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 바스락.
화장실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재건축을 앞두었을 만큼 낡은 빌라, 웬만큼 큰 벌레나 몸피가 작은 생물이 낼 만한 소음은 아니다. 적어도 살집이라고 할 만한 게 적당히 붙어 있고 다리는 네 개쯤 붙은 생명체. 곤충은 아니고 동물이다. 구체적인 몸집과 형태가 그려졌다면 세부적인 상상을 해보자. 몸에 난 털은 회색, 삐죽 튀어나온 코에는 빳빳한 흰색 털이 숭숭 나 있다. 궁둥이 뒤로는 긴 꼬리가 뻗어 있고 얼굴에는 구슬처럼 박힌 눈이 두 개. 설마 집에서 나올까 싶다가도 부서지는 콘크리트 벽을 바라보자니 왠지 한 마리쯤 살고 있을 것도 같은 ‘그것’.
발음마저 뒤틀린 듯한 생명체인 ‘쥐’는 이제 보통의 가정집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 동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선가 분명히 서식하고 있고, 때로 그 개체를 무시무시하게 불려 인간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특히 의학적으로 쥐는 위생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리기도 했으니 도시가 개발되고 청결해진 세상에서 가장 먼저 몰아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쥐는 여전히, 그리고 종종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다. 아직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시골이나 수십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빌라에서는 쥐가 출몰하기도 한다. 배수관을 타고, 열린 문틈 사이로 그 생명력 질긴 동물은 인간의 생활 반경 안에 조금씩 침입한다.
쥐를 몰아낸 역사가 있는 인간에게 그들은 가엾게도 ‘위해 동물’이다. 햄스터는 가까이 두고 ‘반려’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쥐는 보면 일단 소리부터 내지른다. 비위생적이고 오히려 해를 입히는. 우리는 이런 유의 동물 소리에 민감하다. 곤충이 날개를 부비는 소리나 콘크리트 벽 안에서 딱딱 울리는 원인불명의 소리.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집안에서 내는 소음에 크게 예민하다. 소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날에는 그 근원을 박멸하고자 애쓴다. 어쩌면 인간은 산업화나 도시화 이래 그들의 존재에 불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의 심기를 거스르는 이 소리에 조금만 집중해 보자. 인간과 단절되어 있던 불쾌한 생명이 집 안에서 내는 생존의 소리. 바스락 바스락. 쉭쉭. 타닥타닥. 찍찍.
이 집에 쥐새끼 한 마리가 살고 있다
피스오브마인드 작가의 단편 〈쥐〉는 쥐의 소리에 심기가 거슬리는 한 인물과 그의 주변인들의 반응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며 현대사회 속 공감의 부재를 다룬 소설이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한 마리 쥐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재은은 자신의 낡고 오래된 집에서 쥐를 발견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쥐라니. 인간이 득시글거리는 이 빌라 안에서. 얼마나 불결하고 징그러운 생명인가. 배관공을 불러 변기를 뜯어도 원인을 알 수 없다. 심지어 다시 나오지도 않는다. 재은이 본 쥐는 실제의 쥐를 넘어선 환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쥐’ 자체보다는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징그럽거나 불쾌하고 유해한 경험을 의미한다. ‘쥐를 봤다’라는 행위는 머리에 강렬하게 남아 서서히 재은을 좀먹는다. 한번 집에 들어와 눈을 마주친 쥐를 잊기란 쉽지 않다. 이 집에서 쥐의 유일한 목격자는 재은이다. 재은은 그 소름 돋는 집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사를 결심하고 집을 내놓으려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재은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심리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남편과 언니, 부동산 주인 여자는 오히려 조금만 기다리면 눈덩이처럼 값이 오를 그녀의 집에 주목한다. 너, 그거 나중에 아깝지 않겠어? 배 아프지 않겠어? 그들의 반응은 굴러 들어온 1등짜리 복권을 걷어차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지금 당장 불안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재은의 마음은 누구에게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재은의 남편은 무관심한 인물들의 대표 격이다. 