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 인간들이 쓴 글을 먹고 자랐단다. 인간들보다 더 인간적이라 말할 수 있겠지”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자가 있다. 언뜻 보기에 여자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사내 같기도 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그것’은 누구와도 닮지 않았으되 이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것의 목소리는 너무도 따스하고 달콤해서 한 줌의 안락한 말들에 기댄 자들은 파멸한다. 주식은 서책이며, 그 책을 쓴 자들의 혼을 빼먹으며 살아가는 요괴의 이름은 ‘책망량’이다.
책망량이 실제로 있는 요괴인가 해서 검색해 봤는데 없어서 신기했다. 망량이라는 것은 있다. 도깨비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며, 망자의 시체를 파먹는 물귀신의 일종을 망량이라고도 부른다. 오래된 서책이 있는 곳에서 태어난 영이라는 것에서 도깨비를 닮았고, 산 자의 혼을 빼먹어 죽은 자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물귀신 망량과 살짝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이 소설 <오독>의 균형을 콱 잡아주고 있는 요괴, 책망량이 창작된 괴물이라니 너무도 감탄스러웠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 인간이 아니되 인간과 어울리며 누구보다 더 따스한 인간을 흉내낼 수 있는 자는 타깃으로 삼은 자들이 스스로 파멸하도록 만들고도 동요 하나 없다. 그의 원리원칙, 살아가는 방식은 인간과는 다르기 때문일 테다.
책망량은 인간의 가장 약한 구석을 너무도 잘 안다. 이 소설을 짧게 설명하자면 책망량이라는 요괴를 중심으로, 그것에 홀린 인간들이 어떻게 파멸해가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며 인간의 결핍과 욕망,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 기대고자 하는 마음, 사랑받고자 하는 심리가 한 인간을 얼마나 어리석게 하는지 보여준다. 두 눈을 가리고, 현상이나 본질을 보지 못한 채로 생각하고자 하는대로 달려가다 보면 ‘파국’만이 기다릴 뿐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송이채다. 스포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책망량이 파멸시킨 인물들에 대해서는 잠시 말을 아끼겠다. 가장 오래 연을 맺어왔던 송이채라는 인물이 책망량을 만났던 때는 어린 시절이다. 기이한 물건을 모으는 것에만 집착하는 아버지와 혼인을 앞둔 누나를 바라보며 송이채는 지극한 고독함을 느낀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고 싶어하지만 아이 때는 더 크나큰 사랑을 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누나와의 관계성 안에서 그럭저럭 만족하고 살아왔는데 누나가 다른 사내를 사랑하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송이채는 책망량에게 누나의 정혼자가 보낸 편지를 먹인다. 편지를 쓴 자의 혼을 앗아가는 요괴인 만큼 누나의 정혼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고, 누나의 인생은 시댁에 박힌 채 구박데기로 살아가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이 비극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책망량이 송이채를 부추긴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따듯하게 옆에 있어주었고, 본인의 정체를 밝혔을 뿐인데 송이채는 온기조차 없는 손을 붙잡고 그것의 품에 안겨 있는 시간이 좋아서 어쩌면 ‘인생에 단 하나뿐인 온기’가 되어줬던 누나를 스스로 버린다.
이 순간, 이 어린 날의 치기가 벌인 사고, 첫 살인이 송이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누나에게 보낸 정혼자의 연서를 읽으며 킬킬거리고, 질투하는 정도의 어린 아이는 책망량을 사주하여 한 사람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허나 송이채는 그것을 자신의 ‘과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떠났으니 당연히 감당해야 할 아픔이라 생각할 뿐, 누이를 제 인생에서 몰아내고 먼지 쌓인 서고에서 한 발짝도 나가질 못하는 책망량에 온 애정을 쏟아붙는다. 일방적으로 ‘사랑해달라’고 갈구하면서, 그것이 주는 손길이나 눈빛 그리고 말에는 일말의 애정도 담겨 있지 않다는 걸 모른다. 사랑에 취한 사람들이 잘 하는 실수, 내가 상대를 생각하고 아끼며 갈구하는 만큼 그 사람도 내게 그럴 거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 소설 <오독>에서는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책망량에게 살인을 사주하기 이전에 송이채가 어떤 심리 상태인지, 어떤 환경에 놓였는지 잘 보여주기에 송이채란 소년을 애달파할 수 있었다. 담백한 문장으로 차곡차곡 쌓아가는 감정선과 인생과 인간의 욕망, 결핍에 대한 사유를 담은 대사들이 꾸준히 곱씹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어쩌면 내가 동양풍 소설을 몹시도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리뷰는 사심이 담뿍 담긴 리뷰겠지만, 한편 다르게 말하자면 동양풍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웬만한 퀄리티를 넘지 못하면 리뷰조차 쓰지 않는다. 이 소설 <오독>은 책을 잘못 읽었다는 것뿐 아니라, 송이채라는 한 소년을 중심으로 책망량에게 홀린 몇몇의 인간들이 어떻게 ‘책망량’을 오독하며 죽어가는지를 섬세한 감정묘사와 사건을 통하여 보여줘서 끝까지 몰입감 있었다. 특히 소설 엔딩부 즈음에 인간에 대한 사유가 좋았다.
