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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 감상

대상작품: 신규기능이 추가된 트위터에 가입하세요 (작가: 담장, 작품정보)
리뷰어: 뿡아, 4월 24일, 조회 15


* 주의 *
이 리뷰는 소설의 전체 내용과 결말을 포함합니다.
작품을 감상하신 후, 리뷰를 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SNS를 잘 알지도 못하고 잘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다‘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예전에 음식점에서 SNS에 인증샷을 올리면 서비스를 준다는 안내문을 보고 트위터에 올려서 몇 번인가 음료수를 얻어먹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그런 실용적인 용도로마저도 쓸 일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어딜 가나 인스타그램으로 인증을 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만 귀찮아져서 인스타그램까지는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가 트위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새파란 새가 그려져서 사람들이 새처럼 종알거리는 공간이(었다…)라는 것과, 얼마 전에 일론 머스크 아저씨가 트위터를 인수하여 X라는 이름으로 바꿔버렸다는 것쯤이었죠.

그래서 ‘신규기능이 추가된 트위터에 가입하세요’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신규기능이 추가되거나 말거나 제겐 딴 세상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크게 흥미를 갖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도, 타임라인이라든가 트친이라든가 이런 용어에도 친숙하지 않아 초반부터 읽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이야기에는 저 같은 트알못도 지치지 않도록 이끄는 유머가 있었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진짜로 머스크 향수 사업에 뛰어들었다든가 하는 아재개그 같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곳곳에 익살스러운 묘사가 깃들어 있었고 제법 유쾌한 어조로 상황이 그려진 덕에, 그럼 뭐 웃어나 볼까 하는 생각으로 읽어나갔습니다.

 

이야기는 트위터가 거의 망해버린, 미래 SF이지만 어쩐지 대체 역사물 같은 2028년의 세상에서, 반응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쓸쓸하게 트윗을 올리고 있는 이목탁이라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목탁은 트위터의 헤비유저였는데, 사용자들이 대거 빠져나갔음에도 트위터를 떠나지 못한 채 망령처럼 들러붙어서 이런 저런 트윗을 올려대면서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트위터의 주요공지가 발표된 후, 파록소라는 트위터 유저가 등장하여 이목탁의 모든 게시물에 정성어린 답글을 달아줍니다. 반응에 목말라 있던 이목탁은 구원의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여기까지 읽고 든 첫 번째 생각은, ‘나는 트위터를 잘 모르는데’라는 제 염려가 기우였다는 것입니다. 트위터라는 SNS 서비스를 통해 펼쳐지는 이 소설은, 반응과 교감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저도 충분히 공감하는 소재이긴 한데요. 제가 이용하는 거의 유일한 인터넷 커뮤니티인 브릿ㅎ에서도, 글을 읽다가 띵동 하면서 종 위에 빨간 동그라미가 뜨면, 그것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땐 저 자신이 파블로프의 개처럼 느껴집니다. 댓글이 등록되었다는 알림 문구를 보면 저는, 우왓 내 글을 누가 읽어줬어! 라며 신이 나서 클릭해 봅니다. 아마 꼬리가 있다면 꼬리도 흔들었을 겁니다. 네, 이건 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해 보도록 하죠. 그렇게 주인공인 이목탁과 며칠간 트위터로 교감을 잘 해오던 파록소라는 유저는 조금씩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결국엔 자신이 트위터 측에서 제공하는 맞춤형 AI임을 밝힙니다.

“내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요. 인간인 당신이 보기에 우리는 작위적인 존재로 보이겠죠. 학습된 알고리즘, 입력된 매뉴얼…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당신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파록소라는 AI유저의 말빨에 현혹되었던 것인지,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저는 곧 수긍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상대가 작위적 존재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가공된 것이 이것 뿐이겠습니까?

