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하지 않는 북극성 서사시’ – 프롤로그
변하지 않는 북극성이라는 참 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변하지 않는 북극성이기에 거꾸로 변화무쌍함에 놓여있는 우리에게 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 모순적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대체 왜 이 브릿지에는 폴라리스 랩소디가 안올라와 있는것인지 불만이 넘치지만.. 참도록 하겠다. 소설이 없다고 비평을 쓸 수 없는건 아니니까. 패스파인더(pathfinder)가 없다고 길을 못갈소냐. 어차피 이 비평의 세계는 해석의 세계이다. 나는 이영도의 소설들을 정신분석이라는 렌즈로 보려고 한다.
‘뭔가를 마시는 새’ 시리즈 이전 이영도 작가는 ‘드래곤 라자’ ‘퓨처 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3개의 장편 판타지 소설을 썼는데 주제의식은 반복되고 있다. 내용은 내가 이전에 리뷰에서 주장한대로 ‘정신분석’이라는 주제로, 그리고 정신분석적인 맥락에서 우리 사람은 정신분석적으로 이해되는 삶 혹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원죄를 지으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 골자다.
이렇게 적고 보니 참 멋없게 작가의 작품을 요약한거 같아서 미안하다. 사실 이전 리뷰도 엄청 못적긴 해서.. 뭐랄까 죄의식마저 느낀다. 해서 이번에 감상-비평을 해볼 ‘폴라리스-랩소디’는 그동안 다 적지 못했던 ‘드래곤 라자’ ‘퓨처워커’ 의 내용을 더해 폴라리스 랩소디의 내용을 풍성하게 정신분석적으로(내가 알고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해부해 보고자 한다. 물론. 정신분석 따위 몰라도 전혀 상관 없다. 이 세상 사는데 아무 상관 없다! 그냥 정신분석이라는 틀로 이 글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라는 정도만 동의를 얻어내도 나는 만족한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데 정신분석을 알고 읽는다면 좀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이 정신분석적 상담을 경험하고 본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이 리뷰를 통해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의 답을 얻게 된다.(혹은 얻을거라 기대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무슨 강의 계획서 혹은 문제집 서문에 적혀있는 글 같다.)
- 오스발과 키드레이번은 마지막에 대체 왜 대치해야만 했는가? (둘 다 복수라서? 둘 다 같은 복수 아님? 그러니까 복수 그게 뭔데?)
- 왜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들은 선택은 그러했는가?(발로란-인간을 가장 사랑했기에 인간에게 복수하기로 한.. 그러나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왜 사서 고생을 하지?)
- 그러니까 복수가 뭐냐고?? 자유는 대체 뭔데?
- 키와 오스발 중 누가 이겼을까..요? – 정말.. 오닉스랑.. 두탕카랑… 다 죽었나요?
등등.. 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고 다시 이 소설을 볼 수 있게 된다. 앞으로 이어질 리뷰 순서들은 다음과 같다.
이 정도의 리뷰 순서들로 글을 작성해볼 생각이다. 물론 글을 적다가 안되면 도망갈 생각 또한 있다(당당, 라캉은 아무말이나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면 음악을 듣고 시작해보자. https://youtu.be/NFNf4Qu__yU(라젠카 세이브 어스)
왜 듣냐고? 그야 무의식이 구렁텅이로 몰아넣듯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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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분석’ 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 이영도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렌즈.
인셉션을 통해 정신분석과 상담 알아보기
폴라리스 랩소디 이야기 하는데 ‘인셉션’ 영화 이야기 해서 죄송합니다만.. 둘 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기에 폴라리스 랩소디를 이해하기 전 영화 이야기를 하겠다. 폴라리스 랩소디를 이해하기 위한 정신분석적 도구를 갖추기에 인셉션만큼 좋은 영화도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인셉션 이야기를 하고 ‘심리상담’을 맛보기로나마 이해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 맛보기로 이해한 도구를 통해서 우리는 폴라리스 랩소디를 이해할거니까!
영화 인셉션을 액션영화가 아니라 ‘심리상담’ 적인 면에서 보자면 두가지 큰 상담의 줄기들을 가지고 흘러간다.