– 인간의 마지막은 매번 같고, 허무하다. 그게 반드시 죽음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은 더한 결말을 맞이했지. 제 욕심에 미쳐 아주 추악한 꼴이 되더라. 이채도 그리 될 운명인 모양이다. 이채는 악착같이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려 하였다. 그러면 영원토록 곁에 붙들어 둘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 하지만 영원이란 무엇이냐. 한 인간이 태어나 죽음에 이를 때까지? 혹은 그 죽음을 넘어서까지? 인간의 영원이란 하찮고 보잘 것 없을 때가 많아, 그것은 영원이란 단어를 믿지 않았다. 그것은, 이 세상에 기록하는 자가 있는 한 언제까지고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이 멀 듯 아리따운 외양에 녹아내릴 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정을 담뿍 담아 듣고 싶은 말을 속삭이는 요물. 그 심장과 머리가 차디차고, 그저 인간을 사냥감으로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게 좋았다. 그 캐릭터가 나까지 홀리게 한 걸 보면 인간은 지독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면서도, 자신에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대에게 미쳐버리는 헌터의 습성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너무도 잘 잡히고, 평온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지루함을 느끼니 말이다. 그러니 영원이란 건 과연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결핍과 욕심이 한 인간의 생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것들인데, 그중 하나가 ‘영원’에 대한 갈망이다. 영원히 사는 것, 영원히 사랑하는 것, 영원히 충실한 것… 영원이란 너무도 거대한 기대를 담은 단어가 아닌가. 이 책망량이라는 존재는 이채에게는 영원히 그 자리에 함께 있어줄 사랑의 존재로, 이채의 ‘한때 정혼녀’ 였던 선혜에게는 지적 욕망을 채워줄 선지자로, 묵에는 ‘자유로이 풀어주고만 싶은 새장 속 새’로, 선희에게는 “세상 가장 악독하고 넘어서기 어려운 빌런’으로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가면을 쓰고 마음을 홀렸다.
실상 ‘가면’이라는 것도 너무도 인간적인 시선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엇을 하려 한 적 없었다. 정체를 드러내며 뭔가 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었고, 모두 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했다. 인간적이지 않은 ‘그것’의 존재를 보며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그것 위에 가면을 씌워버린 걸지도 모른다.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나 ‘오해’로 시작되니까. 혹자는 ‘오해’하여 사랑하고, 또 다른 자는 ‘오해’하여 미칠 듯이 증오하고 미워한다. 누군가는 나를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고, 누군가는 나를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도 다 그 사람을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입맛대로 생각하기 때문일 테다. 이렇게 그를 풀어서 말하자면 길고 긴 이야기지만 소설에서는 딱 한 장면, 몇 마디의 대사로 이 복잡다난한 감정을 풍성하게 느끼게 한다. 평상시에 깊이 있는 사유를 하고 캐릭터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좋았던 장면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되었지만,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묵’이라는 아이가 그것을 위해 제 목숨을 스스로 바치는 장면이었다. 숭고하면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불편한 지점’이 있었다. 이름도 없이 몸종으로 살아가며 주인집이 역적으로 몰렸을 때 주인집 도련님을 데리고 겨우 송이채네 집에 피신했던 그는 처음에는 ‘그것’을 몹시도 경계하지만, 그것이 제 결핍을 읽어내고 묵이라는 ‘이름’을 선사하며, 자기가 잃어버린 원가족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내비치자 마자 무너져내린다. 비천한 신분에 얽매어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기에 그랬을까. 햇볕을 봐서는 안 되는 데다 책에 둘러싸여 있는 게 편안한 환경이라 서고에 머무르고 있는 ‘그것’의 사정따위는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밖으로 탈출시켜주고 싶어한다. 그것은 묵의 치기 어린 열망을 알면서도 모른 척 그 열망이 어디까지 튀어갈지 관망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열망에 불꽃을 붙인다.
