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이 작품이 구축하는 공포는 구조 그 자체이며, 특히 순환 구조를 통해 “벗어날 수 없음”을 형식 자체로 증명한다. 서사의 시작인 ‘빡’과 끝의 ‘깜’이 결합해 하나의 ‘깜빡’이 되는 구성은, 이야기가 처음과 끝이 있는 선 위에 놓여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가 아니라, 동일한 지옥을 반복 재생하는 구조다.
이 순환은 최소 3개의 주요 사이클을 전제로 한다.
첫 번째는 기억을 상실한 채 화장실에서 깨어나 로웬의 시체와 제2 제어실의 진실을 마주한 뒤 자살하는 (아직) 무명의 인물의 사이클이다.
두 번째는 ‘유스케’의 시점에서, 노아를 살해하고 로웬과 대립한 뒤 동일한 결말에 이르는 사이클이다.
그리고 이 두 사이클은 소설에는 나와있지 않은, 그러나 암묵적으로 ‘다음’ 반복을 예고하며 동시에 이것이 얼마나 무한히 반복되고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중요한 점은 인물이 바뀌어도 구조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사이클은 각성, 기억 상실, 살인, 진실 직면, 리셋, 재각성이라는 동일한 단계로 구성된다. 이 반복은 그리스 신화의 시지포스를 연상시키지만, 차이는 분명하다. 시지포스는 자신의 형벌을 인식하지만, 이 소설의 인물들은 매번 기억을 잃은 채 이 알 수 없는 지옥을 처음처럼 경험한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의 공포는 반복이 아니라, 인식의 박탈에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기억의 상실은 저주이자 동시에 자비다.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라는 유스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이 순환의 일부임을 직감적으로 아는 듯하지만, 다음 사이클에서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순환한다면, 그것은 미쳐버렸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이 순환 구조는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을 구조적 필연으로 제시한다. 각 사이클의 주인공은 분명히 깨닫는다. 진실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된 순간 파국이 온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잠금을 풀고, 제어실로 향하고, ‘Gryvaisht’와 다시 마주한다. 그리고 기억을 지우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비이성적 충동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그 합리성 자체가 다음 순환의 출발점이 된다. 이 작품에서 반복은 무지나 이기심의 결과가 아니라, 이성의 한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선택을 하고,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같은 파멸에 도달한다.
-그 이름을 말해서는 안 돼
제목이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Gryvaisht’는 이 순환 구조의 핵심 기호다. 이 단어는 발음조차 불분명하며, 주인공의 발음 시도는 어색하고 실패로 끝난다. 이는 ‘Gryvaisht’가 인간의 언어 체계 안에 완전히 편입될 수 없는 기표임을 드러낸다.
의미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단어는 특정 개념이나 존재를 가리키기보다는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남긴 흔적’에 가깝다. 인간은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지만, 끝내 설명할 수 없다. 그로 인해 이 소설은 전형적인 코스믹 호러에 속한다. 공포의 대상은 괴물이나 비인간적인 폭력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언어로는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다.
유스케의 수첩에 남겨진 “어떤 소리인지 적어보자면……”이라는 문장은 이 공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진실을 언어화하려는 시도는 곧 언어의 붕괴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Gryvaisht’로 도배된 페이지들이다. 말하려는 순간, 인간은 미쳐버린다. 이는 이 작품에서 언어가 더 이상 소통이나 설명의 수단이 아니라, 파괴의 매개로 기능함을 의미한다.
살인의 반복 역시 이 구조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주인공들은 항상 동료를 죽이려고 한다. 물론 알 수 없는 공포 상황으로 인한 행동이거나, 주인공이 기억하지 못하는 폭력사태에 대한 대응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해석은, ‘Gryvaisht’를 본 자가 타인에게서 그 진실을 차단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진실(이 뭔지도 모르겠지만)을 혼자만 짊어지려는 선택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타적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막아내지 못한다. 제2 제어실의 계기판은 여전히 1c를 가리키고, 외부에서는 ‘Gryvaisht’가 계속 송신된다. 눈을 감았다 뜨면 또다시 이 악몽의 시작이다.
다른 한편으로, 로웬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Gryvaisht’는 이 살인이 개인의 의지라기보다 외부의 초우주적 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한다. 이 경우 승무원들은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무언가의 의지를 수행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 공통된 결론은 동일하다. 타인이든 스스로든, ‘제거’해도 구조는 변하지 않으며, 살인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순환을 유지하는 장치일 뿐이다.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다
이 소설이 나타내는 진짜 공포는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다”는 상태에 있다. 눈을 감는 것은 이 상황의 종결(사실은 리셋), 눈을 뜨는 것은 재시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어느 쪽도 탈출이 아니다. ‘깜빡’을 분절한 글자는 소설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눈깜빡임의 순간으로 만든다. 그 찰나 안에 우주적 규모의 악몽이 압축되어 반복된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뜰 때,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신체에 남은 구멍, 벽에 도배된 ‘Gryvaisht’, 손에 쥔 칼과 총은 이것이 결코 처음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 소설이 제시하는 가장 무서운 가능성은, 우리 역시 이미 어떤 순환 속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우리는 정말로 어제의 연속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매번 리셋된 채 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