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의 스포일러 부분은 소설의 후반부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을 먼저 보시고 읽는 것을 권합니다.
※ 본 리뷰에서 다룬 본작에 대한 해석은 리뷰어의 주관적 해석이고, 작가님의 공식 해석은 아닙니다.
모든 글을 다 읽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고 추천 목록에 뜨는 것을 보고 저장해두었다가도 연재중인 장편이어서 선뜻 시작하기에는 따라가다 버거울까봐 망설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본작도 그 중 하나였는데, 완결이 되었고 장편치고는 길지 않은 분량이어서 시도해볼까 하던차에, 바쁘던 일정이 잠시 끝나고 온전히 주말을 보내는 어제, 오늘 단숨에 읽고 여운이 남은 상태로 리뷰를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소개팅으로 시작하는 작품을 보고 일상적인 느낌으로 들어갔다가 서서히 이게 아니구나 싶어 태도를 고쳐야 했습니다. 작품은 명료한 메시지를 위해 불필요한 설명은 접어 버리고, 손가락을 보고 있던 저에게 달을 좀 보라고 호소합니다. 본작 ‘바통’은 분명히 시간여행 스릴러로 읽히지만, 기억과 자기동일성에 관한 철학적 사유가 그 중심에 있는, 기억을 매개체로 하는 철학적 소설이었습니다.
1. TBTT, ‘바통’이라 불리는 물건
‘바통’은 표면적으로는 시간여행 서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상은 “육체 이동”이 아니라 “정신 점유”라는 규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통의 사용자는 바통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매일 동일한 시간, 동일한 사고패턴을 유지해야 합니다. 바통을 쥔 사람은 과거의 자신의 몸에 들어가 주도권을 빌리고, 그 순간의 ‘나’를 점유합니다. 즉, 바통은 시간선 자체를 건드리는 기계가 아니라, 기억과 의식을 ‘좌표화’해서 이를 점유하는 장치입니다.
은수를 통해 ‘바통’의 규칙이 설명되고 바통이 주인공 연재에게로 넘어올 때만해도 과거의 나에게 수차례 개입하여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스펙타클한 모험기가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주인공의 일상을 끌어내리고, ‘나’라는 존재에 대해 침음하게 합니다. ‘바통’의 설정은 단순한 시간여행의 파라독스 대신, “자기 자신을 침범하는 경험”을 전면에 부각시킵니다. 바통은 결국 기억을 반복하고, 자기 동일성을 점검하며, 나 자신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장치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 연재에게 바통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요.
작중 주인공 연재는 바통을 통한 시간여행은 딱 한번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딱 한번 시간여행을 한 날, 저녁에 인도로 수행을 떠나는 친한 친구에게 바통을 빌려주는 행동을 해버립니다. 작품은 해당 회차의 말미에 새로운 존재를 등장시켜 긴장감을 훅 불어넣었지만, 그보다도 전 바통을 친구에게 별 것 아니라는 듯 빌려주는 주인공의 행동에 두 눈을 의심하고 “?!”라는 댓글도 달았습니다. 연재가 친구 신영에게 바통을 빌려주는 회차를 읽을 때만 해도, 타임리프를 가능하게 하는 아이템을 빌려주는 주인공의 행동에 당황하여 한 반응이었지만, 사건이 진행되고 바통이 가지는 의미가 점점 더 부각되면서 나중에는 이 행동의 심각성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은수는 연재에게 바통을 건네줄 때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바통’을 쥐고 있는 사람만이 그 몸의 주인이야.”, “바통은 사고패턴이야. 절대 놓치면 안 돼.”
바통은 자기 동일성을 지켜주는 생명선과 같은 것인데, 연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를 신영에게 건냅니다. 자기 존재의 핵심을 경솔하게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연재는 자기 동일성에 대한 무지와 방심을 드러냅니다.
연재가 신영에게 바통을 빌려주고 나서부터 연재의 일상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나’들이 하나 둘 등장하면서, 연재는 또 다른 ‘나’에 의해 ‘나’의 일상이 침범당하고, 서서히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갑니다. 사회적으로도, 심지어 연인에게서도 또 다른 ‘나’에 의해 대체될 위기에 처해질 무렵, 연재는 각성하고 또 다른 ‘나’들을 정리해버립니다.
