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출[同出] 비평

대상작품: 배니싱 트윈 (Vanishing Twin) (작가: 김민주, 작품정보)
리뷰어: 윤휘, 52분 전, 조회 7

주관적인 별점

  • 스토리 구성: ★★★☆☆ (도착지는 훌륭한데, 거기까지 데려가는 길에 무너진 곳이 여럿 있다.)
  • 인물 매력도: ★★★☆☆ (화자의 내면은 촘촘하나, 주변 인물들은 대체로 화자의 사유를 비추기 위한 거울로만 기능한다.)
  • 표현 및 묘사: ★★★★☆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문장 자체의 밀도는 아주 높다.)
  • 진입장벽: ★★★★☆ (물리학 용어가 설명 없이 쏟아지는 구간이 있고, 그 설명마저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이 있다.)

 

 

 

 

1. 주제(논제)에 대한 이야기

 

선형적인 시간선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서글플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글을 읽고, 그리 생각했다.

 

기원전 4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때에, 노자는 도덕경의 첫 장을 이렇게 열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수천 년 동안 수백 가지로 옮겨진 구절이라 감히 정본을 자처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이 구절을 그저 내가 읽어온 방식으로 옮겨보겠다.

 

“도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게 되고, 무언가에 이름값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그 이름값에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한 가지 짚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는 노자를 대개 도교의 시조로, 그러니까 종교적인 인물로 배우게 되는데, 사실 그것은 후대에 장자를 거치며 입혀진 색채일 뿐이다. 노자가 도덕경을 쓴 시점엔 장자가 없었다. 그리고 노자가 도덕경을 쓰게 된 사정 자체는 훨씬 세속적이었다. 관문지기 윤희(尹喜)는 은둔하러 떠나는 노자를 붙잡았다. 윤희는 말했다. 선생이 이대로 사라지면 천하에 등불 하나가 꺼지는 것이니, 후세를 위해 도의 이치만이라도 글로 남겨달라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노자가 영영 떠나버리는 것이 아까웠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윤희라는 인물에게 개인적인 애착이 좀 있다. 내가 쓰는 필명이 “윤휘(昀輝)”인데, 전혀 윤희라는 인물과는 관련이 없지만, 오래전에 이 일화를 접했을 때가 생각이 난다. 뭐, 물론 나는 떠나는 현자를 붙잡는 사람은 아니고, 그저 남이 쓴 글을 읽고 감상이나 적는 사람이지만.)

 

그러니, 노자가 도덕경을 작성했을 당시의 “도(道)”는, 신선이나 불로장생 따위의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노자 관련 교양 수업 하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장자 이후의 종교적인 노자가 아니라 장자 등장 이전의 노자를,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읽어보자는 취지의 수업이었다. 그때 내가 이해한 바로 그 “도”는, 세상을 어떻게 바르게 다스릴 것인가에 관한 개념에 훨씬 가까웠다.

 

그 전제 위에서 위 구절의 뒷부분을 마저 옮겨보면 이렇게 된다.

 

無名 天地之始(무명 천지지시), 有名 萬物之母(유명 만물지모), 故 常 無欲以觀 其妙(고 상 무욕이관 기묘), 常 有欲以觀 其徼(상 유욕이관 기교), 此兩者同出而異名(차량자동출이이명), 同謂之玄(동위지현), 玄之又玄(현지우현), 衆妙之門(중묘지문)

 

이름값이 없다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질 때부터 있던 일이고, 이름값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만물의 어머니가 되어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늘 무욕한 상태로 그 무명의 묘함을 보고, 늘 의욕을 가지고 그 이름값이 만들어내는 경계를 보려 애써야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왔으나 이름이 다를 뿐이며(此兩者同出而異名), 그 함께 나옴이야말로 현묘하고,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모든 현묘함의 문이 된다.

 

내가 이 구절에서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은 동출(同出), 곧 “같이 나왔다”는 두 글자다. 이미 깨닫고 있었으나, 내가 그 수업에서 붙잡은 것은 이것이었다.