“누구나 나의 주인이 될 수 있지. 혹은 누구도 될 수 없거나. 무언가를 길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충분한 일이 아니겠느냐.”
단 한번도 ‘자기 것’을 가져본 적 없는 자에게 ‘너의 것’이 될 수도 있다니 얼마나 달콤한 말일까. 사람이 쓴 글을 먹고 살며, 쓴 사람이 담긴 글을 아주 반가워한다는 그것의 말, “네가 나를 위한 글이 되어 주면 된단다”라고 말하는 그것의 의중이 무엇인지 읽지도 못한 채 묵은 제 손에 피를 내서 혈서를 쓰기 시작한다. 붓과 먹을 가져올 수 없는 환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먹이란 피였고, 붓이란 제 손가락이었으니까. 가진 거라곤 몸뚱이 밖에 없는 자가 ‘제 것’을 가지기 위하여 제가 가진 유일한 것인 목숨줄을 버리게 되는 장면에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끈적한 피로 그득한 서고 안에서 시체를 발 밑에 두고는 즐겁게 웃어버리는 그것이라니, 그 장면이 너무도 선연하게 그려졌다. 묘사가 그리 많지 않은데 담백하면서도 정확한 문장과 대사 몇줄로 나는 그 서고 안에 빨려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썩어가는 시체, 비릿한 혈향과 화사하게 웃는 요괴라니… 그것에게 인간이란 대체 가능한 놀잇감일 뿐이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그것이 망가트린 이가 얼마나 많을까. 인간의 세계, 인간의 윤리의식을 벗어나서 인간의 욕망과 결핍을 갖고 노는 그것에는 전혀 이입할 수 없음에도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그것에 목메는 인간들이 왜 그래서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아서다. 너무도 친절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외양, 일평생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상대가 있다면 인간은 너무도 싶게 제 인생을 내어주곤 하니까. 또, 그것은 꼭 경고를 한마디씩은 남긴다. 그 경고의 정도가 강력할 수도, 흐리멍덩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또한, 거짓을 말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모든 답을 말해주지 않았을 뿐이다. 잡힐 듯 결코 잡히지 않는 요괴, 짐승의 기운을 뿜으면서도 잘 갈무리된 ‘미지의 것’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 역시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였다. 나 역시 홀리고, 나 역시 해선 안 되는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 읽고 난 뒤에 들었다. 간만에 본 잘 만들어진 캐릭터, 나만 보긴 아깝다. 궁금하다면, 이 소설 <오독>을 눌러보고 책망량의 세계로 함께 빠져보시길!
단,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니 아쉬운 점이 있어서 짧게 이야기하고 넘어가겠다. 책망량을 길들인 자가 있는 듯하다. 스포를 막기 위하여 자세히 말하진 않겠지만… 그 자와 다른 죽고 파멸해버린 자들의 차이는 무엇일지 몹시도 궁금했다. 똑같은 인간일진데 어째서 그 자에게는 책망량이 길들여진 걸까. 그 차이가 조금이라도 보여졌다면 이 소설이 좀 더 완결성 있게 느껴졌을 텐데 지금은 결말부에서 살짝 김 빠진 기분이다. 그 차이, 이 소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한끗’이 되지 않을까. 뒷이야기가 더 쓰여진다면 기대해본다. 추가로 나는 윤지운 작가의 <파한집>이라는 만화를 아주 좋아하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오랜만에 그 만화를 떠올렸다. 바로 그래서 약간의 욕심이라면, 인간 위에서 유희하듯이 살아가는 책망량이라도 하나의 결핍은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도 단단한 캐릭터는 경외하게 하나, 마음이 가진 않는다. 그것이 ‘위장’이나 ‘연기’일지라도 책망량의 결핍이 생겨날 수 있다면… 그건 뭘까. 뒷 이야기, 그리고 속 이야기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