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째 계속되는 야근지옥에서 겨우 살아돌아왔다. 산 건 아니고 병으로 인한 퇴근, 1시간 야근하고 돌아와서 숨 돌리자마자 브릿G를 켰다. 읽기만 하고 못 썼던 리뷰를 이제야 쓰려고 한 건데, 오호 <악업이 귀를 부른다> 새 회차가 올라왔다. 그것도 어제.
그렇다. 나는 본디 오컬트, 호러물 애호가로서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는 <곡성>이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유튜브에서 굿을 찾아듣는 다소 특이한 인간이다. 가장 좋아하는 굿은 대살굿과 진오귀굿이고, 넋건지기굿도 좋아하는데 이따금 유튜브에 풀 버전으로 올라와 있는 산신제를 멍하니 보는 것도 좋다. 고로 이 소설을 택한 단 한가지 이유는 무녀와 퇴마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아내와 이혼 후 딸 소윤을 홀로 키우는 홍식으로, 갑작스레 실종됐던 소윤을 다시 찾은 이후부터 괴이한 일을 마주한다. 소윤의 온 몸에 뽀루지와 상처가 생기고 태도 또한 묘하게 바뀌었는데 병원만 가면 멀쩡해지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무진이라는 기묘한 사내를 찾아가고, 그 사내와 함께 문제의 원인을 찾아가는 내용이 26화까지 진행되었다.
소설의 도입부만 보았을 때는 다분히 영화 <곡성>이 생각나는 장치들이 있었다. 이를 테면 딸 소윤의 몸에 나는 뽀루지가 ‘괴이한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거나, 단순한 ‘새’라기엔 좀 더 괴랄한 생명체를 발견하는 장면이라던가, 무진이라는 존재를 대하는 홍식의 자세라던가 기시감이 드는 순간들이 많아서 뒷부분이 더 궁금해지기도 했다. 장르적 특성이라고 보기에도 살짝 애매하리 만큼 겹치는 장면들이 있어서… 그렇단들 풀어가는 과정이나 ‘넥스트 스텝’이 달라진다면 그 자체로 의미는 있을 테니까.
차이를 찾아보자면, 홍식의 직업은 소위 개장수다. 식용으로 개를 키우고 그 개들을 도살해서 파는 업을 하고 있다. 여기서 바로 아, 악업이란 건 ‘개를 쳐 죽인 홍식의 죄’인가 생각했다면 오산. 그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암시하면서 소설은 앞으로 나아간다.
재미 있었던 건 소윤의 몸 안에서 두 개의 힘이 충돌된다는 장면이다. 최초에 무진은 그 두 힘 모두가 악독한 것이라고 오인했지만 뒤로 가서는 하나는 소윤을 지키는 힘, 다른 하나는 소윤을 해하려는 힘임을 깨닫게 된다. 이 즈음에서 무진과 홍식은 ‘미지의 악의’를 좇는 동료 아닌 동료가 되고, 소윤의 지키는 힘이 바로 소윤의 집 나간 어미로부터 시작됐다는 걸 보았을 때는 조금 더 흥미로워졌다.
아주 오래 전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여인, 그 나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늙어버린 여인이 바로 자신의 아내라는 걸 깨달았을 때 홍식은 몹시도 놀라고, 자신이 헤아려주지 못한 그녀의 생을 안타까워 한다. 무진 역시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데, 감정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이 시퀀스가 생각보다 덤덤하게 느껴져서 아쉬웠다.
어쩌면 감정 라인을 따르기 보다 ‘사건을 좇는 형태’로 구성된 소설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이따금은 ‘보여줘야 할 장면’을 덜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아도 될 장면’이 길게 설명되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서 적어 본다. 내가 궁금한 건 오컬트적인 사건과 장면 그 자체라기 보다 그 사건이 기어코 보여주고야 마는 ‘사람들의 민낯’이니까.
오컬트만큼 사람의 밑바닥, 잔혹한 욕망, 솔직한 표정이 드러나는 장르도 흔치 않다. 구태여 권선징악을 내세우지 않고, 때로는 악이 승리하기도 하는 장르니까. 사건의 흐름이 있되 인간적인 감정이 물씬 묻어날 수록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영화 <곡성>이 흥미롭고, 오래도록 회자될 만큼 사람들을 몰입시켰던 건 평범한 경찰인 종구가 기이한 사건이 휘말리며 ‘일상’을 잃게 되자 그 일상을 찾고자 분투하고 ‘그 어떠한 것도 믿을 수 없어’ 방황하는 서사를 잘 풀어냈기 때문 일 테다.
소윤의 영혼과 육신이 위험한 상태라는 ‘대전제’에서 시작돼 그 비밀을 좇는 걸 따라 26화까지 걸어왔는데 마지막 문장 “이미 소윤이의 육신과 영혼의 반절 이상, 귀신에게 잠식된 상태입니다”를 보고 나는 다소 아쉬웠다. 바로 그래서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다.
소윤의 상황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귀신에게 살짝 먹혔든 반절 이상 먹혔든 눈알 구멍 하나 남겨두고 다 잡아 먹혔든 ‘잡아 먹힘’이 시작된 순간부터 소윤이라는 존재는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먹힘의 진행, 소윤을 먹은 자가 누구인가 좇는 진행만을 더디게 이어갈 게 아니라 주인공인 홍식이 조금 더 움직이는 인물이라면 어떨까. 현재까지는 다분히 수동적으로 무진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고 있는 터라 그의 고뇌와 방황과 속사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평범하다 생각했던 일상이 완전히 무너졌다. 딸 아이는 광기에 서려서 더 이상 내 딸 같지가 않고, 별로 믿음가지도 않는(심지어 명품족이기까지한) 반무당에게 기대어 있는 상황에서 이혼한 아내까지 딸아이를 지키다 외로이 죽었다는 걸 알았다. 심지어 일반 사무직으로 일하던 사람이 아니라 (직원을 쓰긴 하고 본인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직접 칼을 써서 개를 도축하는 직업을 지닌 사내다.
그가 처한 환경, 갖고 있는 능력치(분노의 퍼센트랄까 행동할 수 있을 파괴력이랄까)보다 조금 더 얌전하게 이 소설에 보여지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아쉬웠다. 물론, 작가가 생각하는 끝이 어느 정도의 분량일지 또한 구성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리뷰를 쓴다는 건 조심스럽다. 그렇대도 말을 한 것은 ‘홍식’의 캐릭터가 아쉬워사다.
따지자면 곡성과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홍식’의 캐릭터 그 자체니까.
종구는 한 마디로 미끼에 걸려버린 희생양이었다면 홍식은 다르다.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할지라도 제 손에 피를 묻힌 ‘과거사, 과오’가 존재하고 아직 드러나진 않았지만 ‘악업’이라는 건 어쩌면 그에게서 비롯된 걸 수도 있다. 혹은, 대를 이어 내림되어 온 악귀나 악령의 서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홍식의 존재감이 뒤에 더 강하게 그려지길 바라며, 나는 다음 회차를 계속 읽어나갈 것이다.
오컬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나 뭔가를 보고 싶다 생각만 하고 있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도록. 지옥철에 끼인 상태로도 후루룩 읽혀질 만큼 가독성이 좋은 편이고, 오컬트적 장치가 적절하게 잘 섞여 있다. 나는 야근 지옥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이 소설을 보며 일탈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