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관찰되는 달의 크기가 태양과 유사한 것도, 언제나 한쪽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도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신비로운 일이다. 어느 날, 하늘위로 달의 다른 얼굴이 걸린다면, 사람들은 거기서 무엇을 보게 될까?
‘밝고 건전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작가는 지금까지 6편의 중단편을 브릿G 플랫폼에 올렸다. 나는 나머지 다섯 작품의 내용은 알지 못한다. 자신감을 잃을까봐 워낙 다른 작품을 읽는 일을 두려워하는 사람인데다, 이 한 작품의 내용을 얘기하는데 굳이 다른 작품의 느낌에 기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요즘 유행하는 ‘시간 비틀기’에 딴지를 건다. 시그널, 터널 등등 많은 작품속에 경쟁적으로 등장하는 ‘시간 비틀기’는 새로운 ‘왕자 만들기’에 다름 아니다. 고전적인 왕자는 최근까지도 ‘재벌가의 아들’, ‘출생의 비밀’ 등으로 변주되었지만 결국 너무 식상해졌다. 그래서 왕자를 별나라에서 들여오고, 만화에서 가져오더니 그 연속선상에서 과거의 사람을 호출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 아킬레우스>는 도입에서 독자들을 살짝 희롱한다. 여느 타임슬립 작품처럼 ‘시간 비틀기’가 혹시 러브스토리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핑크핑크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비중이 매우 낮은 인물인 ‘지니’가 마치 비중이 있는 것처럼 자세히 묘사되는 이유도 그 때문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그러한 독자의 추정은 타임루프가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처절하게 무너져내린다. 핑크핑크한 ‘시간 비틀기’는 피와 땀이 범벅이 된 불그죽죽한, 정육점의 조명같은 ‘시간의 늪’이 된다. 그리고 묻는다. 아니 독자들을 공격한다. ‘달의 뒤편처럼 어두운 당신의 내면에, 살속 깊이 감추어진 당신의 이드(id)가 이런 걸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면서 살인의 현장을 날것 그대로 묘사한다.
이야기를 채색할 요소들을 세밀하게 짜넣고, 그걸 루프가 돌아갈 때 마다, 마치 자물쇠의 정교한 얼개가 금고의 다이얼을 돌릴 때 하나 둘 맞춰 움직이는 것 처럼 작동시킨 것은 ‘작가를 희망하는’ 나로서는 꼭 배워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한 것이 아닌데, 멈추지 않고 죽 내려갔다.
또 타임루프가 정말 작동된다면, 루퍼나 ‘시간의 두께’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악마처럼 변할지 모르겠다고 작가로부터 설득당하고 말았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달의 뒤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용납될 수 있는 것 처럼, 아니 사회적 용납 혹은 옳고 그름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상상속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나 많은 범죄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런데… 작가는 왜 지도에도 없는 외딴 마을을 무대로 선택했을까? 나는 만약 그 상상을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현실에 풀어놓는다면 어떤 작품이 될까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독자들이 이야기에 빨리 들어갈 수 있도록, 초기 설정값에 덜 신경을 쓰고 넘어갈 수 있도록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불가피했을지 모르겠지만 살뜰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캐릭터가 살아있는 배우같지 않고 마블의 그림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두 번째,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전술한 것 처럼 ‘시간 비틀기’를 비틀어 우리의 어두운 내면을 깨뜨려 드러내고자 했던 것일까? 물론 이야기 자체는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작가는 ‘너무 독한 것’을, ‘맛을 내기 위한 양념’으로 삼았다. 어쩌면 양념이라기 보다 중심재료에 가깝다. 만약 ‘XX을 동반한 XX의 쾌락’을 넣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의 구조는 성립될 수 있을까? 성립된다 하더라도 맛은 어떨까?
‘밝고 건전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작가의 의지 표현일 수도 포장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작품을 ‘선입견’을 갖고 읽게 하는 표지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