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가 살 만한 외계행성을 찾는 천문학자의 노력이 이런 식일까 싶었다.
네, 접니다.
전 대학원 때 외계행성관측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직접 발견한 외계행성은 없고, 결국에는 좀 특이한 갈색왜성(그런게 있어요)과 원시행성계원반(또 그런게 있어요)에 대한 연구를 하고 논문을 썼어요. 천문학자가 외계행성을 찾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뭐, 결론적으로 말하면 ‘증명된 사실’의 이남민 박사의 말이 맞습니다. 몇 가지 힌트는 있겠지만 결국은 복권 뽑는 심정으로 관측을 해봐야 알 수 있는 거죠. 행성이 있을 것 같은 곳에 아무것도 없거나, 설마 행성이 있을까 싶던 곳에서 행성이 발견되고는 하거든요.
저는 사실 이산화 작가님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글 쓸 의지를 반 쯤 잃고 말아요.’아마존 몰리’를 읽고 ‘아, 작가님이 대학원을 나오셨구나’하면서 동질감을 느꼈고, 몇몇 다른 작품에서도 아카데미아의 향기가 흘러내려서 내심 반갑고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빼어난 글솜씨 속에 기상천외한 발상을 담아내는 것을 볼 때마다 경험의 껍데기가 비슷하다고 함부로 비교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져요.
전 글쓰기 시작한지 겨우 두 달 남짓이 지난 애송이입니다. 그리고 항상 SF를 쓰고 싶은데 자꾸 호러가 먼저 튀어나와 고민 중인 이공계이기도 해요. 그런 제게 이산화 작가님의 작품은 일종의 이상형에 가까워요. 나도 이런 작품 쓰고 싶다! 하지만 이상은 도달할 수 없기에 이상인거죠. 아마 전 이런 작품 못 쓸겁니다. 그래서 글 쓸 의지를 반 쯤 잃어요.
그리고 다행히 남은 절반의 의지는 작가님의 작품에서 배울 점을 찾기 위해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절 절망시키면서 많이 배울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을 많이 써주시길 부탁드려요.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서,
‘증명된 사실’은 제가 지금껏 브릿G에서 읽은 모든 작품 중 가장 오싹한 결말을 가진 이야기입니다.
지구와 태양계, 그리고 은하는 한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공간 속을 맹렬한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건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과학동아나 뉴턴,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과학 잡지들에도 수없이 등장했고 지구의 이동속도가 얼마인지도 셀 수 없을 만큼 여러번 계산되었고,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했죠.
하지만, ‘귀신 보는 소녀’라는 흔해빠진 소재와 절묘하게 엮어 오한이 서리는 코스믹 호러를 만들어 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크툴루나 니알라토텝이 눈 앞에서 날뛴다고 해도 사실 그들이 허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걸 누구나 알죠. 하지만 지금도 우리를 감싸고 있는 우주는 크툴루 신화의 위대한 신들보다도 우리에 대한 관심이 더 없어요. 아예 관심이란 걸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런 곳에 홀로 덩그러이 놓인다면, 소리 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로. 어떤 의미에선 이런게 진짜 코스믹 호러라고 생각해요.
처음엔 영혼이나 사후세계를 연구한다며 귀신 보는 소녀가 등장했을 때까진 평범했어요. 이런 이야기가 어디 한둘인가요? 작가님의 매끄러운 문장력에 이끌리긴 했지만, 무슨 대단한 이야기가 가능할까 생각했었죠. 하지만 그렇게 친숙한 소재로 시작해서 어마어마한 우주적 공포에 이르고 독자의 뺨을 후려치기까지의 과정은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진행돼요.
그리고 소재와 발상도 뛰어나지만 그 효과를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건 연주라는 귀신 보는 소녀의 존재입니다. 처음엔 가벼운 유머처럼 할머니 이야기를 하지만, 마지막에 다시 할머니를 떠올리는 연주의 심정은 아마 독자의 상상으로는 그려낼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사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 작품의 결말이 제게 무시무시하게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는 어린 시절 꿨던 꿈입니다.
그 꿈 속에서 저는 우주공간 어딘가에 있는 작은 구조물 안에 갇혀 있었는데 그 안에선 미동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조그만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고, 그 시야의 끝엔 조그만 지구가 보였어요. 그리고 그게 전붑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공간 어딘가에 영영 묶여 있고 저 멀리 떨어진 지구에선 어제와 같은 오늘이 내일을 기대하며 흘러가고 있죠. 전 그 순간이 정말 오싹했어요.
하지만 이 작품의 결말은 그 악몽보다 더 무서워요. 부디 오늘밤 꿈에 나타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