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
나는 인외존재를 등장시키는 소설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흡혈귀나 좀비는 소재로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과 너무 가깝다. 흡혈귀도 인간에서 비롯되었고 좀비도 인간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는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서로 다른 채로 접점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 단 하나의 점점을 발견한 것만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로맨스), 아니면 그 접점이 처음부터 없었거나 이미 침식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시점인가(호러)’이다.
하지만 여기에 따르면 흡혈귀나 좀비는 이미 인간에서 비롯되었기에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존재’의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해답이 있었다. 흡혈귀와 좀비를 엮으면 되는 일이었다.
흡혈귀도 인간에서 비롯되었고 좀비도 인간에서 비롯되었다. 둘다 인간을 감염시켜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만든다. 인간을 침식시킨다.
그러나 둘은 너무나 다르다.
흡혈귀는 깔끔하고 미형이며 인간의 피를 먹고 거의 영원에 가깝게 산다. 지능도 높고 빠르기까지 하다.
좀비는 지저분하고 썩어가는 형상이며 인간이든 동물이든 때로는 설정상 자기들끼리도 자기 몸도 뜯어먹는데다가 지능은 없다시피 하고 느릿하게 걸어다닌다. 이 또한 가끔 달려서 쫓아오긴 하지만 흡혈귀의 속도에 비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둘이 만난다면? 누가 누구를 침식시킬 것인가? 아니면 공통의 접점만을 유지할 것인가?
1. 이 소설을 여는 문장
“이봐, 진정해. 네 피를 빨겠다는 건 아냐. 난 너처럼 되고 싶지 않거든.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독극물을 마실 수는 없으니까.”
이 한 마디가 소설 전체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나는 너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이 말은, 소설이 끝날 때 정확히 반전된다. 좀비에게 말을 거는 흡혈귀라는 장면 자체가 이미 기묘하고, 그 말이 결국 결말의 예언이 된다는 것을 독자는 마지막에야 깨닫는다.
2. 좀비VS흡혈귀, 하류계층VS상류계층
좀비물은 오랫동안 ‘인간성의 상실’을 다루어 왔다. 좀비는 소비사회, 군중심리, 하위계급의 상징였다. 흡혈귀 서사는 반대로 ‘인간성의 과잉’, 즉 욕망, 귀족성, 불사의 교만이나 후회 등을 나타내 왔다.
이 소설은 그 두 개의 장르를 정면으로 충돌시켜버렸다. 흡혈귀는 자본주의의 귀족으로 읽히고, 좀비는 그 자본주의가 착취해온 인간들의 잔해로 읽힌다. 그러나 소설은 그것을 단순한 도식으로 두지 않는다. 흡혈귀도 흡혈귀 사회 내의 하류 계층이며, 운 나쁘게도 한국에 들어와 전쟁과 빈곤 속에서 수십 년간 굶주렸던 존재다. 그가 대부업체를 차려 ‘자본주의의 귀족’이 되어 말 그대로 일반적인 인간들의 ‘고혈’을 빨고 있던 것은 생존 전략이었고, 그 전략은 종말 앞에서 그대로 붕괴한다. 일반적인 이런 장르에서 흡혈귀가 의미하는 것은 ‘불사의 특권층’이지만, 이 소설에서 흡혈귀는 그 특권이 얼마나 조건부이며 허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존재다.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삼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1950년 한국전쟁의 폐허부터 고도성장, 사채업, 금배지, 비밀혈액원의 계급적 독점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와 그 안의 부조리를 좀비 아포칼립스의 배경과 흡혈귀의 생존으로 겹쳐두었다. 이것은 단순한 로컬 색채가 아니라, 이 사회가 이미 오래전부터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구조로 작동해 왔음을 은근하게 보여주는 방식이다.
3. 인간은 중요하면서 중요하지 않다- 사회 부조리의 상징과 ‘공유된 먹이’
이 소설에서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다. ‘인간성’이나 ‘인간’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회적 부조리의 상징이며 좀비와 흡혈귀 공통의 ‘식사’일 뿐이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그 ‘식량’을 두고 흡혈귀와 좀비가 맞부딪칠 뿐이다. 인간은 먹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하거나, 아니면 이미 괴물이 되어 있다. 뭐… 인간 입장에서 이 소설을 다시 쓴다면 거진 에일리언VS프레데터 급이 되시겠다.
