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들은 아직 항해 중인지도 모릅니다. 감상

대상작품: 블랙홀 이야기 – 1 (작가: 구운란, 작품정보)
리뷰어: 태윤, 8시간전, 조회 2

인터넷과 SNS를 통해 평소에 접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정보를 아주 쉽게 얻게 된 요즘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선뜻 다가서기에 내키지 않는 주제들이 있습니다. 그 명칭 자체는 다니는 회사의 빌딩 이름 만큼이나 친숙하게 느껴진다 해도 블랙홀이니 양자 역학이니 하는 주제는 아직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 속에 뭔가 정립하기는 힘든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직 우리 삶에 확실하게 와 닿지 않은 양자 역학이나 우주의 현상들은 문학의 주제가 되기에 너무나 좋은 조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SF나 호러 문학의 토대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이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있을까 싶은데, 인류의 존속 기간 중 그 시작과 과정과 끝 무엇 하나도 확실하게 알아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끝을 가늠하기 힘든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코스믹 호러의 뿌리이자 양분이 되고, 광대한 미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지적 욕구는 공상 과학 소설 작가 분들께 끝없이 샘솟는 지적 에너지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 제목을 보고도 들어올 사람은 와라’ 라는 듯한 직설적이며 명료한 이 작품 [블랙홀 이야기]는 마치 발자크의 소설처럼 작품의 완성도와 재미를 자신하는 듯한 작가님의 초연함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어느 정도 기대한 대로 이 소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쉬울 리 없는 블랙홀과 초 광속 항해라는 주제에 후반부에는 블랙홀이 한 인간에 미치는 영향과 그것이 다시 공간으로, 시간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인과 관계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하지만 작가님은 그 중 어느 것도 독자에게 숙제처럼 휙 던져주지 않습니다. 왠지 복잡한 기하학 강의를 진행 중이던 교수님이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내 첫사랑 얘기나 들어보세요.’ 라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매우 뛰어난 점이자 정말로 블랙홀을 주로 이야기하는 이 작품이 정의와 공식에 약한 저 같은 독자에게도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흐릿할 때와 명료할 때를 아는 분명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난제들, 블랙홀에 접근하는 방법이나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들, 그리고 블랙홀에 접근하면서 겪게 된 현상들은 사실 아직 그 누구도 직접 관측했거나 모두에게 확인 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알고 있는 작가 분들 중에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학은 문학일 뿐이지만 논리와 증명이 필수 요소인 과학을 다루고 있는 작가의 노파심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방어 기제가 쓸데없는 표현을 덧붙이게 하고 그로 인해 정말 좋은 문장의 선명도를 낮추는 결과로 이어지는 슬픈 현상도 보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님이 설명하는 여러 과학적 접근과 방식들은 그 원리나 과정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지언정 이 작품에서 무슨 의미로 어떻게 쓰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도록 분명하고 간결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명료함은 과학적 설명 뿐 아니라 주인공과 탐사대가 처한 상황이나 이후 벌어진 사건들을 서술하는 문장에도 아주 잘 사용되었는데, 중첩이니 간섭이니 하는 용어가 나오면 괜히 눈이 아픈 척 책을 덮는 저 같은 독자들도 다음 내용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이 작품의 최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품 전체에 명료한 표현들만 가득 채워지게 되면 단순한 이야기가 되기 쉬운데 이 작품에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시기 적절한 국면 전환과 모호하지만 매력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처음 작품을 읽을 때 느낀 의문은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닌데 왜 2 부작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작가님의 절묘한 이야기 구성 능력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기술은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영화에서 중요한 몰입 요소인데, 최근의 영화로는 [조커]를 들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분위기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관객이나 독자가 슬슬 피로감을 느끼려고 준비를 하는 찰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한 방이 뇌리에 꽂히는 겁니다.

이 작품에서는 ‘아, 이런 이야기구나.’ 하고 전체적인 스토리에 대한 나름의 정리가 끝났을 무렵에 갑자기 파리채로 뒤통수를 세게 맞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궁금증을 유발하는 여러 단서들이 튀어 나옵니다. 그리고 ‘이게 뭐지?’ 하고 느낄 새도 없이 이야기는 2부로 넘어갑니다. 2부를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는 상태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작가님의 세밀하고 멋진 작업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독자 분들이 1부를 보셨다면 2부까지 완독을 하실 거라고 확신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캐릭터에 관한 부분은 사실 독자분들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의 매우 뛰어난 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작품 내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떤 개인적인 아픔이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작품 내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모두 독자 분들의 추측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그것이 이 작품 속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특이점이 됩니다.

주인공 선우의 경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1 년 안에 죽을 수 있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 정도입니다. 선우가 느끼는 혼란이나 삶에 대해 보이는 냉소적 태도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요.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미스테리한 향기를 많이 남기고 사라진 우진은 제 머리 속에서 그의 캐릭터를 새로 만들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 작품의 숨은 매력과 재미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선우와 인물들의 관계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면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들려주는 선우의 이야기가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모든 이야기가 선우의 머리 속 우주에서 만들어진 스토리라면 그것 또한 멋진 결말이 되겠지요.

블랙홀이라는 미지의 현상을 겪으면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 선우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막대한 비용과 자원이 들어가는 블랙홀 탐사를 왜 하는 지에 대한 설명이 애매했다는 점에서 조금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우리가 아직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수 있는 광대한 우주적 현상을 대하는 개인의 무력함이 작품에 깔려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블랙홀 이야기’니까요.

두 번째 읽으면서 저는 이 작품에서 불교적 윤회의 흐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탐사선의 AI 였던 메노는 선우가 다니는 병원의 의료 장비가 되어 있었죠. 탐사 대원이었던 유리는 선우의 담당 의사가 되었고 우진은…

선우는 지금 블랙홀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 윤회의 고리 안에 들어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과거에 겪었던 상실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요. 그 때는 우진과 대장, 세진은 다른 존재였을 겁니다. 여기서의 블랙홀은 조금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블랙홀은 사람이 윤회할 때 거쳐간다는 3 계와 6 도를 가르는 경계일 지도 모르지요. 선우가 어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그의 정신과 영혼은 계속 다른 세상, 다른 우주를 헤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 더 읽어 볼 생각입니다만, 이 작품은 읽어볼 때마다 새로운 해석과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최근 멀티버스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소설이 많지만, 그저 이야기의 분기 정도로 쓰이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죠. 이 작품은 독자 한 분 한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입니다. 왠지 침대로 파고들고만 싶은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친구가 될 것 같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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