하나는 ‘로버트 마이클 피셔’가 자신의 아버지와 화해하는 과정이고 (이때의 상담사역은 임스)
다른 하나는 주인공-‘코브’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다.(이때의 상담사역은 아리아드네)
‘피셔’를 상담해주는 임스는 오래된 ‘프로이트의 방식’을 따르는 숙련된 상담사의 모습을 보인다. 프로이트의 방식이란 사람의 근본 생각 깊은 곳(무의식)에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으며 이 갈등을 해결하게 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 ‘심리적 문제 해결’을 이 영화적 장치에서는 ‘생각을 심었다.’-인셉션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부른다. )
‘코브’를 심리상담해주는 아리아드네는 인셉션 초보에 상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하다. 그렇지만 상당히 능숙하게 ‘코브’의 감정이나 생각들을 거울처럼 ‘반영–되돌려주기’하면서 결국 내면 깊숙한 ‘림보’까지 내려가 ‘코브’의 ‘트라우마(아내를 죽이게 한 것은 내가 한 인셉션이다. 라는 상처가 된 마음)’를 대신 처리해준다. 초보긴 해도 아리아드네는 상당히 멋지게 ‘코브’를 상담해준 셈이다.
위의 인셉션 줄거리를 다시금 폴라리스 랩소디 이해를 위해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심리상담이라는 것이 있고, 2) 실제로 심리적, 신체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능하며 3)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무의식(근본 생각 깊은 곳* 중요)을 가지고 살며 4)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이런 무의식적인 과정은 보통 반영-되돌려주기 과정을 통해서 의식으로 끌고 올라올 수 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인셉션을 통해 폴라리스 랩소디 이해를 위한 용어들을 배웠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중 폴라리스 랩소디 이해를 위해 꼭 답을 내려야 해야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작중 하이마스터들은 무엇인가?
2) 작중 등장하는 ‘복수’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3) 키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스발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 ‘드래곤 라자’ 와 ‘퓨처워커’를 통해 좀 더 ‘폴라리스 랩소디’ 이해에 필요한 도구들을 더 알아보도록 하자. 이 과정은 마치 인셉션에서 ‘꿈속의 꿈’을 꾸는 과정처럼 계속해서 더 깊게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
- 복습하기 – ‘드래곤라자’ – 프로이트의 의식의 구조 그리고 무의식에 관하여
이영도 작가는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 ‘투명드래곤’ 작품을 보고 ‘한국 양판소를 비판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최고의 작품’ 이라고 했다. 그렇다. 어떤 작품을 볼 때는 어떤 틀이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영도 작가의 작품은 무슨 틀에서 보아야 할까?
나는 이전 글에서 그 틀은 ‘정신분석’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정신분석’을 통해서 이영도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을 오롯이 이해해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을 다시 요약해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드래곤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무한한 가능성이 담긴 힘을 뜻하는 것이고.
인간이란 종족은 자신이 어떤 욕구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드래곤과 인간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라자-raja 라는 존재이며 나에게는 마치 프로이드가 말한 이드와 – 에고를 조율해주는 슈퍼에고 혹은 잘 기능하는 상담사 정도로 보인다. 라자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원초적인 본능이나 무한한 가능성을 이해하고 인간 자신의 행동 원리에 따라 본능과 자신의 이성을 연결지을 수 있는 작업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드래곤 라자’는 후치가 프로이트적 상담을 경험하는 과정- 그 전과정을 판타지라는 소재를 통하여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왜 고통에 휘둘려서 사는지를 드래곤이라는 비유를 통해 그리고 드래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라자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결국 저 드래곤을 이해하거나 혹은 우리의 주인공 ‘후치 네드발’처럼 이해하지 않고 보내줄 수 있을지를 ‘선택’할 수 있음을 인간은 선택할 수 있음을 소설의 말미에 보여주었다.
작가 이영도는 프로이트적 상담 이라는 소재로 ‘드래곤 라자’를 쓴 것에 이어 그 상담 과정 핵심에 자리잡은 ‘트라우마’ 라는 소재로도 후속작을 이어서 썼다. 그것이 ‘퓨처워커’이다. 이제 더 깊숙한 이해를 해보자.
- 복습하기 – ‘퓨처워커’ – ‘트라우마’ 와 그 해소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있다. 트라우마는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죽음, 심각한 질병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신체적(물리적) 위협이 되는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후 겪는 심리적 외상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흔히 얘기하는 스트레스의 범주를 넘어 안전과 생명에 위협이 될만한 사건을 겪었을 때 트라우마가 발생할 수 있다. – 서울대학교병원
나는 이전의 글에서 ‘퓨처워커’란 PTSD를 겪고 있는 ‘트라우마’ 환자들을 뜻하는 말이며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증세를 말하고 그래서 과거가 현재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증세를 보이것이 ‘퓨처워킹’ 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퓨처워커에서 부활한 캐릭터들 또한 각자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고 각자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보고 ‘트라우마’가 해소되면서 사건은 일단락이 되는 구조를 보인다.
