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거의 다 스포일러입니다.
아주 먼 옛날까지는 아니고 대략 2주 전쯤, 신들이 살아있던 시절의 일이다.1
[태양신의 골렘]에서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수신(水神)의 일식]에서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지켜보는 것은 마치 평범한 가족의 코믹한 일요일 오후를 엿보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우주의 근원적 질문들을 마주하는 경험이다. 신화 덕후인 필자를 이렇게 첫문장부터 단번에 꽂히게 한 ‘창작’신화는 처음이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신화’라는 장엄한 틀 안에 지극히 인간적인, 아니 지극히 ‘가족적인’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점이다.
창조주 에레수드라는 골방에서 강냉이를 먹으며 티비를 보고, 딸 에라기딘에게 쫓겨 허둥지둥 방을 치우며, 아들 바슈파흐의 말썽에 골머리를 앓는다. 이것은 제우스의 위엄도, 오딘의 지혜도 아닌, 그저 어느 집에나 있는, ‘휴일의 아빠’의 모습이다.
“십 구 팔 칠 육..”
“너무 빨라. 너무 빠르다고.”
이 장면에서 누구라도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인간도 만들어 낸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딸의 카운트다운에 쫓겨 방의 시간을 되감는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어딘가 애잔하다. 에레수드라가 “내가 말했다가 에라기딘에게 두들겨 맞을 일 있냐?”며 역시 딸이 화내는건 아빠도 무서웠다 아들 바슈파흐를 앞세우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건 신화가 아니라 가족 코미디다.
[태양신의 골렘]에서 자신이 만든 골렘 ‘눔’을 파괴한 태양신 바슈파흐. 그는 자신이 아버지 에레수드라보다 나은 피조물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한 신이었다. 그러나 [수신의 일식]은 그 오만의 ‘사후처리’ 과정을 다룬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누나인 물의 신 에라기딘의 분노다. 그녀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단순히 바슈파흐가 창조의 금기를 어겼기 때문만이 아니다. “금지된 창조를 하고 그걸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해버리는 바슈파흐의 태도”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인간적인, 아니 매우 ‘누나다운’ 분노다. 동생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분노.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며 모든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목도하는 물의 신으로서, 생명을 함부로 다룬 동생에 대한 분노.
그리고 막내 데헤못의 역할이 빛을 발한다. 그는 형 바슈파흐에게 누나 에라기딘의 입장을 설명한다. 어떻게 막내가 제일 어른스럽냐
“형님이 그걸 잘했다고 여기시지 않는 건 압니다. 그러니 그 잘못을 잊지 않으려고 밤하늘의 태양으로 골렘을 수놓은 것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잘했다고 여기지 않는 것과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누이는 그 점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녀의 눈에는 함부로 생명을 만들고, 그것을 부순 형님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무책임하고 오만해 보이는 것입니다.”
데헤못의 이 설명은 단순한 설득이 아니라, 형제자매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바슈파흐는 자신의 ‘태도’가 문제였다는 것을, 자신이 여전히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태양신의 골렘]에서 ‘눔’은 사명을 찾지 못한 채 파괴되었다. 그러나 [수신의 일식]에서 눔은 달이 되어,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에라기딘에게 꿈속에서 말을 건다. 창조물이 신들보다 더 신 같다
“당신께서 내게 사명을 찾지 말라고 말씀하셔놓고 자신의 사명에 갇혀 계시면 어찌하나이까?”
“저는 당신의 물 속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마침내 사명 없는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명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눔이, 이제는 에라기딘에게 ‘동생을 벌해야 한다는 사명’에서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당신을 가장 먼저 아끼셔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고귀하신 물이여. 가장 먼저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눔은 파괴되고 나서야 완성되었다. 에레수드라가 말했듯 “사명은 오직 파괴 뒤에야 생겨날 수 있는” 것이었다. 눔의 사명은 신들에게 올바른 사랑, 창조의 무게, 용서의 의미를 전하는 것이었다.
에레수드라가 아들 바슈파흐를 직접 벌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 역시 같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에레수드라는 인간을 만들고,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인간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창조를 금지하고, 스스로를 유폐했다.
그런 절차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에레수드라에게는 약간의 동정심도 있었다. 그것은 창조를 경험한 자들만이 공유하는 애수 같은 것이었다. 에레수드라는 자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대신 창조를 금지하고 스스로를 유폐했다.
‘창조를 경험한 자들만이 공유하는 애수 같은 것’. 이것이 에레수드라가 바슈파흐를 이해하는 이유다.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벌하기보다는, 아들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그리고 실제로 바슈파흐는 깨닫는다. 데헤못의 말을 통해, 그리고 에라기딘이 기절했다고 생각했을 때의 두려움을 통해.
…물론 이때조차도 코믹함을 잃지 않는다.
“에라기딘, 제기랄, 정신 좀 차려봐! 시체처럼 흐느적거리지 말고!”
바슈파흐는 에라기딘을 부여잡고 마구 흔들었다. 바슈파흐가 자책의 말을 마구 쏟아냈다.
“내 잘못이다! 내가 함부로 창조를 하지만 않았어도, 데헤못의 말을 조금만 더 일찍 들었어도! 달을 움직여 태양을 가리는 무모한 짓을 하니 힘이 다해서 기절할 수 밖에, 일어나봐, 젠장, 에라기딘, 누나!”
에라기딘은 이미 정신이 들었지만, 바슈파흐가 어디까지 말하나 보려고 잠깐 더 호흡을 멈추고 깊은 잠에 빠진 척하기로 했다. 바슈파흐는 이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누나, 누나, 제발 일어나봐. 일어나서 나 벌 줘야지. 응? 그래야지.”
“무슨 벌 받을래?”
“으아악!”
눈물을 흘리며 누나를 흔드는 바슈파흐의 모습에서, 우리는 오만한 태양신이 아니라 누나를 걱정하는 동생을 본다. 근데 이런 동생이 있는 집이 있나…
이 소설이 탁월한 이유는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무겁지 않다는 점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인간들이 발명한 강냉이나 털어먹으며 발가락으로 리모콘을 조작해 티비를 보는 에레수드라, 에라기딘이 기절한 척하며 바슈파흐의 반응을 살피는 장면, “으아악!” 하고 놀라 넘어지는 바슈파흐, “키득거리며” 말하는 에라기딘. 이런 장면들은 완벽한 코미디 타이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소설은 가볍지만은 않다. 창조의 의미, 사명의 부재와 인식, 용서와 화해, 올바른 자기애와 가족애.
에레수드라가 장기판 앞에서 “이래도 외통, 저래도 외통이면 무승부지 뭐”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은, 삶의 모든 선택이 결국 어떤 결말로 향하는 외통수라는 것을, 그렇다면 승부를 가리거나 의미를 억지로 찾기보다는 그냥 살아가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달빛이 그의 방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골렘 눔은 파괴되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달이 되어 밤하늘에서 빛나며, 에레수드라의 방을, 세상을 비춘다.
[수신의 일식]은 신화이면서 가족 드라마고, 코미디이면서 철학이며, 판타지이면서 일상이다. [태양신의 골렘]에서 “아주 먼 옛날까지는 아니고 대략 2주 전쯤”이라며 시작하던 것처럼, 이 이야기는 신화적 심오함과 철학, 일상적 친밀감과 코믹을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실수를 저지르고, 때로는 오만하며, 가족에게 상처를 준다. 신들도 그렇게 산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우리도 눔의 달빛처럼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사명 같은 거 없으면 또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