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루프, 벗어날 수 없는 의뢰(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안녕, 아킬레우스 (작가: 해도연, 작품정보)
리뷰어: 이산화, 17년 8월, 조회 146

리뷰 의뢰란 건 처음 받아보네요. 지금까지 쓴 리뷰가 고작 두 편인데 말이에요. 할 말이 없는 글이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읽었는데, 다행히도 「안녕, 아킬레우스」는 리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단편이었습니다. 스포일러는 특별히 가리지 않을게요. 작품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재빨리 보고 오셔서 마저 읽어주세요.

 

솔직하게 밝히고 시작하도록 할게요. 저는 ‘루프물’ 서브장르에 별로 매력을 못 느낍니다. 몇 가지 비이성적인 편견도 있어요. 전제부터가 설득력이 별로 안 느껴지고, 루프 도는 이야기는 왠지 질릴 것 같고, 고만고만한 클리셰에 매몰되는 경우도 잦고, 전개가 무리해지도 쉽다는 편견들이죠. 아마 비호감의 상당 부분은 소싯적에 접한 용기사 07의 작품들 때문일 텐데……아무튼, 같은 이유로 이 장르에 도전하고픈 생각 역시 없습니다.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소재를 갖고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서브장르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는 일은 또 즐거운 경험이죠. 「안녕, 아킬레우스」는 재미있는 단편이었습니다. ‘루프물 치고는’ 재미있는 게 아니라, 취향에 꽤 맞았어요. 왜 맞는지도 알 것 같고요. 시간을 가지고 장난치는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질척질척한 욕망과 범죄 이야기는 또 아주 사랑하거든요.

 

시작은 느긋합니다. 분명 업무시간일 텐데 어떻게 하면 여자하고도 좀 잘 돼볼까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 요원이 등장하고요. 잔잔한 분위기에서 서서히 시공간의 변칙적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풀려나가고, 가슴아픈 사연도 등장하고, 시간이 반복된다는 걸 악용해서 어떻게 여자하고도 좀 잘 돼볼까 하는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하기야 시간이 계속 반복되는데, 그 안에서 농땡이 좀 피운다고 월급도둑놈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해 가능하고 평화로운 농땡이가 사실 스릴러의 전주곡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좋은 스릴러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시작되곤 하죠.

그 후의 이야기는, 루프물의 정석이라고 할 만한 ‘어떻게 루프에서 탈출하지?’ 수수께끼입니다. 비극이 기다리는 시간의 미궁 속에서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서 「안녕, 아킬레우스」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시간의 미궁이라는 추상적인 상황에 구체적인 ‘괴물’을 마련해서 알기 쉬운 대결 구도를 만들어냈다는 점이었어요. 꽤 근사한 괴물이거든요. 악랄한 미치광이이데, 루프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그 안의 모든 상황을 알고 또 지배할 수 있는데다가, 재수없게도 주인공보다 두 시간 먼저 루프에서 깨어나는 적이죠. 던전 보스가 이 정도는 돼야 공략법을 짜내서 상대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공략에 실패한다는 것은 다소 맥이 풀리는 사실입니다만, 이후에 드러나는 반전이 멋졌습니다. 던전의 진짜 보스와 그 동기 말이에요. 그 이야기를 좀 더 해 보도록 할게요. 「안녕, 아킬레우스」에서 반복되는 시간의 존재를 알고 움직이는 등장인물은, 재미있게도 전부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들입니다. 이상성욕이기도 하고, 좀 더 순수한 정욕이기도 하죠. 다들 이 육체적인 욕망을 위해 시공간의 변칙성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고 있어요.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 예행연습을 하거나, 좀 더 유혈낭자한 방법을 쓰거나.

그리고 어쩌면 이 ‘욕망’이야말로 제가 간과하고 있었던 이 서브장르의 진짜 매력과 닿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반복된다면 우리가 뭘 하겠어요?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미래는 잊은 채 막 살아 보기도 하고, 루프 속의 시간을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바꿔놓는 거죠.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소재는 아주 원초적인 욕망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리고 이 단편은 그 중에서도 가장 질척질척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에요.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비유는 쉽게 와닿지 않았고, ‘카메노 하시리’는 조금 우스꽝스럽게 들리고, 그런 사소한 걸림돌이 있지요. 하지만 완성도 차원의 불만은 아니에요. 「안녕, 아킬레우스」는 짜임새도 있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스릴러이며, 루프물의 매력을 잘 알고 있는 루프물이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생긴 구멍만큼이나 강력하게 우리를 끌어당기는 욕망의 소용돌이 말이에요. 그거야말로 진정 매력적인 이야기의 원천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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