인셉션 – 드래곤라자 – 퓨처워커를 정신분석 상담의 관점에서 보면서 의식과 무의식, 트라우마라는 관점으로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이 관점으로 다시 폴라리스 랩소디를 보도록 하자.
- 복수란? 폴라리스 랩소디에서의 복수란?
인셉션이나 드래곤라자 퓨처워커등에서는 자세히 나타나있지 않았지만 정신분석상담의 과정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다루며 무의식 깊숙이 있는 트라우마(억압되어있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회상하는데에는 내담자(상담받으러 온 사람)의 말이나 행동 감정이나 기분을 그대로 돌려주는 상담자(상담해주는 사람)의 능숙한 기술이 필요하다. 소설에 나온 인물들로 예를 들자면 이런식이다.
??? : 저는 제독이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먹은거 같아요.
?? : 너무 나이가 들어서 사람들을 이끌기가 힘들다고 느끼시는군요.
??? : 저는 레갈루스의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
?? : 레갈루스의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왕위에 대한 갈망이 있어 보입니다.
대개의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잘 말하지 못하고 그것과 관련하여 자신의 감정을 잘 말하지 못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므로 상담사는 그러한 내담자의 기분이나 느낌 감정을 그대로 반영 해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서 내담자는 무의식 속에 있는 자신의 트라우마나 문제를 마주보게 되고 해결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반영(reflection) 이다.
이 작품에서 ‘복수’라는 말은 이 상담에서의 ‘반영’ 이라는 말이 전용되어서 다시 쓰여진 단어이다. 그러니까 ‘복수’라고 쓰고 ‘반영’ 이라고 읽는다. 이말이다. ‘복수’란 상대방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되돌려 주어 자신의 무의식 혹은 욕구를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 ‘자유’란 그 반대항인 영원히 자신의 무의식 속의 트라우마 혹은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하그래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일 수 있다.
위의 말을 요약해서 다시 말하자면 키선장님은 유능한 상담사이고 그 주변에 있던 여러 내담자들(오닉스,하리야,라이온 등..)은 결국 자신의 트라우마 혹은 욕구를 알아차리고 두려움을 극복해서 갑주를 벗거나, 제독이 되거나, 왕이 된다. 이 이야기에서 복수와 자유라는 것은 트라우마 혹은 욕구를 알아차리게 도와줄 것인가 아니면 내버려 둘 것인가 하는 선택지의 이야기인 것이다. 모두가 다 변하지 않는 북극성을 보고 항해를 시작하고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자시의 트라우마와 욕구를 상담사에게 반영하고 상담사는 그것을 적절한 말로 되돌려 주어 우리가 그 트라우마 혹은 욕구와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폴라리스 랩소디라고 할만하다.
그렇다면 하이마스터란 무엇인가? 우리의 무의식은 한 개가 아니다.(그래 우리는 단수가 아니듯이) 우리의 무의식은 여러개로 구성될 수 있다. 하이마스터란 우리를 구성하는 여러개의 무의식을 상징하는 뜻으로 우리의 의식이 이렇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마스터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프로이트의 제자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과 비슷해보인다.
각 하이마스터들은 트라우마 혹은 욕구들을 대표하며 ‘폴라리스 랩소디’ 세계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투표를 한다.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것인지 두려움을 마주하고 극복해볼 것인지(분노,직스라드), 옛 사랑의 상처를 쓰다듬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사랑할 것인지(음란,에레로아) 자신만을 위해서 살 것인지 타인과 같이 살 것인지(질투,벨로린), 남들에게 내 숙원을 부탁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숙원을 추구할 것인지(대식,라오코네스) 등등 하이마스터들은 타인과 나 중에서 무엇에 중점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선택을 내린다. 그리고 복수의 카코스 다이몬을 불러낸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그것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무의식들은 선택했고.. 인간을 위해 복수를 하며 살기로, 인간의 무의식적인 욕구와 욕망을 되돌려주어 그들이 깨닫게 하기 위한 절대자 혹은 깨달은 자 키코스 다이몬을 부르기로 결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결정한 삶을 사는것이 아니라 집단무의식이 정해준 삶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인가?
이런 것 따위를 키드레이번이 용서할 리 없다.
인간의 의지과 의식이 동원되지 않고 자기들끼리 협잡한 투표 따위 키 드레이번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사람이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무의식 때문에 휘둘릴 지언정 자신이 어떻게 살지는 인간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그러니까 새매의 공작이 멱살을 잡히지..