그리고, 연재가 또 다른 ‘나’들을 정리한 작품의 말미가 되어서야, 바통은 연재에게 돌아옵니다. 바통의 부재 기간동안 연재는 자기동일성에 관하여 위기를 겪었고, 자신의 분열체들을 제거하고서야 바통이 손에 들어옵니다. 역설적으로 자기 존재의 주도권을 상징하는 바통이 없이도 연재는 자기 자신들과 사투를 벌여 살아남았지만, 이미 바통을 들고 생존을 위해 트랙 위를 달리고 있는 이상 바통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편, 신영은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삶에 큰 상실과 공허를 안고 있는 인물입니다. 연재는 그런 신영에게 바통을 넘겨주었습니다. 연재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존재의 상징체를 경솔하게 친구에게 잠시 넘겨주었다가 결국 자기 손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돌려받는 것이지만, 신영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내어주는 친구도 있고, 친구가 빌려준 바통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자기 자신의 중심을 찾는 여행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2. 인과율, 트랙, 그리고 견재
연재가 신영에게 바통을 빌려준 날, 연재에게는 또 다른 ‘나’가 찾아오고,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스릴러로 변모합니다. 하지만 이미 더 중요한 사건은 앞서 일어났습니다. 연재는 제대로 그 의미를 몰랐지만, 바로 그 날은 작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통을 사용한 날이기도 합니다. 연재는 과거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 어둠속 트랙을 달리다가 바통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등장한 견재는 어떤 존재인걸까요.
은수의 말에 비추어보면, 현재의 의식이 과거를 점유했다가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트랙으로 복귀하고 의식의 주도권은 과거의 본래 자아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과거의 본래 자아도 트랙 위에서는 자신의 바통이 있었겠지요.
작품의 후반부, 견재는 그동안의 특유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버리고 자신은 트랙에서 달리던 중 바통을 빼앗긴 명백한 피해자라고 호소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일이 없이 조용히 의식은 원상복귀되었어야 한 것 같지만, 연재가 코인거래에 미련을 못 버리고 욕심을 내는 바람에 과거의 연재는 ‘미래로부터의 침범’을 자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은수는 인과율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의 사람을 죽일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현재에 존재하면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인과율의 오류를 연재는 기어이 만들어 내고야 맙니다.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우던 그 날 2025. 6. 10.을 코인이 왕창 오른 날로 표시하며 무난하게 넘겼던 연재와는 다른, 미래에서 온 연재에 의한 인식의 침범을 자각하고 구토에 시달린 또 하나의 연재가 생겼습니다. 원래라면 하나의 의식이 선형적으로 이어져야 할 트랙 위에, 연재의 잘못된 패턴 유지와 주도권 상실로 인해 의식이 이중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중 바통’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견재는 현실에서 이미 과거를 경험한 본체인 연재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인과율은 이를 보정하기 위해서 연재를 아예 찢어버리고 하나를 트랙에서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연재가 처음으로 바통을 사용하고 신영에게 빌려주고 돌아온 그 날, 견재가 연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견재는 2025. 6. 10.부터 존재하였는데 연재 앞에 돌아오기 까지 그 동안 견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견재는 이미 세 번의 분열을 겪었고 또 한번의 분열을 앞두고 연재 앞에 왔을 뿐 다른 설명은 최대한 아낍니다. 또 다른 연재가 버젓히 존재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 동안 충돌하지 않았을까요.
작품에서도 2025. 6. 10. 이후부터 견재가 연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견재의 공백기 4개월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연재의 인식을 반영하듯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작품을 다 읽고도 견재의 공백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완전히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작품이 주는 주제의식에만 몰입하다보니, 이 작품도 엄연히 타임리프물이라는 것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통이 두 개가 되었는데, 과연 트랙은 하나였을까.
견재는 연재를 보자마자 죽이려고 했고, 견재가 연재를 찾아내어 연재의 집에 침입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이는 연재의 시각에서 서술되다보니 그렇지, 견재의 시각에서 다시 보면 견재는 연재를 죽이러 연재를 찾아왔다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결국에는 연재를 죽이지 않은 것이나 자연스럽게 자기 집처럼 행동하고 당연하다는 듯 연재는 기억 못하는데 침대 밑에서 김장용 대형 비닐봉투를 꺼내어 오로지 분열을 준비하는 모습에서도 그렇습니다.
다른 추측도 다양하게 가능하지만, 제가 생각한 가설은 이렇습니다.
문제의 6월 10일, 연재가 바통을 사용하다 사고를 세게 치면서 세계선이 두 갈래로 분리됩니다. 하나는 정상적으로 연재가 돌아간 세계선 A라면, 다른 하나는 트랙에서 쫓겨나 잘려나간 의식이 주체로 자리 잡은 세계선 B입니다. 두 세계선은 4개월 동안 분리된 채 흘러갑니다. A의 세계선에서는 연재는 다현과 연인이 되어 잘 지내고 회사도 잘 다니는 등 평온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B의 세계선에서 견재는 매달 분열을 겪으며 미래의 자신으로부터 침범되었음을 자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재가 바통을 쓴 날이 도래하자, 두 세계선의 트랙이 교차하면서 두 세계선이 하나의 현실로 합쳐집니다.
