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모로, 굉장한 소설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감상을 정리하다 보면, 어떻게 생각을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한 고민이 리뷰의 제목, 그리고 첫 문장에 반영되는 편이지요.
다만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만큼 고민도 깊었고, 문장도 여럿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굉장하다’라는 표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뛰어난 부분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투박한 표현이라는 것이 조금 부끄럽네요.
이 소설은 굉장한 소설입니다. 두 번 정도 읽는 것을 추천드릴 정도로요. 이 소설에는 SF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삶과 우울함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우울함에 대한 작가의 따듯한 한마디도 담겨 있지요. 개인적으로 정말 인상 깊은 이야기였고,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감정을 느낄 수도 있구나, 라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금 알게 된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소설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이라면 꼭 읽어보는 것을 추천드리며, 혹시 최근 삶에 문득 우울함이 있었다면, 더욱 읽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SF적 상상력입니다.
소설은 AI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를 미려하고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AI 정부의 등장, AI가 지배하는 세상이 구축되는 모습, 그리고 그런 AI 정부가 미래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이러한 묘사는 단순히 AI가 나타났다! 는 외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AI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변화가 일견 무심한 척 소설 내에 던져져 있지요. 하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러한 내용이 얼마나 세심한 고민 끝에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소설은 삶을 마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단지 ‘자율적 삶 완성’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죠. AI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선택한, 살아보고 싶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조력해 줍니다. 상담은 5년 간 지속되며, 5년 간의 상담과 치료에 성실히 임했음에도 자신의 삶이 이대로 ‘완성’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의료진의 감독 하에 급속 산소 제거기를 통해 고통 없이 삶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자율적 삶 완성’이라고 표현되지만, 결국 자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자살은 유서 깊은 행동이고 아직까지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논쟁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는 없지만, 스스로의 삶을 포기할 권리도 없는 것일까요? 만약 누군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병에 걸린 환자라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용인되지 않는다면, 그 환자가 겪는 고통을 방치하면서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처럼 우리는 정말 논쟁적인 주제로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SF적 상상력이 빚어낸 세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뒤섞이면서, SF적 근미래 세계에 대해서는 무리 없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여러 이야기들이 뒤섞이며 SF적 세계를 보여 주는 전개의 특성상, 약간은 흥미를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중에 나오는 ‘로건’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지요. 하지만 모든 조각들이 모여서 다시 독자에게 찾아오게 되는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정도는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소라의 어머니 서린은 수면무호흡증으로 인한 저산소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서린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유진은, 소라가 ‘자율적 삶 완성’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을 말리지 않으면서 서린도 말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면서 이 소설의 정말 뛰어난 두 번째 요소를 느끼게 됩니다. 이 소설은 자살에 대해서, 굳이 평가하거나 단정짓지 않습니다. 어떠한 것이 옳다거나, 반대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따듯한 개념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것은 ‘완성 중’이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소설은 주로 AI 시대를 살아가는, ‘자율적 삶 완성’ 프로그램에 참여한 ‘소라’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주로’라고 하는 이유는,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종종 변경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은, 우울증을 겪고 있고요. 누군가는 삶을 마감해야 할 정도로 우울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는 딱히 그렇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소라’도 마찬가지이고요. 소라는 마치 자신의 삶에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이 없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울한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라는 우울하고, 어쩌면 소설을 읽는 저도, 당신도, 우리도 지금 우울할 수도 있지요. 소라는 AI 혁명이 일어난 시대에 살아가고 있고, 과거의(말하자면 우리의 ‘현재’)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울량 보존 법칙’ 이라도 있는 듯 우울감을 느끼고 있지요.
사실 이는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작중에서도 언급되는 것처럼,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갔습니다. 평균 수명이 30살이었던 때도 있으며, 전쟁과 대공황 같이 전 세계적인 재난을 겪은 세대도 있었죠. 멀리 가지 않아도, 주 5일 근무, 혹은 주 5일 등교가 정착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대와 비교하면, 우리는 주 5일만 근무(등교)하면 되는 아주 편안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우리는 우울합니다.
그런 우울감에 빠진 사람들은, 마치 스스로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소라의 표현처럼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죠. 무기력이라는 늪에 빠져서 끝이 없는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것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해결책은 있을까요? 사실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AI 혁명이 오는 시대에도, 명백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소라를 상담해 주는 AI 상담사조차 ‘오로지 소라 씨 자신만이 본인을 치유할 힘을 가졌어요’ 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당연히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완성 중’이라는 표현을 선물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완성 중이라는 개념은 소라가 사그리아 파밀리아 성당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미려하게 표현됩니다.
사그리아 파밀리아 성당은 아주 장기간 지어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성당입니다. 즉, 이 성당은 항상 공사 중이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형태인 것이죠. 처음부터 이렇게 될 계획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서조차 성당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AI도 오래 짓는다는 사실 자체가 유명한 건물을 굳이 빨리 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해서 성당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그리아 파밀리아 성당은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 건축물이며, 그 가치를 인정 받는 세계적 유산입니다. 미래에도 여전히 가치 있는 유적이고, 소라는 그 성당의 첨탑에서 탁 트인 바르셀로나 시내를 내려다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호기심을 다시금 찾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치 사그리아 파밀리아 성당처럼, 아직 ‘완성 중’이라는 사실을 소라가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을 완성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우리의 삶은 단시간에 끝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우울하더라도, 힘들더라도, 그것은 단지 내 삶이 이렇게 끝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아직 ‘완성 중’이고, 잠깐 건축에 시간이 걸리거나 어려운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대로 멈추는 것이 아니니까요.
정말 좋은 의미를 가진 소설이라서, 제가 굳이 이렇게 첨언하는 것이 약간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