 

세계는 본디 몰가치하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이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유(有)와 무(無)가 분리되기 시작한다. 애초에 유도 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이름 하나가 생기면 반드시 그 이름의 바깥이 함께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있음’이라는 말을 만든 그 순간에 ‘없음’도 같이 태어난다. 이 둘은 순서대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동시에 나온 것이고, 다만 우리가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 마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인간의 인식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대립쌍을 먼저 만드는 셈이다. 작가는 작중에서, 노자를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립쌍들을 열거한다. 삶과 죽음, 시작과 끝, 양과 음, 낮과 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안.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와 같다. 두 극을 먼저 박아놓고 시작한다. 그렇게 두 극을 세워놓은 다음에야, 인간의 언어는 그 사이를 조금씩 촘촘하게 메워나간다. 낮과 밤 사이에 새벽과 황혼과 땅거미가 들어서고, 기쁨과 슬픔 사이에 서운함과 시원섭섭함과 그럭저럭 괜찮음이 들어선다. 나는 인간의 언어가 발전해온 양상이 대체로 이랬다고 생각한다. 먼저 양 끝을 찍고, 그다음에 그 사이를 스펙트럼으로 채우는 것.

 

그러니 결국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은, 각자의 분야마다 놓인 그 스펙트럼 위 어딘가에 자기 위치를 점 찍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그 스펙트럼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생겨난 인공물이다.

 

이 소설은 표면상 철저히 현대물리학의 언어로 쓰인 종말 SF다. 양자 진공 에너지의 불안정, 사건의 지평선, 홀로그램 우주론.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물리학이 아니라 인식론을 읽었다는 생각 뿐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천오백 년 전 노자가 붙잡고 있던 그 문제를 현대과학의 어휘로 다시 쓴 글을 읽은 것 같았다. 현대과학과 노자라니, 기묘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오, 현지우현이라.

 

근거는 작가가 마지막에 직접 적어놓았다.

 

작가는 결말에서, 아기가 터뜨린 첫 숨과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숨이 사실은 똑같은 것이라 말한다. 귀한 숨과 천한 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것은 명백히 위에서 말한 그 이야기다. 숨 자체에는 아무런 값이 없는데, 인간이 한쪽을 탄생이라 부르고 다른 쪽을 죽음이라 불렀기 때문에 비로소 귀함과 천함이 갈라진 것이다. 몰가치한 것에 이름이 붙는 순간 가치가 생겨난다.

 

그리고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ㅁ’이나 ‘ㅇ’ 같은 순환 구조가 아니라 ‘ㅅ’ 같은 대칭 구조“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작품은 끝내 지정하지 않았다고 본다. 물론 문맥상으로는, 앞에서 했던 말 정도를 의미하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 모호함이 오히려 정확히 내가 읽어낸 부분을 위해 설계된 비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삶과 죽음일 수도 있고, 유와 무일 수도 있고,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대립쌍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환(ㅁ·ㅇ)이라면 죽음이 삶으로 흐르고, 삶이 다시 죽음으로 흐를 터다. 방향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칭(ㅅ)은 다르다. 대칭에는 순서가 없다. 두 변이 한 꼭짓점에서 동시에 뻗어 나오고, 어느 쪽도 먼저가 아니다. 작가가 쓴 표현을 빌리면, 죽음이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에 삶이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도덕경의 동출(同出) 그 두 글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아마 도덕경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님 말고!) 그러나 인간이 자기 인식의 구조를 끝까지 밀고 가면 결국 비슷한 자리에 도착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종말은 무엇인가.

 

세계가 정보로 환원되는 과정에서 인류가 잃어가는 것의 순서를 보면 흥미롭다. 시간이 먼저 사라지고, 그다음 공간 구분이, 마지막으로 언어가 사라진다. 나는 이 순서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인간이 대립쌍을 만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시간을 선형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앞선 것과 뒤선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시작과 끝이 생기고, 시작과 끝이 있어야 삶과 죽음이 생긴다. 그러니 시간 감각이 먼저 무너지는 것은 대립쌍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인간의 인식 체계가 깡그리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이 무너지면 마침내 언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름을 붙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소설에서 인류가 겪는 종말은 물질의 소멸이라기보다, 이름값이 지워지는 과정에 가깝다. 이름이 없었던 상태, 노자가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작”이라고 했던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작품 마지막에서 화자가 자신의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화자에게 이것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이름값일 뿐이고, 그 이름값이 함께 지워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화자는 평생 자기 반쪽이라 여겨온 사라진 쌍둥이에게로 간다 말하는데, 애초에 ‘남은 쪽’과 ‘사라진 쪽’을 가른 것, 역시 이름(언어)이었다. 노자에 의하면, 무욕한 상태로 인식이 무너진 그 묘함을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배니싱 트윈은 어딘가에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 데도 없는 존재라고 작품이 직접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유와 무가 갈라지기 이전의 자리. 오, 중묘지문이라.

