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것이 최선책이라던 해류는 림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내 자신이 죽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중얼거렸다. – <본문 P7>
‘좀비’라는 소재가 응용되는 요즘 작품들을 보면, 저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합니다.
첫째, 좀비가 쓰러뜨려야할 장애물로 등장하는 경우
둘째, 좀비가 쓰러뜨릴 수 없는 장애물로 등장하는 경우
어느 쪽이든, 재난물에서 ‘좀비’는 기존에 살고 있던 세상의 파괴로 정의됩니다. 우리가 익숙하던 환경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점점 좁아져가는 세상을 실감하며 흐트러지는 사람들을 감상하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번에 감상한 <return>이라는 작품은 ‘좀비’를 쓰러뜨릴 수 없는 장애물로 규정함과 동시에, ‘쓰러뜨리고 싶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는 맺음을 선보인 것으로 커다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의 매력을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까 합니다.
1) 『퀴어적 인물들』
‘동성애’를 표방하는 인물들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면,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사건들에 눈길을 둘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관습적으로 묘사되는 연인관계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줍니다. 비록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사고를 보여준다고 한들, 그들을 묶어주는 힘이 조금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그들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를 아껴준다는 것을 묘사하더라도, 결국 제3자는 그들이 사랑하는 이유를 더 까다롭게 살펴본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림’과 ‘류’는 그런 퀴어적 관계로 묶여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널 사랑해’라는 고백에 가까운 대사를 주고받는 것은 아니지만, 좀비가 들끓는 세상에 놓인 두 사람의 모습은 틀림없는 신뢰 이상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P57). “죽지 직전 날에 너랑 바다에 갈래, 그리고 소리쳐야지. 여기가 천국이라고.”
해당 대사는 그들이 이 비참한 상황을 단단하게 부여잡아주는 한마디가 됩니다. 어쩌면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듯한 세상에서, 오로지 ‘너’라는 존재와 함께 천국에 다다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모습은, 마치 죽는 날까지 함께 있고 싶다는 고백에 가깝게 다가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두 사람이 ‘남자’라는 것에서 더 의미가 크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2) 『두 사람을 만든 세상』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사람이 사는 세상이 재난으로 무척 좁아졌지만, 그 때문에 허락되는 모종의 관계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성애는 금기의 산물입니다. 그것을 일반적인 상황으로 규정하는 여느 작품들을 제외하면, 그 동성애라는 포인트는 인간에게 허락될 수 없는 금기에 가깝죠.
(P63). …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는 세상이 재앙일 수 있니. 남자와 남자가 사랑을 한다는데 더 자유로웠니. 분명… (이하생략)
방금 대사를 보면, 화자 또한 그 금기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퍼붓는 사람들 대신, 세상에는 좀비라는 형태만 갖춘 재난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멸망에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관계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이 사라진 셈입니다.
(P161). … 한림은 해류에게로 달려간다. 해류의 팔과 목을 뜯고 해류는 고통스러움에 발버둥치면서도 한림을 안으려한다. 안겨 물어 뜯긴다.
마지막 장면은 그들의 세상을 마무리하는 순간을 묘사합니다. 이미 거처에 머무를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망가진 참에, 주인공에게 다가온 것은 좀비가 된 옛 연인의 모습입니다. 최선책도 천국, 차선책도 천국이 될 것이라며 되뇌던 이에게, 이 순간은 그 모든 바람을 놓아줘야하는 순간으로도 다가옵니다. 결국 주인공이 선택한 것은 마지막 순간을 그와 함께 하는 ‘천국’으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저로서는 이 두 사람의 취향을 따지기보다는, 이 두 사람을 한 데 묶어놓을 수밖에 없던 환경을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이 세상이 평화로웠다면? 평범한 인간들이 평범하게 거리를 쏘다니는 풍경이 일상이었다면? 정말 이 두 사람은 지금처럼 서로를 자신의 세상으로 규정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여백에 담기지 않은 추측에 불과하겠습니다.
인상 깊은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집필 활동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