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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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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쳇바퀴처럼 굴러갑니다. 회사 집 가끔 친구들이랑 놀고 회사 집 회사 집…
이를 정상성이라고 생각하며 이 굴레를 짊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갖지 못해 소외된 이들 역시 존재하죠. 물론 소설에서는 소외된 인물들에게 집중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굴레를 짊진 이들을 조명하죠. 그들은 죽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기를 택했기 때문에 굴레를 짊진 겁니다. 이 상호보완적인 아이러니함은 이 구조를 톺아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요. 개인적으로는 살아가는 데 있어 자격이 있을 뿐, 이유를 붙여선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찌되었건 살아가기 위해 이유라도 붙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무엇이든 간에요. 그리고 이는 사람이 가진 삶에 대한 의지가 텅 비어버린 상태임을 시사합니다. 다만 소설은 이렇게 소외된 이들과 소외되지 않은 이들로 양분된 세계를 그리지는 않습니다. 되려 운명, 그리스 시학의 영역으로 발을 뻗습니다. 그것을 작가님은 운명이 사라진 문명이라고 일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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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이들이 있습니다. 멀리는 오이디푸스부터 셰익스피어의 사대비극 등, 이런 비극들은 인간적인 삶에 대해 고찰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그리고 받아들일 때까지 깨달음을 유예합니다. 그렇다면 박윤윤님의 소설 「운명이 사라진 문명」은 어떤 깨달음을 유예할까요.
소설에서 비극적인 면은, 단편소설의 구조적인 반전을 내포합니다. 즉 쳇바퀴에 짓눌려 살아가는 삶이 사실은 자신이 선택한 생의 의지였다는 것을, 단지 멸망을 유예하고자 선택한 방법이 비극적 대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반전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 삶의 유예를 집행하는 것이 운명의 세자매인 점에서 그리스 신화적인 성격을 취합니다. 우리는 삶을 선택하지만, 정작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삶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처럼 삶은 끝없이 튀기고 떨어지고 튕겨올라가지만, 그럼에도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소설은 그 의지라는 것의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모형수조에서 살아가게 된 이들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삶의 윤회에서 고통 받습니다. 추앙받고 숭배받기를 원했던 이들은 결국, 추앙하고 숭배해야만 하는 이들로 영락합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이 파국에 이를 것임을 소설은 나직히 암시합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소설에서는 어떤 깨달음을 유예할까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선택이 가치 없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으로 하여금 변화하는 것은 자신 뿐이라는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이윽고 진정으로 변화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일 것입니다.
너무 회의적인 이야기일까요? 하지만 그럼으로써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선택에 너무 의미부여를 하지는 말 것. 그리고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변적인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부터 용기를 얻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매몰되어 제대로 앞을 볼 수 없는 이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남용하다간 파국에 이르겠으나, 오히려 지나치게 소외함으로써 나아갈 용기를 잃게 되는 이들. 그런 것들을 이야기해볼 수 있겠죠.
그리고 문명을 이어받을 다음 세대는, 우리들의 광오함을 타산지석 삼을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것은 없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지켜보며 삶에 대해 노래할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