 

한 걸음 더 밀어보자면, 이 소설이 물리학을 빌려 결국 도착한 곳은 인간이 자기 인식의 한계를 자각하는 자리인 것 같다고 하겠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이름을 붙여야만 볼 수 있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반대편이 생겨나고, 그 반대편과의 거리로만 사물을 잰다. 홀로그램 우주론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가 3차원이라 믿는 이 세계가 실은 그보다 낮은 차원의 정보가 투사된 결과”라는 이야기라면, 그것은 물리학의 언어를 입었을 뿐 노자가 하려던 말과 그리 멀지 않다.

 

우리가 실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이름값이 만들어낸 그림자라는 것.

 

그러니 이 작품은 SF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내가 읽기에 그 알맹이는 우주론이 아니라 인식론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물리학의 어휘로 쓰였을 때 오히려 더 설득력을 갖는다는 점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이천오백 년 전에는 도(道)라고 불러야 했던 것을, 지금은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부르는 것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같은 것이지만, 시간이 갈라 놓아 이름이 다를 뿐인, 또 하나의 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이야기가 이름값의 세상을 살고 있는, 선형의 시간을 살고 있는 서글픈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자 한다. 노자에 의하면, 常 有欲以觀 其徼(상 유욕이관 기교). 그리고 나의 해석에 의하면, 늘 의욕을 가지고 그 이름값이 만들어내는 경계를 보려 애쓸 것. 이렇게 적어두고자 한다.

 

다만 짚어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논지는 어디까지나 작품이 도착한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도착한 자리가 훌륭한 것과, 거기까지 데려가는 길이 잘 놓인 것은 다른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후자에서 아쉬움을 여럿 남겼다고 본다. 도착지가 좋았던 만큼, 길에서 넘어진 자리들이 더 아깝게 느껴졌다.

 

 

 

 

2. 좋았던 점에 대한 이야기

 

① 먼저, 가장 좋았던 점부터 짚고자 한다. 첫 문장에 이미 논지가 다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사촌 언니가 둘째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곧바로 그 하루를 산술로 정리한다. -1의 부족을 +1이 메꿨고, +1의 과잉을 -1이 바로잡았으며, 변화가 두 가지나 일어났는데도 그 결과인 0은 호수 표면처럼 잔잔했다고.

이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작품의 주제를 첫 문단에 놓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주제로 보이지 않게 하는 일(곧, 수미상관)이기 때문이다. 아, 이마저도 양 극단이 동시에 나와 있는 꼴이라 해야 할까. 대개 이런 자리에는 상징이 너무 크게 들어와서 독자가 “아, 이게 주제구나” 하고 알아채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것을 초상집과 산부인과라는 아주 구체적인 생활의 장면으로 처리했다. 처음 읽을 때 이 문단은 그저 정신없던 하루의 회상으로 읽힌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 첫 숨과 마지막 숨이 같다는 문장을 만나는 순간, 이 첫 문단이 통째로 되살아난다. 아주 탁월한 배치가 아닐 수 없다.

 

② 그다음으로 좋았던 점은, 실제로 존재하는 의학 용어 하나를 우주론의 크기까지 늘려낸 솜씨다.

배니싱 트윈은 지어낸 말이 아니다. 임신 초기에 쌍둥이 중 하나가 사라지는, 실제로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작품은 이 용어를 설명하면서 아주 중요한 한 줄을 심어둔다. 사라진 쌍둥이는 어딘가에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

이 문장 하나가 작품 전체의 설계도다. 선박의 잘려 나간 절반이 그렇고, 정보 면에 기록되었다는 인류가 그렇다. 개인의 단위에서 벌어진 아주 작은 사건과, 지구 전체가 겪는 종말이 정확히 같은 문장으로 설명된다. 작가가 해낸 것은 스케일을 키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같은 크기였음을 보여준 것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SF라는 장르에서 출발했다기보다, 이 의학 용어 하나에서 출발했으리라고 짐작한다. 물론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③ 재난이 확산되는 순서를 인간의 감각 순서로 설계한 것도 좋았다.

