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독에 주의를 바랍니다.
1.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혼미할 정도로 선연한 열기가 사람을 관통하는 계절입니다. 이런 더위는 견디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것만 같습니다. 작품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어렴풋이 무언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징합니다.
소설의 구조는 시점이 자주 뒤바뀌어 혼란스러움이 다소 있습니다. 다만 정보량을 제한하는 방식과 인물의 시점에 따른 정보가 다소 파편화되어 전개하고자 하는 저자 분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호러라는 장르에서 정보의 제한은 긴장을 유발시켜 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지만, 그 제한을 해제하고 정보의 결말이 나올 때 긴장이 해소됩니다. 이러한 연유로 작품은 정보를 의도적으로 제한해 긴장을 일으키고, 결말에 이르러 그것을 해소시키고자 합니다. 저는 이 구조를 서스펜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구조는 이런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다층적인 시선을 보여줍니다. 이 시선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화자가 어릴 적 자신의 가족이 어떠한 경위로 실종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자신이 오든지 말든 지라고 뇌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화자의 무구하면서도 죄책감이 반영된 기억이었음을 짐작게 합니다. 가족의 이름은 경순이인듯 합니다.
이어 아버지는 동생을 찾기 위해 헤매다가 자신도 실종됩니다. 화자는 언젠가의 기억 속에서 파출소에서 나온 어머니와 거리를 걷다가 ‘누군가’를 만납니다. 이 누군가는 정황상 아버지인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로 가까이 가려 하지만 어머니가 막아섭니다. 어머니는 자세히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에 누군가 있냐고, 정말로 그곳에 있는 게 맞냐고.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말하게 되죠. 거기엔 아무도 없다고요.
마지막으로 요양원에서 어머니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본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리고 그곳에 아무도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정황상 어머니는 그곳에 발 디딘 듯싶습니다. 그리고 이 실종이 이야기의 근본된 갈등이 됩니다.
떠나가 버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마도 ‘그곳’입니다.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 나의 시점에서, 위의 정보들은 파편화되어서 뿌려집니다. 직관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지만, 끝내는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요. 그 과정에서 상처 난 관계성이 형성되었음을 작가는 지속해서 이야기합니다. 나와 어머니와 아내와 딸의 관계는 그곳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말미암아 비극으로 전락합니다. 이 관계는, 특히 화자와 딸의 관계는 작 중 내내 쉬이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할머니)가 실종된 후 화자는 딸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말합니다. 근데 그게 정말 괜찮은 걸까요? 이 괜찮음의 레이어는 작가가 안배한 시간의 파편에 맞춰 균열을 일으키고 천천히 붕괴합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그곳’을 공유한 순간에야 관계는 비로소 회복됩니다. 이 공유는 일종의 연대입니다. 누군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무기력하게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슬픔을 잇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결말에 이르러 화자는 비로소 말합니다. 죽을 것 같다고.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다고.
2.
아지랑이 데이즈는 오타쿠라면 한번 쯤 들어봤을, 진p의 보컬로이드 오리지널 노래입니다. 노래의 내용은 루프에 빠져 죽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해 죽고, 그렇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위해 또 대신 죽으려고 하는, 그런 곡입니다. 즉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내용으로 해석됩니다. 이 상실의 구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잠깐 언급해 보았습니다.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자신의 마음 어딘가에 균열이 나는 일입니다. 특히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치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실종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시간에 따라 생존의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끝내는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일일 터입니다. 그 과정은 심장이 미어지도록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여름의 더위는 생존에 있어서 일종의 유예처럼 작동합니다. 땡볕 더위에서 헤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치매로 인하여 사리 판단이 온전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런 시간제한이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일월명 작가님의 골목 저편은 체념의 정서를 가진 수동적인 성격입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보편적인 이야기성을 갖기도 합니다. 죽은 이를 대신해 자기가 죽을 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 결론이 지어진 것을 번복할 권능은 인간에게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소설은 평범한 인간의 상실에 대해 말합니다. 서서히 부서져 가는, 체념할 수밖에 없는 모래성 같은 상실을요. 그런데 이 상실이 실체를 가지고 나타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 그곳의 존재는 무척이나 유혹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떠나보낸, 생사를 알 수 없던 이들을 다시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곳’에 간다면 정말로 잃어버렸던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 함께하며 환상을 누릴 수 있는 걸까요? 허나 ‘그곳’은 결국 또 하나의 상실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마주 보아야 할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화자는 딸을 찾기 위해 그곳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딸을 찾아서 돌아서며 말합니다. 이곳에 두 번 다시 들어와선 안 된다고. 두 번 다신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여기서 보이는 것의 불명확함이 호러로써의 기준을 세웁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현실을 침식하고 비틀 때 공포는 발생합니다. 골목 저편이란 표현은 결국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분리하며, 분리해야 함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체념적 정서에서 기인합니다. 그곳으로 갈 수 있으나 가서는 안 되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여름 더위 아래 그들은 마치 아지랑이 같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있음 자체가 위안이 될 수 없으니, 골목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무언가는 그저 바라온 형상만을 취해 우리를 유혹할 따름일까요.
하지만 산자를 위해 용기 내는 아버지이기에, 이 소설은 상실한 자들의 연대를 이야기합니다. 죽은 이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일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체념 이외의 것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함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잃은 경험은 끝내 체념으로 남아 마지막을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집니다.
끝에 이르러 화자와 딸은 경험을 공유하고 관계를 회복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호러로서 가진 진가는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곳에서 빠져나왔다고 한들, 부녀에게는 그곳은 여전히 범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듯 서 있을 겁니다. 또는 어머니 같은 이유로 그곳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상실을 경험한 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골목 저편이 그들로부터 우리에게로 확장됩니다. 떠나간 이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모두 같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을 소설은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어릴 적의 나는 아버지의 잔상을 보고도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딸과의 만남에서는 그곳에 명징하게 존재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기에 골목 저편과 이곳을 구분하여,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실을 거쳐 체념하고 도망쳐온 이들이 비단 나뿐만은 아니라고. 사실은 체념하고 있었을 뿐 진정으로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고. 단지 그저 삭혀왔을 뿐이라고. 그래서 너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마음의 상처는 쉬이 낫기 어려우니, 낫는 것을 기다리는 것 대신에 참고 나아가는 것이겠죠.
3.
결론적으로 일월명 작가님의 골목 저편은 상실의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침식함으로써 호러로의 장르를 가져갑니다. 그러면서도 상실을 겪은 이들을 어설프게 위로하는 것이 아닌, 바로 보게 하는 방식으로 유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연대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서스펜스와 다층적인 시점의 변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전개해 나갑니다. 누군가를 잃어버렸다는 경험에서 시작된 서늘한 호러 작품 골목 저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