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믹 호러 업계 표준 감상

대상작품: 백색벌레 (작가: 김병식, 작품정보)
리뷰어: 녹음익, 2월 15일, 조회 40

코스믹 호러는 보통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우주적 거대함에서 오는 공포를 다룬다고 이야기되지만 이 장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설명만으로는 대개 감을 잡기 쉽지 않다. ‘우주적 거대함’이라는 것이 단순히 부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물리적 힘이나 초자연적 권능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특히미지라는 속성 또한 이야기가 성립하는 데 몹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개념이 이야기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전달하기 위해 개별 사례들을 거론하게 되는데, 대부분이 크툴루 신화의 영향에 강하든 약하든 결속된 이유로 해설이 더 복잡해지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김병식 작가의 단편소설 「백색 벌레」는 작품 자체가 가지는 재미에 더해크툴루 신화에 기반한 고풍스러운 코스믹 호러’라는 세부 장르의 범례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는, 메타적인 차원의 유용함 또한 지니고 있다. (브릿G에 공개된) ‘정석적인 러브크래프트 호러를 지향했다는 작가의 작품 소개처럼, 본 단편은 미국 소설가 H. P. 러브크래프트와 그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주로 다루었던 크툴루 신화 계통 코스믹 호러의 고전적인 외양을 두르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평범한 화자가 각종의 불길한 흔적들을 더듬어 가다가 감당하기 힘든 무언가를 마주치고 어떻게 되어 버린다는 아주 전통적인 뼈대 안에서도 러브크래프트풍의 코스믹 호러가 현재까지 발전시켜 온 여러 소재와 장치들을 다양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흥미롭고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창작해 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본 단편이 제목부터 크툴루 신화에 대해 어느 정도 알지 않으면 정확한 의미를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장르에 깊이 발을 담근 이야기면서도, 그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독자들도 부담을 덜 느끼며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문명과 비문명의 대비, 고대의 악과 연관된 야만적인 신흥 종교, 신앙적 위기, 마법과 마도서, 지구 바깥에 대한 암시, 과학이 밝혀낸 지구의 계통수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괴한 생명체, 비밀스러운 언어, 강대한 자연의 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종교적 복식과 의례에 대한 이미지 등등 코스믹 호러 장르에서 수없이 검증되어 온 갖가지 모티프를 알뜰하게 긁어 활용하면서도 그것들을 장르 독자만 해석할 수 있는 기호로 낭비하지 않고 고유한 서사적 효과를 자아내기 위한 장치로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장르를 알든 모르든 유사한 효과를 내도록 안배했다. 짧은 길이의 이야기 안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와 자기 할 역할을 말끔하게 수행하고 들어가는 소재들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틈을 주지 않으며, 장르에 익숙한 독자라면 각각의 소재가 대충 어떤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을지를 짚어 내며 즐거워하는 재미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등장하는 이야기의 핵심 소재인백색 벌레또한 효과적으로 선정되고 활용되었다. 장르 독자에게, 제목이자 주요 소재인 백색 벌레는 크툴루 신화 내의 (조금은 마이너한) 거대 괴수 캐릭터인 르림 샤이코스를 의미한다. 처음 등장하는 소설의 제목부터백색 벌레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본 캐릭터는 피눈물을 흘리는 거대한 흰색 애벌레같이 생긴 외계 괴물로, 둥지로 삼는 이동형 거대 빙산을 타고 다니면서 횃불로도 몰아낼 수 없는 냉기로 온갖 것을 냉각해 인류를 괴롭히는 강대하고 사악한 존재이다. 하지만 본 단편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독자들이 결말을 읽기 전까지 이하얀 벌레라는 것을 일종의 작은 기생충처럼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비버 전쟁기의 신대륙 삼림이라는 야생적인 배경에서부터, 서서히 미쳐 가는 탐사대의 묘사나머릿속에 백색 벌레가 기어다녔던’, ‘팔다리를 벅벅거리며’, ‘이성을 잡아먹고 저를 먹어 치우고 있다와 같은 서술들을 통해 이야기는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 동안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몸속 기생충을 떠올릴 법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한다. 그에 따라 연가시라든가, 톡소플라스마, 창형흡충 같은 인체 내부의 작은 존재를 상상했을 독자는 작품 말미에 급작스럽게 등장하는 거대하고 기괴한 빙산의 묘사와 내부의 만찬장, 심연 속에서 기어 나오는 피눈물 흘리는 흰색 벌레라는 생경한 이미지를 마주하면서 예측대로 끝나지 않는 결말이 주는 급격한 격차에 노출되게 된다.

본 단편 「백색 벌레」는 이와 같은 고안을 통해 여러 층위의 독자들이 골고루 즐길 수 있는 다층적인 재미를 제공하면서도 소재와 플롯 양면으로 매우전통적인크툴루 신화 서사의 외양을 가졌기에, 근래 들어 매뉴얼괴담이나 SCP재단 등의 화소와도 결합하며 고도로 맥락화된 코스믹 호러 장르, 혹은 크툴루 신화 장르에 새롭게 진입하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표준으로서 추천하기에 좋은 소설이다. 크툴루 신화에는 관심이 있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읽기 지루하다는 의견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러한 장르적으로도 영리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의 존재는 코스믹 호러 장르를 향유하는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에게 두루두루 실용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싶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