세계가 무너지는 이야기에서 가장 흔한 실패는 스케일이 커질수록 독자가 감각을 잃는다는 것이다. 흔히,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은 그 크기가 너무 커서, 되레 아무 느낌도 주지 못한다. 이 작가는 그 함정을, 감각을 하나씩 빼는 방식으로 피해 간다. 시간을 못 세게 되고, 다른 공간의 소리가 들리고, 거리를 못 재게 되고, 마침내 말을 못 하게 된다. 전부 독자가 자기 몸으로 상상할 수 있는 크기로 간접경험을 하게 해준다.

특히 좋았던 건 아버지가 마트에서 겪는 대목이다. 건물 전체의 대화가 한꺼번에 들려서 2층의 부부와 1층의 아이와 지하의 여자를 동시에 구분해낼 수 있었다는 것. 이건 초능력을 얻은 장면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간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청각 하나로 증명한 장면이다. 거리가 사라졌으니 먼 소리와 가까운 소리가 같아진 것이다. 설명 한 줄 없이 원리를 보여준다.

 

④ 종말 앞에서도 계속되는 생활의 관성을, 냉소하지 않고 그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리학회가 세상에 시한부를 선고한 다음에도 이 소설의 사람들은 출근을 하고, 회식을 하고, 충동구매한 스웨터를 기한 내에 반품한다. 동료는 셋째를 가질지 고민하면서 혈당 관리부터 하겠다며 영양제를 챙겨 먹고, 화자의 아버지는 정년 후 재취업 자리를 알아본다.

이런 장면은 자칫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데 쓰이기 쉽다. 그런데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자가 “인간은 대체 언제쯤에야 현재를 살게 될지” 답답해하다가도, 곧바로 자기도 부모를 꾸짖을 자격이 없다고 물러서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래에 산다면 자신은 과거에 산다고. 비판의 사정거리를 자기 자신까지로 좁히는 이 한 문장 덕분에, 이 장면들이 조롱이 아니라 애정이 된다.

 

⑤ 마지막으로, 개인의 병으로 읽히던 것이 인류의 재난으로 뒤집히는 자리.

어머니가 시간을 잃어가는 대목은 처음에 치매 서사로 읽힌다. 병원을 예약하고, 아버지가 우리 집안에 치매 환자가 없다며 큰소리를 치는 것까지 전형적이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면 문 바깥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옆자리 사람의 문진표에 날짜와 시간을 모르겠다는 한 줄이 적혀 있다.

독자가 화자와 정확히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깨닫게 만드는 배치다. 개인의 불행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세계의 붕괴였다는 것. 이 전환에 설명이 단 한 줄도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3. 아쉬웠던 점에 대한 이야기

 

다섯 가지를 적을 텐데, 뿌리는 대체로 하나인 것 같다. 이 작품은 자기가 도착할 곳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거기 도착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건너뛰었다는 점이다.

 

① 가장 아쉬운 것은, 초점화자가 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결말과 어긋난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화자는 시간 감각을 잃고, 언어를 잃고, 마침내 몸까지 잃는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이 소설은 “그날 이후”, “몇 주 뒤”, “얼마 뒤” 같은 시간 표지를 정확하게 쓰면서 사건을 순서대로 늘어놓은, 아주 안정적인 과거형 회고다. 시간을 선형으로 붙잡을 수 없게 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삶을 시간 순서대로 회고해서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

작가가 이 문제를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 장면에서 문장의 시간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부모가 쓰러진 것을 서술할 때는 과거형이었다가, 화자가 그들을 일으키려 하는 대목부터 갑자기 현재형으로 바뀌고, 그 뒤로는 끝까지 현재형이다. 나는 이것이 화자가 시간을 잃는 순간 서술의 시간도 함께 무너지도록 설계한 장치라고 읽었다. 이건, 아주 좋은 시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그 장치가 마지막 몇 문단에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앞의 대부분은 여전히 시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의 문장이다. 이 소설이 “언제 쓰인 글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 잃기 전에 쓴 것이라면 결말을 알 수 없었을 테고, 다 잃은 뒤에 쓴 것이라면 이렇게 쓸 수 없었을 테니까.

 

② 두 번째로 아쉬운 것은, 핵심 이론을 설명하는 대목이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자회견에서 베넷 박사는 원뿔 도면을 띄우고, 그 꼭짓점 A에 기록된 정보가 공간 B로 투사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단에서 화자는 이것을 2차원의 정보가 3차원의 공간을 이뤄낸다고 정리한다.