그는 심지어 “그럴 리가 있나”라며 재은의 목격을 착각으로 치부해 버린다. 상대를 무시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그의 경험을 없는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 네가 뭘 잘못 본 거겠지. ‘가스라이팅’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 멸시의 방법은 상대의 경험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으로 모자라 그에게 ‘유난스럽다’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재은은 공감의 생각이란 조금도 없이 재건축에만 집중하고 있는 남편과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예로부터 집이란 안온한 공간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야 했다. 타인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가장 안전한 곳. 재은에게 집은 그런 장소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집의 개념은 점차 바뀌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어쩌면 대부분 사람에게 집은 재물 또는 그것을 불리는 수단일 뿐이다. 오롯한 하나 마련해서 나의 뿌리를 내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집은 부동산 시세나 이해관계에 쓸려 온데간데없다. 재은의 남편에게 집은 그저 로또다. ‘몸테크’라는 말이 돌 정도로 재건축 아파트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얼마만 버티면 돈이 무더기로 떨어지는데 그걸 못 버티다니. 미련하기도 하지. 언제부터 집은 이토록 홀대받았을까. 쥐가 나와도 모두가 쉬쉬하는, 병든 공간으로 바뀌어버린 걸까.
재은의 불편함은 ‘집’이라는 장소와 ‘쥐’라는 동물을 경유해 형상화된다. 재은에게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할 곳은 들어온 경로를 알 수 없는 한 마리 쥐에게 서서히 점령당한다. 그 징그러운 으스스함이 구석에서부터 재은을 조금씩 부순다. “너도 쥐랑 눈을 마주쳐 보라고” 몸을 통과하는 실제의 경험 없이 그저 재산의 몸피를 불리는 데에 혈안이 된 남편을 향해 재은은 중얼거린다. 체험을 공유하는 것. 재은이 남편에게 바라는 건 단지 공감이었다.
이 각박한 세상은 집을 팔고 나가는 것조차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집을 내놓기 위해 방문한 부동산, 주인 여자는 “그래도 그렇지”라는 뒷말을 찝찝하다는 듯 뱉는다. 이사 가겠다는 재은의 말에 언니는 “으악, 으악하고 몸서리를 치”다가 결국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냥 살아’. 언니의 말은 부동산 주인 여자보다 훨씬 직접적이다.
“넌 쥐 나오는 집이라도 있지. (…) / 언니는 같이 사는 남편이라도 있지.”
언니는 재은에게 집이 있음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재은은 언니와 물리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심리적으로도 가까울 형부를 부러워한다. 쥐 나오는 집이라도 갖고 싶은 마음과 집에 함께 사는 남편(공감해주는 남편)을 바라는 마음은 좁혀질 수 없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에게는 상대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단편 〈쥐〉는 재은의 낡은 빌라에서 쥐가 발견된 이후 끊임없이 나열되는 경험과 공감의 부재를 끈질기게 좇는다. 사실 이 둘은 현대사회에 극도로 결핍되어 있다. 나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이 다를 때,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공감’ 정도는 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소설은 ‘불행 배틀’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도는 이 세상을 마치 재건축 직전인 빌라로 축소해 놓은 것 같다. 누구도 공감하지 않고 그저 공감받으려고만 하는 일방향의 외침은 메아리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재은은 자신을 좀먹는 ‘소통의 벽’이라는 쥐를 만난다.
재은이 내놓은 매물 공고는 주민이라는 한 사람의 항의 전화로 채 며칠을 넘기지 못한 채 삭제된다. 그 주민이라는 사람은 알고 보니 남편이다. 마치 한 사람을 위해, 아니 하나의 집을 지키기 위해 온 세상이 담합하는 기분이다. 경험을 인정받지 못한 채 세계에서 소외되는 것. 재은이 처한 상황은 이렇다.
