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저는 이 작품의 입구를 잘못 찾았습니다.
좋은 독자는 안내문을 읽습니다.
저는 항아리부터 깼습니다.
제가 이상하다고요?
전자제품 사서 매뉴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쓰는 분,
지금 손 들어 보십시오.
……어.
제법 계시네요.
아무튼 저는 아닙니다.
저는 원래 파라텍스트를 무시합니다.
소개글도 잘 안 봅니다.
태그도 잘 안 봅니다.
심지어 제목도 안 읽고 들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확인하는 편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제가 단지 청개구리라서요?
실망입니다.
저를 그렇게만 보시다니요.
이상한 소리 말고 결론만 말하라고요?
흠흠.
이유가 나름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스릴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측이 안 됩니다.
VR 게임 할 때 정해진 스토리만 따라가십니까?
보이는 항아리 다 깨고, 닫힌 문 다 눌러 보고,
제작자가 가지 말라는 골목부터 비비지 않습니까.
솔직해집시다.
우리 다 해 봤잖아요.
이 작품도 그렇게 들어갔습니다.
작가님은 분명 정문을 만들어 두셨을 겁니다.
소개글이 있었고, 태그가 있었고, 제목이 있었겠지요.
저는 평소처럼 보지 않았습니다.
본문부터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주 짧은 사변문인 줄 알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고, 텅 빈 객석이 보였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 세계가 방금 시작된 이야기인가?
원고지 3매짜리 작은 우주론인가?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댓글을 달려고 스크롤을 내렸습니다.
거기서 태그를 밟았습니다.
네.
밟았습니다.
읽은 게 아닙니다.
밟았습니다.
게임에서 제작자가 “이 길로 가세요”라고 해 놨는데,
유저가 괜히 벽을 비비다가 이상한 곳으로 떨어지는 경우 있잖습니까.
제가 그 유저였습니다.
튜토리얼을 스킵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벤트가 떴습니다.
방금까지 저는 영화관에 있었는데, 태그를 밟는 순간 다른 장소에 서 있었습니다.
장르가 바뀌었습니다.
화면 아래에 있던 게 올라왔습니다.
소개글을 펼치니, 이미 읽은 본문만큼의 글이 다시 튀어나왔습니다.
와. 깜놀.
다시 의자에 앉아 정신을 차려 보니
제가 처음 읽었던 문장들이 다시 열렸습니다.
같은 글이었는데,
같은 글이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은 제게 두 번 읽혔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사변처럼.
다음에는 전혀 다른 사건처럼.
작품이 길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입구를 잘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건, 잘못 들어갔는데도 작동했다는 점입니다.
작가님이 의도하신 루트는 따로 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 루트를 어겼습니다.
그런데 비정상 루트에서도 히든 컷신이 떴습니다.
좋은 독자는 안내문을 읽습니다.
저는 항아리부터 깼습니다.
그리고 항아리 안에서 뭔가 나왔습니다.
추천드립니다.
다만 정문으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저처럼 벽을 비비다가 들어가면,
조금 더 크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