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를 적절하게 쓰는 법 – 진실게임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진실게임 (작가: 마녀왕, 작품정보)
리뷰어: dorothy, 17년 8월, 조회 144

. 지극히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제는 일종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마왕과 용사의 비틀린 관계. 허나 나는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이름만으로도 느껴지는 무시무시함과 예스러운 분위기가 나를 잡아끌었다고 하는 게 옳겠다. 동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이야깃감이 비교적 쉽게 만들어지는, 이를테면 일종의 필승 카드인 것이다.

분명 흥행할 가능성이 높은 카드를 사용했건만, 같은 소재를 가진 다른 작품들에 비해 ‘완전히 좋은’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 설득력 없는 이야기

(전략)

서로에 대한 불신을 이겨내고 조직된 인간, 요정, 그리고 난쟁이 연합군은 결사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항전이지, 사실상 무차별 학살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던져 만들어 준 틈을 이용해 자신은 마왕의 문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선 인간뿐 아니라 난쟁이와 요정이 합세해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결사 항전을 벌인다. 그러나 그들의 표면적인 목적은 바로 인간 세계의 공주를 구하는 것이다.

타 종족의 공주를 구하기 위해 오랜 세월 쌓인 불신마저 이겨내고 자기 종족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 이는 마왕의 설명이 진실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하는 게 아닌가? 작가가 <진실게임>이라는 제목에서 의도한 것은, 독자로 하여금 끝까지 읽은 뒤에도 마왕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없게 하는 것이리라. 독자는 이 글을 읽음으로써 게임의 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개연성과 설득력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마왕의 말이 진실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듯하다.

 

둘. 너무 쉬운 상대, 용사

부끄러웠다. 어쩌면 세계의 모든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르는 순간에 머뭇거리는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용사는 자신의 갑옷과 투구를 세차게 두들기며 전의를 다지곤 문을 있는 힘껏 밀었다.

인간이기에 분명 두려움은 느낄 수 있다. 마왕은 명실공히 최악의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문을 열기 전 전의를 다진 것이 무색하게도, 공격하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마왕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두 대답을 해주는가 하면, 술잔을 ‘정중히’ 거절하기까지 한다. 도대체 얜 싸우겠다고 온 거야, 아니면 협상하러 온 거야?

방금까지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 자는 온데간데 없고, 술잔을 권하는 마왕의 태도에 마음이 풀리기라도 했는지 그저 책임감이 부족한건지 아니면 그냥 호구인건지 모를 무장한 농부의 아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목적의식은 옅고, 주교의 충고를 떠올리면서도 ‘별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 같진 않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며 마왕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찌질한 용사 캐릭터를 만들기로 한 것이라면, 작가는 성공한 듯하다. 옛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멋지게 공주를 구해내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만, 공주가 죽은 것을 발견한 후 밀려드는 생각이 단지 그것 뿐이라니. –용사는 그제서야 마왕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자신이 꿈꾸던 행복한 여생이 망가졌다는 분노 때문일까? 모를 일이다.- 목숨을 바쳐 그를 마왕 앞까지 보내준 인간-요정-난쟁이 연합군의 희생보다도, 용사에게는 그게 먼저였던 것이다. <공주를 구해낸 용사>의 타이틀, 그리고 행복한 여생! 아, 이 속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허세마저 가득한 용사. 당장이라도 마왕을 죽여버릴 것처럼 달려들다 쇠사슬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하는 주제에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어차피 네놈은 곧 죽을 목숨. 잠깐이나마 변명할 기회를 주지.”

잠깐, 마왕이 용사를 묶은 게 아니었어?

“우리 마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하지만 그건 오해다. 우리들은 이성적이고 탐구적인 존재지. 그 때문에 신과 멀어지게 되었고, 너희의 사제들은 우리가 타락했다 생각한 것이지.”

어머나, 세상에. 너희 지금 뭐하니?

명백히 우위가 바뀐 것 같은 대화. 묶여있으면서도 당당한 용사와 묶어놓고도 저자세를 취하는 마왕이라니. 아무리 대화를 원한다 해도, 이정도 물렁한 마왕이 악을 대표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마왕의 말이 사실이라 하여도, 타 종족에 의해 세계 최강, 최악의 존재라고도 불리는 게 딱 이정도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니.

심지어 마왕이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용사의 멘탈은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쉽게 휘말려, 쉽게 배신감을 느끼고, 힘이 빠지고 갈증을 느끼며,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심지어

“제기랄. 신마저도 너희를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희를 구하지?”

벌써 마족을 구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다 필요 없어! 용사고 뭐고 필요 없다고!”

 

셋, 게임이라기엔 너무 간곡해보이잖아요 마왕님

마왕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 요정, 인간, 난쟁이 연합군은 사실 마족이 가진 마석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다.

. 왕은 마석을 얻기 위해 공주를 자발적으로 마족에게 넘겨주고는 ‘공주를 구출하라’는 명분을 세운 것이다.

. 인간이 믿는 신은 자신을 믿지 않는 마족을 인간의 왕이 내세운 명분과 연합군을 이용해 죽이려 한다.

 

이해관계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지만, 그렇다기엔 마왕과 용사 사이의 흐름이 조금 이상하다. 연합군은 마족에게 학살당하고 있지만, 마왕은 용사가 원하기만 한다면 목을 내어줄것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종족을 무고하다 말하며 저자세로 용사를 설득하려고까지 한 자다. 이기고 있는 싸움은 버려두고 종족의 미래를 위해 정말로 목을 내어줄 심산인 걸까? 아니면 단지 잠깐의 여흥인 것일까? 이건 마왕의 의도일까, 아니면 작가의 설정오류인가?

 

 

좋아하는 장르이기에 취향과는 다른 캐릭터들의 등장에 약간의 실망감이 들어 더 날이 선 감도 없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이 작가의 발전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있는 독자 중 하나이다. 후려치는걸 좋아한다고 하시니, 앞으로도 조공으로 후려쳐드리겠습니다 자까님!

하지만 한솔같은 작품을 다시 쓰면 영영 구독을 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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