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천재 화가를 위한 감사의 찬가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 (작가: 리체르카, 작품정보)
리뷰어: 하예일, 23년 12월, 조회 15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슐러.

군대에 징집됐다 무수한 죽음을 못 견뎌 탈영한 그는 노숙자로 거리를 떠돈다. 지독히도 지난한 삶에서 그로 하여금 인간적인 면모를 지키게 도와준 건 바로 그림.

배운 적 없지만 이 재주는 그에게 푼돈이라도 안겨주는 신이 그에게 허락한 특별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이 남다른 재능은 그를 거칠고 배고픈 거리의 삶에서 하루 아침에 니르젠베르크 저택 안의 따뜻하고 안전한 생활로 이끌어준다.

비록 지하이긴 하나, 저택에서 먹고 자는 것은 물론, 그림을 배우고 익히는데에 전폭적인 후원을 받게 된 슐러. 이런 호의를 그냥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저택 주인인 칼스텐은 그림에 한해서는 뭐든 그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

대신 칼스텐이 그에게 내건 조건은 단 하나.

열심히 배우고 익혀 좋은 그림을 완성하는 것.

슐러 역시 재능을 십분 발휘하며 기대에 부응해나간다. 그러면서 마치 도장깨기 하듯 그림 기법을 가르쳐주는 이들의 지식을 흡수하듯 익혀나간다. 그런 탓에 그를 가르친 자들이 오히려 좌절감을 느끼고 나가떨어지고 만다.

 

이쯤 되니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오래 되고 낡은 진리가 떠올라 나는 내심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슐러는 저택이 있는 웰링스를 둘러싼 소문인지 전설일지 모를 꿈을 꾸게 되고, 심지어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 같은 꿈을 꾸는 기이한 일을 겪는다는 걸 알게 된다. 그후 저택 주인 칼스텐이 그를 후원한 이유가 단순히 그의 뛰어난 재능 때문만은 아님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저주로 묶여 있던 영혼들이 그들을 위해 위험을 감내한 젊은 천재 화가를 위해 부른 처음이자 마지막 노래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는 일단 사람이 들어가면 사라져 버린다는 기괴한 소문이 무성한 웰링스의 니르젠베르크 저택을 배경으로 마을에 전설처럼 퍼져 있는 마녀의 무서운 저주에 대해, 더 나아가 모두의 안녕을 위해 오래된 저주를 풀고자 하는 기나긴 힘겨운 노력들에 대한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흥미롭게 펼쳐진다.

 

미술품이 모여 있는 고택의 모습이나 정원을 거니는 미모의 소녀, 냄새 나는 길고 긴 지하 비밀 통로, 후원 받는 예술가들이 머무는 미로 같은 지하 공간, 마을 사람 모두가 꾸는 같은 꿈, 꿈을 꾼 자는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증상 등등은 읽는 내내 신비감과 더불어 뜻 모를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런 점에서는 고딕 소설의 향기를 은은하게 맡을 수 있다.

요즘은 미술용품점에서 물감을 편리하게 사서 쓰지만, 과거 화가들은 직접 만들어 썼던 만큼 원하는 색을 내기 위해 어떤 기법을 쓰는 지에 대한 정보도 살짝 옅볼 수 있다. 다만, 읽는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할 수도, 혹은 흥미로울 수 있는 대목 같았다.

마녀의 등장 배경이나 마녀가 곁에 두고자 했던 집착에 가까운 사랑에 대한 사연에는 깊이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 점은 내심 아쉬웠다. 잠깐 등장하지만 정원의 풀과 나무 등 없으나 있는 존재에 대한 사연 역시. 이들의 사연이 제목과 연결되는 만큼 내용이 조금 더 나와주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래도 저변에 은근히 깔려 있는 신비로움이 호기심, 약간의 공포와 버무려져 결말까지 열심히 달려가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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