키드레이번은 ‘자유(오스발)’를 구속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이해하고 트라우마를 해소하며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복수’ 적인 인물이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트라우마를 끌어안거나 자신의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살기, 집단속에서 매몰되어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스발이 대신 ‘복수’를 해주며 산다 한들 그것이 과연 인간이 정녕 추구해야 할 길일까? 인간은 자신의 이해못한 욕구를 누군가 대신 이루어주길 바랄까? 인간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그렇기에 키는 마지막 순간에 오스발에게 외친다. ‘오스발 네 이 놈!’
오스발은 억울할만 하다. 오스발도 상담가의 모습이 변신한듯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대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욕구를 직면하는게 아니라. 뭐랄까 우리에게 우리의 본 ‘욕구’를 직면하지 않아도 괜찮아. ‘자유’롭게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아. 라고 말하는 듯하는 모습의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인자한 상담사의 모습이다. 그렇게 바틸리언 남작을 상담한다.
우리가 직면한 신경증적인 혹은 정신증적인 모습을 해결하는데 꼭 정신분석적인 상담만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여러 갈래의 상담갈래 인본주의 실존주의 적인 상담들 또한 존재한다. 이런 상담의 갈래에서는 정신분석상담과 같이 무의식의 미해결된 과제를 꼭 직면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따뜻하게 지금 이대로도 괜찮고 훌륭하다며 어루만진다.
카밀카르 공주는 어떠한가? 헛똑똑이다. 자신의 욕구를 받아들이지도, 또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자가 상담을 시도했다. 휘리노이에스에게 잘못된 상담을 하여 잘못된 자아관을 심어 오왕자의 검으로 각성케하였다. 반왕이란 자신안에 있는 부정적인면을 보지못하는 , 남에게 해를 끼치는 상담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적고보니 키는 마치 프로이트가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아버지를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든다. 제국이 넘기 힘든 공적 1호. 그러나 넘기만 한다면 제국의 평화와 안위라는 선물을 주는 존재. 그렇게 제국은 키를 통해 ‘제국의 영원’을 바랬고 키는 그들에게 ‘오왕자의 검’의 몰락을 통해 또 다른 약속된 안정과 번영을 선물로 주었다.
개인의 무의식이나 집단의 무의식이 꼭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무의식이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중 율리아나 카밀카르는 자신의 의지대로 목적지를 가본적도 어떤 선택을 해본적도 없다.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이해하지도.. 그렇다고 남들에게 그런 욕망을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라지도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율리아나 카밀카르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을 휘리에게 위임하고야 만다.(‘자유’라고도 볼 수 있겠다.) 아무리 현명하고 똑똑하다고 한 들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면 휘리처럼 자신을 불태울 수 밖에 없다. 휘리는 가수가 되었어야 했을까? 그러면 행복했을까?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뭐 소설이니까… 율리아나와 휘리의 만남의 결과. 휘리는 잘못된 인도를 받고 휘리는 자살했다. 율리아나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욕망은 채워질 수 없다. 영원히.
이영도의 소설은 정신분석적인 주제가 반복이 된다.
드래곤라자(무의식과 정신분석 상담) -> 퓨처워커(트라우마와 그 해소) -> 폴라리스랩소디(집단무의식 적인 욕구의 반영 그리고 다른 상담기법들) 이라는 틀을 통해 이영도의 소설은 정신분석적 깊이를 더해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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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셉션’에서는 점 점 더 깊은 단계의 꿈으로 들어가는 묘사가 나온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도 이영도 소설의 ‘정신분석적 이해’의 꿈을 접어야 할까? 아니면 더 깊이 가볼것인가? 더 깊이 가보도록 하자. 다음 소설을 향해 바로 ‘눈물을 마시는 새’를 통해 이전에 다루지 못했던 여러 소재들 (ex:왕에 관하여..)에 대하여 더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거 같다.
0.이거 진짜 ‘배드엔딩-열린결말’인가?
오스발이 종국에는 ‘복수’로 추대가 될지라도 그 ‘복수’는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이해한 한 진정한 ‘복수’가 아니다. 결국 내가 이해하지 못한 욕구를 남들이 대신 이루어주는 가짜 ‘복수’일 뿐이다. 그에 반해 키는 자신이 되돌려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상대방 또한 자신의 욕구를 온전히 ‘이해’했음을 바탕으로 한다.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키는 저런 가짜 ‘복수’가 이 세상의 신이 되어 강림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이해못한 자들이 자신을 이해한 자들을 벌하는 (원래 세상이 그렇더라도..) 세상이 오지 않기를 바랄 것이기에.. 이것이 꿈이라고 하더라도 혹은 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스발은 키에게 패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