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만만한 SF 트리트먼트: 헐리웃 블록버스터 혹은 BBC 블랙미러 비평

대상작품: 열린 우주와 그 적들 (작가: 이영수, 작품정보)
리뷰어: herrage, 7시간전, 조회 5

우선 작가님이 스스로 즐기면서 쓴 작품 같아서 독자도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었다. 상상력에 한계를 두지 않고, 지금 지구 행성의 온갖 문제들을 풍자하는 세헤라자데가 되어 플롯을 술술 짜내는 작가님에게 엄지 척.

시리즈의 중심 인물 ‘로니 굿맨-맥길’은 어찌할 도리 없이 일론 머스크나 도널드 트럼프, 빌 게이츠 같은 비대한 백인 남성 사업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저돌적이고 기민하고 영리하고 뻔뻔스러우며, 무엇보다 실패를 거듭해도 징그럽도록 포기를 안 한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로니라는 인물에게 곧 넌더리가 나는데, 사실은 현실에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일깨워지면서 소름이 확 끼친다. 풍자 소설의 덕목이 실현된 걸까.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는 로니로 대표되는 인간 종의 ‘생태적 근대화(ecological modernization)’ 본성의 우주적 발현, 그리고 먼 미래에도 계속되는 신자유주의-제국주의의 계급 투쟁으로 읽었다. 매 편마다 ‘만일 ~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가정을 던져두고 마음껏 키보드를 두드린 듯한 사고 실험 글쓰기가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한국어로 쓰여 있지만 철저히 영미권 SF소설의 계보를 따른다. 줄거리, 플롯, 캐릭터 원형은 물론 문체도 영어 번역서에 가깝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개인/나라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야기의 범위는 단번에 전세계로 확장되며 디테일보다는 거시적인 시선으로 ‘세계 곳곳에…’와 같은 설정이 빈번한 것도 그렇다.

그리고 통념적으로 볼 때 소설이라기 보다는 영상물(드라마)의 트리트먼트 혹은 시놉시스처럼 보인다. 소설적 재미는 보통 인물들을 주체적인 상황(장면)에 던져두고 거기서 행동 또는 대화를 하게 함으로써 독자가 심리적으로 개입(engage)되는 것에서 나온다. 소설이 구태여 세밀한 묘사를 하는 것도 독자의 머릿속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장면이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소설의 암묵적 규칙들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참신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반면, 추상성 높은 작가의 줄거리 서술과 복잡한 플롯을 어지럽게 따라가면서 종종 현타가 오기도 한다. (내가 지금 이걸 왜 읽고 있지? 하는)

만일 이게 영상 시리즈의 트리트먼트이고 내가 업계 종사자라면 오히려 욕심나는데, 작품의 분위기나 메시지에 따라서 인물을 부각시키는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될 수도 있고 이슈와 질문 자체에 좀 더 집중하는 <블랙 미러> 류의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 에피소드 당 30~50분짜리로 극본을 쓴다면 어떨까, 상상해보게 된다. 종횡무진 다양한 소재나 스케일을 생각하면 <릭 앤 모티Rick & Morty> 같은 풍자 애니매이션 시리즈도 어울린다.

그나저나 평범한 서민 독자로서 한마디. 재수탱이 로니가 제발 부디 영원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를…..(하지만 그러지 않겠지. 하이퍼리얼리즘 풍자극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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