그래서 바로 그 날, 견재는 연재의 집으로 들어옵니다. 중첩된 세계관에서 각자의 기억이 공존하고 서로 다른 일도 인과율의 허용범위에서 존재합니다. 연재는 기억 못하는, 분열을 대비한 침대 밑의 김장용 대형 비닐봉투처럼 말이죠. 기억이 중첩되는 듯한 이모 은수와 연재의 기억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인과율은 한 트랙 위에 두 개의 바통을 허락하지 않았고, 견재는 그 오류가 낳은 부산물로서 4개월을 버텨온 셈이 아니었을까. 트랙이 다시 만나는 순간 그는 연재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곧 그의 존재 이유 아니었을까. 결국 견재는 우발적으로 만들어진 괴물이 아니라, 인과율을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보정의 주체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내심 견재를 응원했다보니 더 기울어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ㅋ)
3. 분열, 존재, 그리고 우연재
욕심을 부리다가 트랙 위에서 바통을 놓친 죄로, 연재는 ‘분열’이라는 끔찍한 패널티를 받습니다. 인과율을 뒤틀어버린 2025. 6. 10.부터 견재가 대신 벌을 받았지만, 갈라진 트랙이 다시 만나고 드디어 본체를 만나면서 견재는 분열에서 해방됩니다. 트랙이 다시 하나가 되었고 이제 바통은 오롯이 연재에게 넘어갔습니다. 인과율을 바로 잡아야 할 책임도 연재에게 오롯이 넘어갔습니다
바통을 쓰는 건 철저히 “현재의 나”의 특권입니다. 현재의 나는 바통을 들고 트랙을 달려온 주자이므로, 그 경험을 고스란히 ‘오늘’의 자기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바통을 뺏긴 과거의 나는 원래 주도권을 잠시 잃었지만, 시간이 끝나면 자기 자리에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어야 합니다. 그러니 과거의 나는 잠깐의 기억 공백이 있었지만, 그 공백이 뭔지는 모른 채 삶을 계속 이어가고, 오늘의 나만이 그 공백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존재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의 트랙에서 온전히 바통을 이어받으며 ‘나’라는 하나의 팀으로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재는 그러지 못했고, 과거에 분리되었던 견재는 트랙이 하나되는 그 날이 오기까지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연재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분열을 중단할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은수에게 물어도 은수도 분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은수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 않지만, 그 성품과 성정에 비추어 정말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열은 왜 생긴걸까요. 연재는 분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의 트랙 위에 하나의 주자, 하나의 바통이라는 것이 작중 인과율이라고 가정한다면, 인과율은 주도권이 겹치면 강제로 여분의 주자를 잘라내서 트랙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 전제에는 의식과 신체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설정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식과 신체가 불가분이 기본 전제이니, 인과율은 의식에 균열이 생기면 신체에도 균열이 생겨야 한다는 이상한 규칙을 만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연재는 인생과 자아에 대해 별다른 고민없이, 주체적인 의식없이 살아왔습니다. 한번 균열이 생긴 의식은 끊임없이 분열합니다. 의식과 신체가 불가분이니 신체도 끊임없이 분열합니다. 견재는 사고패턴의 고정을 연구했습니다. 연재도 말미에 견재의 말을 따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바통은 사고패턴이라 했으니, 어쩌면 연재는 분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우연재’입니다. 연재의 삶 전체는 바통이라는 장치로 인해 우연한 개입과 우연한 선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우연재’인 것이 우연은 아닐 겁니다. 한자 이름이 뭔지는 드러나진 않았지만 ‘재’는 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재는 바통이 부재한 시기, 자기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시기임에도 바통이 없이도 또 다른 나들을 제거하고 살아남습니다. 주인공이 바통 없이 살아남은 자로서 ‘우연히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일까요? 어쩌면 인간 존재는 필연이나 목적이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마지막 구절은 ‘우연재는 늦지 않았다’입니다. 함의적인 문구가 꽤 와닿았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자신의 침입한 분열체의 공격에 대한 반격이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설명하는 듯 하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연재는 분열을 중단하고 온전히 주도권을 되찾을 것이고 그러는 것이 늦지 않았다는 선언처럼 보입니다.
연재 중인 작품은 지금이라도 연재중일 때 읽어볼까, 연재가 끝나면 단숨에 읽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어영부영하다가 선택지 없이 완결된 이후에 읽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호흡을 맞추며 읽는 것과 한번에 읽는 것 모두 장단점이 있겠지만 연재 주기에 맞춰서 조금씩 음미했다면 또 감상이 달랐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표면에서 지워버린 듯한 작가님의 백그라운드 설정이 궁금해서 추리를 해 본 것이지만, 사실 이 작품이 내세우는 메시지를 생각하면 분열의 이유나 바통의 작동원리는 그리 중요하진 않습니다.
작품 속 바통은 주인공에게 자기 존재의 주도권을 지켜주는 장치였지만, 그 바통을 놓친 순간부터 연재는 끊임없는 분열에 시달립니다. 바통은 결국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들고 있는 바통은 지금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느냐고.
재밌게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