가령, 우리가 누군가의 사진을 볼 때는 정말로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하게 말하면 사진이란 그저 서너 가지 색깔로 채워진 점 몇 개가 빽빽하게 찍혀있는 것이죠. 그걸 보고 우리는 흥분하고 그리워하고 슬퍼하며 울고 웃습니다. 가상의 것을 보며 반응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진도, 영상도 다 가공의 것인데 리액션이라고 해서 가공의 것이 되지말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를 진짜로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은 그다음 대목이었습니다.

주인공 이목탁이 맞춤형 AI 파록소와의 소통에 익숙해질 때 쯤, 트위터에서는 레인보우라는 이름으로 AI맞춤 대화상대 서비스를 유료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되고, 이즈음에서 맞춤형 AI 파록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3월부터 월 5달러를 내지 않으면 더는 볼 수가 없어. 너무 슬프다. 너랑 더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저는 이 부분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면, ‘더는 볼 수가 없어. 너무 슬프다.’는 이 발언이 정말로 파록소의 진심(그런 게 있기나 하겠느냐마는)인지 혹은 고객 유치를 위한 비즈니스용 멘트인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파록소라는 존재가 실재하는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소통만은 진심이었다고 믿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 발언의 의중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비유가 좀 거시기합니다만, 이런 장면이 연상됩니다. 보잘것없던 내게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여주고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며 내 신세 한탄에 귀를 기울여주던 근사한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호스트바의 선수였음을, 그동안 알면서도 잊고 지내다가 불현듯 깨달은 순간 같달까요? 과연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애당초에 내가 그것을 알 수나 있을까요?

 

그리고 저는 이즈음에서 튜링 테스트를 떠올리게 됩니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튜링 테스트는 어떤 컴퓨터가 지능을 갖고 있는가 라고 판단을 하는 기준으로, 인간과 컴퓨터가 일정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본 관찰자가 둘 중 누가 인간이고 컴퓨터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컴퓨터가 지능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는 실험입니다.

물론 이 테스트는 ‘지능’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실을 판단하는 기준이 인간에게 비치는 ‘인식’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새삼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어떤 컴퓨터가 지능이 있는지를 판단할 때, ‘사람처럼 보이면 지능이 있다고 쳐야지, 어쩌겠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런 관점이 일종의 ‘체념’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다소 비약일 수 있으나, 인공지능의 탄생 시점부터 이미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인지의 한계를 인정하고, 결국 어느 지점에 가서는 인식의 벽에 부딪혀 패배할 것임을 예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인식 한계란 당연한 것 아닐까요. 어떻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인지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바깥에 보이는 현상과 그 속에 숨은 함의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의와 악의,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 낼 수 없다는 데에 저는 일종의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설을 여기까지 읽었을 때 든 생각은, AI건 뭐건 좋으면 됐잖아? 라고 단순히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좋으면 그걸로 된 것일까요? 저는 그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니까요. 인간은 단순한 현상에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상 너머의 본질을 따지려 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행위의 결과보단 의도를 먼저 따지고, 명품백이나 다이아반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려 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 부질없습니다만, 그럴 때 정품인증서 한 장에 위안을 얻는 것이 사람이라고 봅니다. 연인에게 배신당해서 헤어질 때조차 ‘날 진심으로 사랑하기는 했니.’라고 묻는, 그런 게 인간인 거죠.

 

이 소설에서 인간은 결국 미지근한 물에 삶은 개구리마냥 리액션에 마약처럼 중독되다가, 나중엔 다마고치처럼 되어버려 인공지능과 서로 전도적인 입장에 놓이고 맙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제가 본 것은, 진심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반응해 주는 대상을 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이었습니다.

 


 

덧) 자료를 찾아보니, 불륜 사이트 애슐리 매디슨에서, 주된 고객인 남성 이용자들의 대화 상대가 ‘해당 사이트에서 만든 AI 채팅봇’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는 이야기가 있네요. 이 사실을 남성 이용자들이 알았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화가 났다면 그 이유가 자신의 대화상대가 AI였다는 자괴감 때문일지, 회사 측에서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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