찍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이는 이 캐릭터가 어디부터 계획이고 어디부터 즉흥인지 알 수 없는 ‘충동형 포식자’로 보이는 초반과는 달리, 우연한 비극처럼 보였던 사건이 사실 철저한 사전 계획의 일부였다는 걸 드러내며, 서사의 스케일을 하루짜리 투어에서 며칠에 걸친 사냥으로 확장시킨다.
또한 겐지의 대사 톤 변화—존댓말과 반말을 오가는 것, “손님”들 앞에서는 매끄러운 한국어를 구사하다가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 급격히 건조해지는 것—는 그를 그냥 “미친 살인마”가 아니라 사회적 가면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는 인물로 그려낸다. 무엇보다 그의 지능이 과장되지 않았다는 점이 훌륭하다. 19화에서 “삿포로”라는 단어 하나로 흔들리는 장면은, 그가 전지전능한 빌런이 아니라 실수할 수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서스펜스를 정교하게 조인다.
[16화의 유튜브 실제 링크 — 장르 소설/웹소설도 PPL이 가능할 수 있다]
세부적이지만 흥미로운 지점 하나를 짚자면, 16화에서 챈짱이 오픈채팅방에 “사계채언덕을 배경으로 한 캐논 파워샷 광고” 유튜브 링크를 올리는 장면에서 진짜로 광고링크를 걸어둔 것이다(클릭하면 정말 그 유튜브영상으로 이동한다). 이는 서사 전개상 반드시 필요한 디테일은 아니지만, 관광 가이드라는 직업의 현실감을 살리는 동시에 이 형식(오픈채팅방을 통한 정보 전달)이 실제 마케팅 콘텐츠까지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한 그릇이라는 걸 보여준다. 물론 작가가 그런것까지 의도하고 ‘진짜 광고’를 넣은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웹’소설이라는 매체 특성상, 이런 방식의 자연스러운 PPL 삽입도 가능하다는 것을 엿본 것 같아 소소하지만 흥미로웠다.
[진짜 주인공은 김 선생이었다]
이 소설을 완독하고 나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표면적인 생존자이자 최종 처단자는 챈짱이지만,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작가와 같은 직업의) 의사인 김 선생이었다는 점이다.
초반의 그는 관찰력 뛰어난 논리적 조력자 캐릭터로 등장했지만, 아들을 눈앞에서 잃은 이후로는 “복수의 화신”으로 완전히 재구성된다. 폭포에서 완전히 이성을 잃고 겐지를 죽여버리겠다고 악쓰는 장면, 32화의 혈투 장면에서 송곳이 어깨에 박힌 채로도 멱살을 놓지 않는 모습, 41화 이후 곰 덫에 발목이 짓이겨진 채로도 포기하지 않는 장면, 34화에서 “곰이 나오면 곰도 죽이고, 악마가 나오면 악마도 죽인다”는 대사는 그가 더 이상 이성적 조력자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40화, 죽은 아들의 생전 목소리에 홀려 곰 덫이 있는 공터로 뛰어드는 결말부는 이 붕괴의 정점이자, 겐지의 심리전이 얼마나 정교하게 인간의 가장 약한 지점—부모의 사랑—을 겨냥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육체적 추격전이 아니라, 슬픔에 잠식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조종당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잔혹한 심리극이기도 하다. 그래서 44화 “4살의 기억”에서 저체온증의 역설적 탈의 증상 속에 챈짱을 아들 준수로 착각하며 평온한 미소를 짓는 장면은,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처절하고 슬프며 아름다운 순간이다.
특히 45화 “마지막 처방”에서 그는 의사로서 내리는 처방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내리는 생존의 처방”으로 챈짱을 도망치게 하고, 이미 숨이 끊어진 뒤에도 사후강직이 된 팔 근육이 겐지의 다리를 놓지 않아 겐지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어야 했다는 디테일은 이 캐릭터가 죽음 이후에도 서사를 추동하는 힘으로 남는다는 걸 증명한다. 챈짱이 마지막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김 선생이 죽어서까지 몸으로 만들어준 시간 때문이었고,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생존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희생자가 완성시킨 복수극”이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MTB 선수라는 떡밥의 완벽한 회수]
1화에서 챈짱을 소개하며 지나가듯 언급된 “과거 MTB 선수 시절, 다운힐 자전거를 타고 시속 80km로 절벽을 내려오던 시절”이라는 설정이 47~52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완벽하게 폭발한다는 점은 이 소설의 플롯 설계가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3화에서 버스가 급제동할 때 챈짱만이 “다운힐 자전거를 타고 절벽을 내려오던 시절의 본능”으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짧은 묘사, 그리고 극도로 마른 체구와 시선공포증이라는 캐릭터의 약점들이 후반부에서는 오히려 생존의 무기(가벼운 몸, 지형을 읽는 감각, 고통을 억누르는 정신력)로 완벽히 전환된다.
