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어떤 분야에 굉장히 탁월한 사람을 보면 질투를 넘어 감탄하곤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잘하지? 물론 그 사람이라고 태어나서부터 능력을 깨우치거나 처음 그 분야를 배웠을 때 가르치지 않은 것까지 이해하지 않았을 테고, 무수히 많은 시간을 들여 실력을 갈고 닦았겠지만, 그 결과물만을 볼 수 있는 저는 무심코 바라고 맙니다.
그냥 저 사람을 집어삼키고 싶다고.
마치 유명한 게임 속 머리에 손발이 달린 분홍색 피부의 귀여운 외계인처럼요. 물론 그런다고 제 모습이 변하거나 그 사람의 능력을 쓸 수 없단 걸 아는데도 말이죠!
먹방은 한국에서 처음 시작해서 다른 언어권에서도 먹방이라고 부르고, 한국인만큼 끼니를 중시하는 곳은 드물다고 자랑하는 만큼 걸신 들린 한국인은 서사적으로 굉장히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식욕은 수면욕, 배설욕과 함께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니 죽은 사람이 공격하는 것보다 직관적이고요! 이 작품을 보고 나서야 왜 살아있지도 않은 존재들이 그리 먹으려 애썼나 싶은데, 이건 다른 작품에서 각자 설명하겠지요.
뇌는 외로움을 신체적 통증과 같은 부위에서 처리한다고 들었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할 때,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무작정 낱개 포장된 과자를 포장지가 수북해지도록 먹어 본 적 있는 저는 비슷한 논리로 그게 안정의 결핍을 물리적으로 채우려는 의도라고 여겼는데,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그것도 외로워서가 아니었을까 싶어졌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어려워서 제시간에 못 해낼까 봐 불안하다고 터놓고 얘기 나눌 사람이 없어서요. 어쩌면 사회적 공동체가 잘 되어 있는 곳일수록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재산의 규모가 적어진다는 게 이런 의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로움을 음식이나 물건으로 채우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그래서 누나가 팔을 먹길 원한 이유가 밝혀졌을 때, 우린 참 외로웠구나 실감했습니다. 따듯한 포옹은커녕 안부를 나누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고요. 손가락만 토독토독 화면을 두드리면 되는데, 그 작은 방해마저도 못 견딜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역시 망설이게 됩니다만, 통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남이 말을 걸어 주길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무수한 혼자들의 세상에서 함께 있어 주겠다는 문장이 원망스럽고도 반가웠습니다. 내일은 할 일도 많고 기운 빠지고 허무하니 포기하면 편해질 텐데, 그래도 다들 이런 작은 말들을 동앗줄 삼아 오늘 하루를 견디는 거겠죠.
그렇게 계속 견뎌내서, 언젠가의 오늘엔 우리가 조금 더 서로를 안아줄 수 있길 바라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