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는 작가님들이 소설을 쓸 때 어느 부분에 힘을 주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여러 태그가 달린 작품일수록 읽기도 전에 작품과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필자에게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후자였는데, 그 이유는 ‘하드 SF’라는 태그 때문이었다. SF 비스무리한 걸 쓰려는 입장에서 하드 SF는 재밌고 흥미롭지만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해석할까 봐 덜컥 겁이 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필자가 오독하더라도 아량 넓게 이해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 밑밥을 미리 깔았다.
감상문은 소설의 내용을 자유롭게 다룰 것이므로 읽지 않은 분들은 얼른 읽고 오자. 재밌어서 금방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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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소설에 접근할 때 제목을 먼저 본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달리’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나오는 줄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란 본연의 뜻과 인물의 이름을 중의적으로 써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달리’라는 인물이 방법이 없어서 선택하는,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를 그리지 않을까 예상했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필자의 상상에 웃어도 좋다. 나 스스로도 웃기니 말이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는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대사다.
이야기는 진공 거품이 무한히 확장 중이며, 그것이 지구에 닿았을 때 지구가 멸망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영우는 진공 거품 조사단에 자원하고, 진공 거품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려고 한다. 영우는 에리카와의 이별, 암흑에너지 펌프 점프, 요한과의 만남, 그리고 지구로 복귀한다. 이야기는 이처럼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며 독자가 처음 만나는 세계와 익숙해지고 영우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창궁 작가님의 세심한 설계와 배분을 알 수 있었다.
에리카와 헤어졌을 때까지만 해도 영우가 진공 거품의 진실을 알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런 식으로 세계의 진실 혹은 진리를 다루는 소설 중에 간혹 작가의 상상 속 세계를 독자가 알아서 채우라는 식으로 끌고 가는 소설들이 있다. 하지만 본 소설을 다행히 그렇지 않다. 창궁 작가님은 진공 거품이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 설명해준다. 은하 연방에게 밀려난 UN의 대통일 이론에 입각하여 만든 무언가였다.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진실을 안 영우는 그 사실을 증명해줄 안드로이드 요한과 지구로 돌아간다.
필자는 이 이야기가 영우가 진실을 알았고 진실을 모두에게 알려주기 위해 지구로 돌아간다는 갈무리를 지었지만 본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건 소설을 재밌게 읽은 독자의 바람일 뿐이다. 영우와 요한이 지구로 돌아갔을 때 겪을 일은 독자의 상상에 맡겨도 좋다. 은하연방은 UN의 역사를 되풀이할수도 있고 UN의 역사를 알고 있으니 그릇된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필자는 인간이란 종에 회의적이기 때문에 그릇된 걸 알면서도 되풀이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현실에서도 비슷하게 결과가 잘못된 역사를 세세한 분석까지 해도 위정자들이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며 저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아 있으니—멸망하는 중일지도— 필자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괜찮아도 지식이 쌓였기 때문에 시한폭탄을 쥐고 살게 되는 건 필연적이라 본다. 인간은 원래 금기에 다가가고 싶고 어기고 싶어 하니까. 은하연방은 위정자를 잘 뽑아야겠다, 는 괜한 걱정이 들었다.
다시 영우 이야기로 돌아오자. 영우의 태도야말로 인간답다.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것에 계속 해서 도전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구를 호령하는 종이 되었다. 물론 영우 혼자서만 잘한 거 아니다. 그의 결단이 중요했지만 암흑에너지로 뛰어들 때 다른 조사단원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영우는 요한에게 닿을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은 여럿일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소설은 인간찬가도 다루고 있지 않나 싶다.
소설에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대사가 몇 번 나오는데, 그것의 의미가 조금씩 다른 것도 재밌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해야지, 라는 절망과 자조가 느껴졌고, 에리카와의 대화에서 나왔을 때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마지막 요한의 입에서 나왔을 때는 UN에게 만들어지고 수백년동안 혼자 있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는 낭만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같은 대사를 서로 다른 인물들이 반복하면서 의미가 변하는 점이 재밌었다. 그리고 그 의미가 필자에게 점점 깊이 들어오는 것이 감동스러웠다.
소설을 다 읽고나니 제목이 다르게 보인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회의감 섞인 의미에서 이 방법밖에 없었다는 의지로, 이 방법밖엔 없잖아요, 하며 웃는 유머와 낭만까지 느껴지니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마법의 문장이다.
하드 SF라고 했지만 SF를 익히 읽은 분들이라면 겁내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필자 같은 어설픈 독자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니—맞게 이해했겠지?— 많이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혹여 오독한 부분이 있다면 작가님께서 아량 넓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