심지어 작금의 상황에서는 좀비가 압도적으로 수가 많고 흡혈귀는 혼자일 따름이다. 거기다 흡혈귀는 피만 먹는데 인간이 얼마남지 않은데다, 그놈의 ‘인간(오계장)’이 혈액원에 있는 혈액을 자기 살겠다고 털어먹어서 그조차도 구하기 어려워졌다.
금배지 정치인은 과거 자신이 착취하고 범한 자들—그가 성추행해놓고는 무고죄로 억울하게 고소당한 여대생, 전 재산과 아내를 빼앗긴 사업가—에게 뜯어 먹힌다. 이 장면은 복수의 쾌감을 주는 동시에 아무런 카타르시스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뜯는 자들도 이미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그 장면을 지켜보는 존재조차도 인간이 아니다. 억울함은 괴물이 된 후에야 실현되고, 그 실현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소설이 말하는 부조리는 여기에 있다. 정의는 늘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다른 형태로 온다.
오 계장 역시 마찬가지다. 부패한 공무원이었던 그는 흡혈귀에게 기생하고, 흡혈귀는 그에게 기생한다. 두 존재는 끝까지 서로를 도구로 취급하면서도 서로를 놓지 못하는 기묘한 기생관계를 유지한다. 그 괴상한 동행은 결국 오 계장이 좀비가 되어 스스로 제 손가락을 씹어 먹는 것으로 끝난다. 흡혈귀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비밀혈액원의 지문 열쇠였다. 그러나 그 열쇠가 될 손가락은 오 계장 자신이 무의식 중에 파괴해버렸고, 그 손가락이 남아있을 그의 머리는 흡혈귀가 저 멀리 던져버렸다. 이보다 더 잔인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4. 이 소설의 압권-마지막 장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정말 압권이다. 흡혈귀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 좀비가 되어가는 오 계장의 피를, 그것이 독극물임을 알면서도 핥는다. 소설 첫 문장의 말ㅡ”아무리 목이 말라도 독극물을 마실 수는 없으니까”, 는 이 순간 정확하게 박살난다. 흡혈귀 조차도 이런 아포칼립스 세상에서는 존재의 고결함보다 생존이 먼저였다.
트럭이 뒤집히고 햇빛이 쏟아지지만, 변해가는 그의 몸은 더 이상 타지 않는다. 천 년을 두려워하던 태양을 반항하듯 똑바로 쳐다보려던 순간,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허……”라는 허탈한 웃음이다. 태양이 사라지고 있었다. 일식이 시작된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결말의 잔인함은 희망도 절망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태양을 이긴 것이 아니다. 태양이 스스로 사라진 것이다. 자신이 더 이상 빛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몸이 된 순간, 어둠이 찾아와 그를 오히려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이기는 것과 변하는 것은 다름을, 살아남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다름을, 이 소설은 마지막 한 줄로 말한다.
5.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
공포 소설은 대개 인간의 시선으로 쓰인다. 인간은 괴물을 피하거나 맞서거나 무너진다. 독자는 인간 캐릭터와 동일시하며 공포를 체험한다. 이것이 호러의 기본 문법이다.
이 소설은 그 문법을 뒤집는다. 시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흡혈귀에게 있다. 그리고 흡혈귀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포스럽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좀비 자체가 아니다. 굶주림, 태양, 그리고 천 년을 지켜온 자신의 형태와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 즉 ‘평상시라면 절대 접점을 이룰 리 없다고 여기던 존재가 자신을 침식하는 것’이다.
포식자가 공포를 느낀다는 것, 그것도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겼던 존재들에게 압도당하는 공포를 느낀다는 것. 이 역전이 이 소설의 진짜 호러다. 독자는 흡혈귀에게 이입하면서 자신이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좀비가 아니라 ‘시스템의 붕괴’, ‘식량 고갈’, ‘정체성의 소멸’임을 깨닫는다. 좀비와 동화되어가는 흡혈귀를 보며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안도가 아니라 기묘한 연민이다. 왜 나는 포식자의 생존을 바라고 있는가. 왜 마지막 장면에서 씁쓸하게 웃게 되는가.
흡혈귀 입장에서 쓰인 호러는 결국 독자에게 이 질문을 돌려준다. 먹이사슬의 어느 자리에 서 있든, 그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때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과연 살아남는 것인가 하는 것. 이 소설의 공포는 좀비가 아니라, 천 년을 버텨온 존재가 마지막에 내리는 선택과 허탈함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