꼭짓점은 점이다. 2차원이 아니다. 실제 홀로그램 원리라는 것이 “경계면이 그 안쪽의 정보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라면, 여기서 지목되었어야 하는 것은 꼭짓점이 아니라 원뿔의 면이었을 것이다. 나는 물리학 전공자가 아니므로 내가 무언가를 놓쳤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열어두겠다. 다만 같은 페이지 안에서 0차원과 2차원이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건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문장이 어긋난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자의 감상이 더 불친절하다고 느꼈다. 우리 우주가 사실은 홀로그램이라는 것이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된다는 게 불편했다는 대목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무엇이 간단하게 설명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박사는 그래프와 수치를 읽어주었을 뿐이고, 그것을 따라갈 만한 다리가 놓이지 않았다. 화자만 알아듣고 독자는 알아듣지 못한 채로, 화자의 감상만 전달되는 구조다.

작가가 이 대목을 짧게 처리한 이유는 짐작이 간다. 여기서 물리학 강의를 길게 하면 소설이 죽을 수 있으니까. 선택과 집중을 했으리라 본다. 그 판단 자체는 옳을 수도 있다. 다만 짧게 하려면 정확해야 한다. 어려운 것을 짧게 쓰는 방법은 생략이 아니라 비유이고, 이 작품에는 이미 좋은 비유를 만들어내는 힘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모조리 날려버린 건, 실수라고 본다.

 

③ 세 번째는, 작품의 중심 비유가 도중에 극성이 뒤집힌다는 점이다.

기자회견장에서 화자는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햇님이 저 블랙홀과 다를 게 무엇인가 생각한다. 햇님이라는 존재가 거부할 수 없는 블랙홀의 중력과 같다면, 자신이 그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꼭두각시인 것도 당연하다면서.

문장 자체는 아름다운데, 앞에서 쌓아온 설정과는 방향이 어긋난다. 이 소설에서 햇님은 사라져서 화자에게 흡수된 쪽이다. 블랙홀에 비유하자면 빨려 들어간 물질이지, 빨아들이는 중력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햇님이 중력이 되고 화자가 끌려가는 쪽이 된다.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보자면, 사라진 것이 남은 것을 지배한다는 역설을 노렸을 수 있다. 흡수된 쪽이 오히려 흡수한 쪽의 삶을 끌고 다닌다는 것. 그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오히려 이 작품에서 가장 좋은 문장이 된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그래서 그 문장이 직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흡수된 쪽이 어떻게 중력이 되는지, 화자가 스스로 한 번만 의아해 했다면, 이 알레고리는 오류가 아니라 통찰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④ 네 번째는 조금 사소한 것인데, 근거 없이 주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작품은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결정적 공통점으로, 잘려 나간 부분의 질량과 남겨진 부분의 질량이 동일하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 발견이 음모론자들을 침묵시키고 물리학자들을 불러내는 전환점이니,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다.

그런데 사라진 쪽의 질량은 무엇으로 쟀을까. 그것은 이미 없는데. 선박 설계도와 화물 명세로 역산했다고 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설명이 없다. 가장 중요한 단서가 가장 근거 없이 주어진다는 점이 아주 조금 마음에 걸렸다.

겉보기에 질량이 절반인 것 같아도, 겉모습의 절반과 질량의 절반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을 수는 있겠지만.

 

⑤ 마지막으로, 세계가 무너지는 규칙이 장면마다 달라진다.

세 가지가 걸렸다.

먼저, 초반의 재난은 선박과 컨테이너와 해양생물을 가리지 않고 잘라낸다. 무생물도 대상이다. 그런데 결말의 거실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몸만 사라지고, 그들이 누워 있던 바닥도 앨범도 밥솥도 그대로 남는 듯 보인다. 규칙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먼저일 뿐인지 알 수 없다.

