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매니저인 주인공은 인공지능 회사의 주가를 1000% 상승시키는 뛰어난 성과를 거둔 끝에 특별한 성과급을 받게 된다. 성과급으로 무엇이든지 제공하겠다는 대담한 제안에 주인공은 물질적인 것은 됐고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인공지능 회사 사장 보체크는 말한다.
AI로 직접 해보세요, 라고.
흥미롭고 범상치않은 제안으로부터 시작된 주인공의 욕망은 성공의 꼭대기에서 데굴데굴 굴러 바닥까지 떨어지는 듯하다. 마치 잘 설계된 롤러코스터의 하이라이트만 모아보는 것처럼 짜릿한 추락이다.
맨 처음에는 정말로 위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것처럼 완벽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비현실적 모드로 시작한다. 오케스트라는 완벽했지만 주인공의 마음 속에는 섭섭함이 생긴다. 좀 더 현실성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현실성을 끌어올리자 AI오케스트라는 실수도 했고 개별성도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성이 (상)으로 올라오자 오케스트라는 갑자기 지나치게 현실적인 오케스트라가 되고 만다.
이 현실적인 오케스트라 앞에서 지휘자는 길길이 날뛰고 아무것도 제 마음대로 이끌어가지 못한다. 단원들에게 휘둘리고 갑자기 나타난 촬영팀에게 휘둘린다. 협박도 하고 모른척도 해본다. 그렇지만 단원들은 제멋대로다. 그러나 연주만큼은 맥락에 맞게 빛난다.
현실적인 오케스트라라면 원할만한 휴가와 사연있는 음악,
펀드매니저인 주인공이 누려본 적 없을법한 노조활동의 맛,
인간다운 욕망과 번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이끌어내는 슬픔까지 펀드매니저 주인공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폴 블룸은 <최선의 고통>에서 노력(처음에는 부정적일 수 있는)은 보상과 짝지어지고, 뒤 이어 그 자체로 보상이 되며 기쁨을 안기는 대상을 얻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 곧 고통 자체가 기쁨을 안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결과와 무관하게 적절한 정도의 고생에서 깊은 만족감을 얻도록 만들어진 존재라고도 말한다.
주인공의 적절히 조절된 고통은 점점 더 커다란 고통과 노력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주인공을 이끌어가며 그의 AI인공지능 오케스트라 모델은 사용자가 원하는 정도의 고통까지 주인공을 충분히 고문한다.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과 팀을 이끌어나가려는 노력은 진정성이 느껴지고 그가 원하는 연주가 아니었던 연주에는 각각의 사연이 담긴 만족스러운 선율을 이끌어낸다. 그 끝에 주인공이 원하는 진짜 보상이 주어진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진짜 보상은 노력끝에 주어진 쾌감이다. 잘 짜여진 고통 속에 굴러떨어져서 고생한 끝에 얻게된 고별 교향곡은 그가 원했던 것이 고통끝에 얻어지는 쾌락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AI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쉬운 쾌락이나 보상일지도 모른다. 돈만 내면, 기술과 여유만 되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어있지 않다. 고통 끝에 느껴지는 쾌락만이 엄청난 인센티브를 보장받은 인간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라면 AI도 결국 그를 따라갈 것이다.
그게 잘 짜여진 단막극에서 흘러나오는 고별교향곡일 수도 있음을, 그리고 어쩌면 AI가 인간을 파악해 정말로 기쁘게 해줄 수도 있음을 우리는 석아산의 AI Symphony, AI Sympathy을 통해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짧고 재미있는 소설이므로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