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름다운 건 보고만 있어도 즐거울까요? 물체를 봤을 때 잘생겼다, 예쁘다, 귀엽다고만 생각하던 제게 보고만 있어도 즐겁다고 처음 느낀 건 빌리라는 그룹의 일원인 츠키 직캠 영상이었습니다. 긴가민가요라는 제목의 노래였는데 표정이 휙휙 변하는 예쁜 사람은 몇 번을 다시 봐도 질리지가 않더라고요.
그렇지만 그런 감상은 일종의 재해처럼, 저와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대한 파도나 폭풍 그림 같은 거니까요. 가끔은 화면 속의 형상이 저와 같은 종의 생명체라는 게 얼떨떨합니다. 진짜요? 쓰면서도 잘 믿기지 않아요.
그래서 제게 이야기 속의 아름다움이란 권능처럼 느껴집니다. 권력 없는 아름다움은 소유자에게 재앙이 되기도 하지만, 권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처럼 그 또한 다른 종류의 힘이 되기도 하죠.
그렇다면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한 걸까요? 나이가 들어 성한 곳이 없어서, 안쪽땅에서 온 젊고 고귀한 귀족처럼 강하지도, 빠르지도 못한 늙은 마녀는 첫눈처럼 새하얗고 비단처럼 고운 정령과 함께하는 게 정녕 부끄럽고 불길한 일인 걸까요.
그보다는 꿈을 품은 채 나이를 핑계 삼을 수 있도록 단지 기다림으로 세월을 채워서일까요? 그러지 않고 안쪽땅의 귀족처럼 두꺼운 얼음을 뚫고서 가죽뿐인 소문을 쫓아 며칠이고 타지를 들쑤셔야 했던 걸까요? 그럴 힘도, 권위도 없지만, 그것이 희망이자 꿈이기 때문에?
정령에게 가죽 안에 들어갈 자신의 아름다움은 아무 쓸모도 없고, 마녀에게 오랜 꿈은 바닷길이 열릴 무렵 항구를 바라보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놓지 않았기에 두 존재는 만났습니다. 거기에는 삶처럼 어떤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이야기는 시작되고 정령은 시신이라도 받아가고픈 인간을, 마녀는 일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아름다움을 얻었죠.
정령을 소유하고 싶었던 귀족에게는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고서요.
마녀에게 협조의 대가로 귀족은 꿈의 실현을, 정령은 경애를 약속한 부분이 귀족이 낸 수수께끼에 대한 마녀의 대답 같아 재밌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먹이를 주는 금속보다는 먹이를 주지 않는 솜 덩어리를 선택하는 어린 원숭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점도요.
하긴, 용이 아닌 누가 황금 위에서 잠들고 싶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