그 상황에서 재건축을 위한 안전진단이 통과된다. 집값이 두 배로 뛴다는 말을 들은 재은에게서 갑자기 쥐를 향한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진다. 안전진단이 통과될 정도로 낡은 아파트였으니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할 수밖에.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것 같다. “운명 공동체라면 고통을 분담하는 게 당연”하다. 그까짓 쥐가 뭐라고. 다른 집도 다 나온다지 않는가. 다른 집들에도 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지 않는가. 그럼 우리도 참고 살아야지.
혹자는 이런 재은의 태도가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속물적으로 변했다고 평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재은의 변화와 주변인들의 무시는 완전히 다르다. 재은의 자조는 그들과 결코 같아질 수 없다. 그에게는 집에서 쥐를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집값이 두 배로 오른다는 기쁨에 잠시 쥐에 대한 걱정을 미루어 두면서도 재은은 의미심장한 마지막 한 줄의 생각을 남긴다.
“참고 살다 보면 쥐는, 또 어딘가로 이동할 것이다”. 누군가는, 아니 “몇 층 몇 호의 어떤 이는” 오늘도 그 쥐와 눈을 마주치며 살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야지. 그러면서 다들 살아가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의 결말에서 재은은 쥐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뒤틀린 마음을 갖게 된다. 두 배로 뛴 집값에 익숙해진 후, 재은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고 하자. 상대에게 그는 어떤 말을 할까. ‘그거 별거 아니야. 조금만 참으면 집값이 두 배로 뛰는데 그걸 왜 못 참니“. 그리고 뒤에 한마디 덧붙일 것이다. ’나도 그런 적 있는데‘.
재은이 할 이 말은 상대의 경험을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한다. 그러나 그 안에 공감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상대가 하고 있는 유의미한 고민을 전부 틀린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차라리 공감하지 못하는 것보다도 나쁘다. 우리는 이런 말을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자주 사용할까. ’내가 그거 해봤는데‘, ’그거 다 해봐야 소용없다‘ 이런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의미와 가능성을 꺾고 있을까. 재은의 변화는 독자에게 날이 선 칼날처럼 서늘하다.
물론 소설 끝에서 보이는 재은의 변화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 않다. 어쩌면 그는 그냥 자조하듯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멈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질까. 어차피 집이 팔리기 직전까지 재은의 마음은 편해질 수 없다. 한 마리의 쥐로 인해 깨어진 재은의 마음은 빌라가 안전진단을 통과한 후에도 완전히 봉해지지 않거나 더욱 뒤틀릴 것만 같다. 긴 앞니로 무언가를 갉아 먹어야만 살아남는 쥐처럼, 일상에 생긴 작은 변화로 한 사람은 이렇게 큰 상처를 입는다.
이 실존과 허구를 넘나드는 쥐는 여기저기 옮겨 다닐 것이다. 그리고 분명 재은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쥐를 발견한다. 그는 같은 순서로 공포를 느끼고, 무시당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시간을 통과할 것이다. 오늘도 이곳저곳에서 우리는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살을 부비고 산다. 마치 번식력이 뛰어나 이리저리 퍼지는 쥐처럼 무관심이 전염되고 있다. 그 안에서는 투쟁하는 이들도 있지만 순응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지 않을지언정 나의 경험으로 타인을 더 판단하지는 말자. ’너, 그거 진짜 별거 아니다. 내가 다 해봤어.‘
아니, 당신은 그 사함이 처한 상황이 별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쥐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경험한 무시와 경멸을 애써 있는다. 자신은 주류가 되었다는 확신과 함께.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는 몰라도 ’옳은 일‘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나의 보금자리가 돈벌이 수단으로 바뀔 수는 있지만, 그것이 쥐가 나오는 집에서 살았던 기억까지 잊게 해서는 안 된다. 그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니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내가 잊은 ’쥐‘는 무엇일까. 지금도 내 머리가 끊임없이 망각하는, 그러나 분명히 목격하고 생생히 몸으로 통과한 기억은 무엇일까.
오늘도 하수구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너의 소외는 어떤 짐승의 모양이었느냐는 물음이 타다닥 가벼운 발소리를 낸다. 콘크리트가, 부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