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봐도 채도와 명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 넘실거리는 물결. 그리고 저 수평선 너머, 희미한 점으로 나타나 점점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졸리 로저.
사람들이 어떤 직업군에 종사하느냐에 따라 졸리 로저를 보고 보이는 반응은 천차만별로 갈릴 것이다. 동종 업계에 종사한다면 친밀감 혹은 경쟁 의식을 느낄 것이고, 상업에 종사한다면 치를 떨거나 공포에 질릴 것이며, 군경에 몸을 담고 있다면 짜증과 함께 소탕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지 않을까?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하나인 루는 의료계에 종사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지는 몰라도 앞의 세 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납치범인 주제에 ‘월급 보장, 정기 휴가 보장, 위험수당, 명절상여, 자녀 학자금 지원까지 들먹이며 자신을 스카우트하려고 하는 난바다 호 선장 오르를 보고 루는 한마디로 미쳤다고 생각한다. 납치해서 일하라고 말하는 것이 스카우트인지는 잘 생각해봐야겠지만.
오르가 제시한 조건이 맘에 들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루는 악명 높은 해적 난바다 호의 주치의 자리를 수락한다. 그 이후 선장 오르와 사사건건 투닥거리는데, 이 둘이 티키타카하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내용이나 무덤덤하게 서술되는 재치있는 문장이 딱 내 취향이었다. 정중하게 비꼬는 유머가 재밌어서 스크롤이 확확 내려가는게 아까웠지 뭐야.
루가 배의 주치의가 되자마자 사건이 빵빵 터진다. 본업(?)에 충실하게 해적질을 했다가 굽살이섬으로 가기 위한 추가 업무가 쌓이고 쌓이는데, 여기서 루와 오르의 과거가 본격적으로 엮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평범한(?) 대항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일 줄 알았는데, 굽살이섬의 탑과 움직이는 넝쿨숲과 쫓기는 성직자가 등장하면서 독자들의 흥미를 더더욱 고조시킨다. 완결까지 쭉 읽을 수 있었으면 무척이나 좋았겠지만, 현재로서는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기 직전인 것 같아 상당히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난바다 히치하이킹을 읽으면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을 통치하던 시절,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바다에서 맹활약을 했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사략해적이 날뛰고 보물섬을 찾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출항했던 그 시대. 거기다 흰사리풀을 보면 중국과 영국의 아편무역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 시대의 역사 지식이 있다면 보다 더 재밌게 이 소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오르가 지휘하는 해적선 난바다 호의 정체는 무엇인지, 루의 과거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지 빨리 작가님이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중국이랑 영국의 아편무역도 생각이 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