48화에서 폐쇄된 MTB 다운힐 코스와 고철 자전거를 발견하고, 체인도 브레이크도 없는 자전거를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재해석하는 장면, 그리고 49화에서 스스로 발을 페달에 결박해 “인간 탄환”이 되는 장면은 클리셰나 맥거핀이 될 수도 있었던 설정을 서사적 필연으로 완성시킨다. 처음부터 심어둔 씨앗이 마지막 순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개화하는, 복선 회수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말하고 싶다.
[끈질긴 죽음과 직접적인 심판 — 독자에게 돌려주는 카타르시스]
53화 “지옥의 가이드”는 이 소설이 독자에게 지불하는 가장 확실한 보상이다.
겐지는 사실상 떨어지다시피 하는 시속 60km의 자전거에 명치를 직격당하고, 3미터 옹벽 아래로 함께 추락하고, 부러진 프레임에 가슴이 관통되어서도 곧바로 죽지 않는다.
이 “끈질기게 붙어 있는 숨”은 단순한 잔인함의 과시가 아니라, 그가 마지막까지 그 죽음조차 자신의 “완벽한 결말”로 소비하려는 나르시시즘을 유지하게 하는 장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은 챈짱이 부러진 자전거 바퀴살을 뽑아 그의 목에 직접 꽂아 넣는 장면이다. 이는 이 소설이 절대 타협하지 않는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어차피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몇 분 지나지 않아 겐지는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의 심판도, 우연한 사고사도 아닌, 살아남은 인물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끝을 내는 이 장면은 독자에게 “악인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네가 원하던 무대를 쥐여주지 않겠다”라는 원초적이고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스릴러 장르에서 종종 범인이 경찰에 체포되거나, 아니면 주인공의 절체절명의 순간, 작가가 미리 장치해 둔 사고로 우연히 죽는 결말로 씁쓸하게 김이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그 함정을 피해 주인공의 가장 직접적이고 육체적인 복수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정서적 완결성을 확보했다.
[개연성에 대한 아주 작은 아쉬움과 장르적 관용]
물론 완벽한 작품은 없는 법이다. 갑작스러운 불곰의 등장과 겐지가 피 묻은 수건을 던져 곰을 조종하듯 유도하는 장면, 그리고 버스 전복이라는 대형 사고 이후에도 김 선생이 부러진 갈비뼈, 송곳에 찔린 어깨를 이끌고 산길을 몇 시간째 주파하는 설정은, 캐릭터의 정신적 동력(복수심)으로 설명되긴 하지만 신체적 개연성 면에서는 좀 과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준수가 폭포 하류에서 하루 만에 생존한채 구조된다는 설정의 확률적 개연성도, 사실적 스릴러의 기준으로 보면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과함’을 통해 빌런 캐릭터의 비인간적인 잔인함과, 그를 잡아서 어떻게든 복수하고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자 하는 주인공 캐릭터들의 집념과 복수심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면, 결함이라기보다 장르적 허용의 일부로 읽는 것이 더 공정할 것이다.
[에필로그 — 끝나지 않은 무언가, 열린 결말의 미학]
57화 에필로그는 이 소설이 단순한 완결이 아니라 다음 이야기를 향한 문을 남겨두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챈짱이 “극락 바이크”라는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며 평온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 이미 죽은 채팅방에 “웃는 라이언”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강현수가 남긴 캔버스는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은, 완결된 복수극에 다시 한번 서늘한 균열을 낸다. 강현수라는 한 개인의 광기가 끝났다고 해서 그가 남긴 “전리품 수집”이라는 패턴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암시, 그리고 버스 뒷유리창 너머로 플래시를 터뜨리는 익명의 존재는 이 사건이 단독범의 우발적 광기가 아니라 더 큰 무언가—모방범이든, 공범이든, 혹은 같은 부류의 또 다른 포식자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완결된 이야기에 안주하지 않고 후속편 혹은 세계관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둔 이 마지막 장면은, 독자에게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안기며 여운을 극대화하는 선택이다.
초반의 정교한 관찰형 서스펜스에서 중반의 처절한 서바이벌 스릴러, 그리고 후반의 복수극으로 장르를 자연스럽게 확장해가며 완결까지 밀도를 잃지 않은 작품이다. 시간 표기라는 형식적 장치, 카톡방을 활용한 다층적 서스펜스, 특히 35화의 잔인한 반전, 그리고 챈짱과 김 선생이라는 두 생존자 겸 희생자가 만들어내는 서사의 무게중심 이동은 이 작품을 단순한 스릴러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무엇보다 1화부터 심어둔 사소한 디테일들—MTB 선수 경력, 시선공포증, 극단적인 마름—이 클라이맥스에서 하나도 낭비되지 않고 회수되는 것을 보며, 이 작품이 단순히 자극적인 장면의 나열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플롯 위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겐지라는 괴물에게 확실한 죽음을, 김 선생이라는 희생자에게 온전한 애도를, 그리고 챈짱이라는 생존자에게 회복의 서사를 각각 부여한 뒤, 마지막 순간 다시 불씨를 남겨두는 이 결말은 완결작으로서의 만족감과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훌륭한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