다음으로, 초반에는 정확히 절반만 사라지던 것이 결말에서는 통째로 사라진다. 사건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다는 언급은 있지만, 부분이 사라진다는 것이 전체가 사라진다는 것으로 확장되거나 바뀌는 지점에 대한 설명은 없다. 블랙홀이니 다 빨아들인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처음엔 왜 절반만 빨아들였는지도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밥솥이 밥이 다 되었다고 알린다. 나는 이 장면 자체는 좋았다. 인간이 시간을 잃어도 기계는 여전히 시간을 세고 있다는 것, 실제 시간선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선만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그 대비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밥솥에 전기를 보내는 사람들도 이미 시간과 언어를 잃었을 텐데, 발전소가 계속 돌아가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 소설이 한 가족의 거실로 스케일을 좁힌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좁힌 만큼, 바깥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더 철저하게 짚어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4. 제목에 대한 이야기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 나는 이 제목이 이 작품의 가장 성공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의학에서 쓰는 용어다. 그래서 장르를 못 보았다면, 의학 이야기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의도한 건 아니었겠으나, 굳이 꼽자면 사라진(vanished) 쌍둥이가 아니라 사라지는 중인(vanishing) 쌍둥이라는 점이 참 찰떡이라고 생각했다. 이 제목이, 이 의학용어가 진행형을 띄고 있기에, 작품의 마지막 순간과 정확히 맞물리기 때문이다. 화자는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중이고, 인류도 멸종한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중이다. 작가가 이 시제를 의식하고 골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보다 정확한 시제는 없었을 것 같다.

또, 배니싱 트윈은 어딘가에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 데도 없다고 한다는 설명.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동출이었기에 반가웠다. 유와 무가 갈라지기 이전의 자리에 놓인 이름. 그러니 이 소설은 제목의 의미부터, 나를 부르고 있던 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덧대어보자면, 나는 이 작품이 화자에게 ‘달님’이라는 이름을 준 것이 지금 와서 아주 많이 흥미롭다. 화자는 왜 자기가 햇님이 될 수 없었는지를 묻는데, 해와 달이야말로 대립쌍이 아니던가. 낮과 밤, 있음과 없음, 남은 쪽과 사라진 쪽.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 읽은 지금 다시금 생각을 되짚어보면, 해와 달은 반대라고 할 것들이 아니었다. 상반된 극이라고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해의 반대말이 달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둘은 결코 서로를 반대로 취급하지도, 그래서 맞물려 0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즉, 대립쌍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초점화자인 현서가 평생 품어온 열등감은 사실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았음을, 이 소설은 이름 하나로 미리 적어두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5. 기타 개인적인 이야기

읽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몇 번을 되돌아가 다시 읽기도 했습니다. 제가 물리학에 밝지 못한 탓도 있고, 위 3-②에 적어놓은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대목을 붙잡고 끙끙거리다가, 결국 이 소설이 물리학으로 읽히기보다는 다른 것으로 읽히기 시작했으니, 어찌 보면 그 시간이 이 리뷰를 만든 셈이기도 하겠습니다.

1절에 노자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을 두고 작가님께서 당황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님이 도덕경을 염두에 두고 쓰신 게 아닐 것임은 저도 십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좋은 작품은 작가가 넣지 않은 것까지 독자가 끌어오도록 만드는 법이기에, 저는 이 작품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을 꺼내어 왔습니다. 그러니 이 리뷰는 작품에 대한 해설이라기보다, 이 작품이 제게 무엇을 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에 가깝겠습니다.

아쉬운 점을 다섯 가지나 적어놓았습니다만, 그건 이 작품이 도착한 자리가 그만큼 좋았기 때문입니다. 시시한 글이었다면 다섯 가지를 적을 마음도, 아니 애초에 리뷰를 적을 마음조차도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물리학을 모르는 저로서는 더더욱. 허나 첫 문장과 마지막 문단이 서로를 붙잡는 구조는, 제가 올해 읽은 중단편 중에 손에 꼽습니다. (제가 뭐가 되는 건 아니지만요.)

그리고 제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인식의 한계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이야기를 유독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읽은 면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이 작품을 훨씬 정직한 종말 SF로 읽으실 테고, 그 과학에 입각한 독법이 더 옳을 수도 있습니다.

 

사라짐을 사라짐이 아니라는 듯이 쓰신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응원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이하는 읽으면서 눈에 걸린 것들입니다. 향후 작품 활동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적어둡니다.

  • 평생을 살아기는 게 → 살아가는 (3절 관련 대목)
  • 실종된 크루즈 여행객들은 이십 여명이십여 명 (접미사 ‘-여’는 붙이고, 단위 명사는 띄웁니다)
  • 내가 괴상식에 집착하는 별종일지도 → 괴이한 것에 정도의 표현이 필요해 보입니다 (문맥상 알아듣긴 하지만)
  • 블랙홀의 빨려 들어간 것이 더 이상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 블랙홀 빨려 들어간 것이 (조사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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