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서] 나보코프를 사랑하는 자들은 이 글로 오라 비평

대상작품: 두 베녜라 이야기 (작가: 사선, 작품정보)
리뷰어: VVY, 3시간 전, 조회 3

정말 흥미로운 소설을 발견해서 하룻밤 고민하다가 리뷰를 써봅니다.

제 소개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저는 보르헤스를 읽었으며 그가 창조한 피에르 메나르를 이용한 소설(‘조커2019의 감독’)도 써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읽어본 것 중 가장 뛰어난 소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이겠지만,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을 꼽는 사람입니다.

나보코프는 ‘롤리타’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그 파격적인 소재가 명성을 가린다고 생각할 정도로 독창적이고 재밌는 문법을 구축한 소설가입니다. 그가 설계한 텍스트적 유희는 각주가 필요할 만큼 복잡합니다만 그만큼 분석하고 해석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비견할 만한 작가가 그 보르헤스이니 말 다했지요. 심지어 줄거리가 아니라 텍스트 자체에서 발생하는 미스테리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만합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나보코프의 문체를 차용한 소설(‘너희가 잠긴 심해’)도 써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나보코프의 글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팬을 자처하는 저도 겨우 그 문체만을 흉내냈을 뿐, 나보코프식 텍스트의 설계를 따라할 엄두는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작품을 만난 겁니다. 심지어 피에르 메나르를 소재로 차용한 표절 작가 미스테리 추적기를.

 

독일의 철학자 고틀롭 프레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녁별과 새벽별의 지시체는 같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이 문장은 소설의 여는 말로 사용됩니다.

저녁별과 새벽별은 모두 금성이지만 고대인들은 이를 몰랐습니다. 물리적으로 같은 대상임에도 관점과 해석에 따라 객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부터 이 글에 주석을 달게 될 저로서는 다소 안도하게 되는데, 마치 오독의 가능성을 미리 용서하는 것으로도 읽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소개글은 이러합니다. ‘표절 의혹에 시달리던 소설가가 자살했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에서 교살당하는 사람의 기억이 발견된다. 소설가는 자살한 것인가, 아니면 살해당한 것인가.’

제목의 ‘베녜라’는 작중 ‘희고 푸른 밤’의 저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표절 의혹에 시달리다 자살한 소설가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피터 메나드’입니다. 물론 피에르 메나르의 패러디인데, 후술하겠습니다.

소설의 전개는 꽤 당혹스럽습니다. 시간순이긴 한데, 피터 메나드가 진정 살았는지 죽었는지, 화자의 정체는 무엇이며 동일인이긴 한지, 베녜라는 결국 피터 메나드인지 이반 쿠즈네초프인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갑자기 끝납니다. 더욱이 작품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집필 의도와 함께, 과연 베녜라는 누굴까? 라는 수수께끼를 남긴 채 말이지요.

아. 이거. ‘창백한 불꽃’이다.

나보코프의 또 다른 소설. ‘창백한 불꽃’은 이야기의 소재인 존 셰이드의 시와 주석자 킨보트의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을 수도 있지만 전반부 난해한 시만 읽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으므로, 독자는 주로 앞뒤를 왔다갔다 하면서 읽게 됩니다. ‘두 베녜라 이야기’ 역시 그냥 읽기만 해서는 이해할 수 없어서 작품 해설을 읽고 돌아가 발췌독을 해야만 했습니다.

좋습니다. 작품 해설에서 제시한 ‘베녜라 찾기’를 목표로 두고 이 소설을 다시 읽어봅시다. (이하는 스포일러입니다만 굳이 가리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이런 부분을 인지하고 보는 것도 하나의 독서법이 될 수 있는 소설입니다. 제 해석이 정확하지도 않을 테구요.)

 

‘베녜라’는 작중 신원미상의 블로그 작가이지만, 러시아어로 ‘금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로 머리말의 ‘저녁별’과 ‘새벽별’의 지시체입니다.

작품 해설의 집필 의도를 잠깐 볼까요?

요컨대, 하나의 텍스트를 통해서 그 텍스트로부터 분화된 두 창작자, 서로 구분되는 작가들을 만들어 낸다는 계획을 떠올린 것이다.

작가는 피에르 메나르를 읽고 그 역을 설계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피에르 메나르에 대해 알리자면, 보르헤스가 창조한 인물인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집필하려 한 작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모방이 아니라, 그 자체로 똑같은 ‘원본’이 될 목적으로요. 결과물은 똑같이 ‘돈키호테’이지만 그 과정은 기계적으로 옮겨쓰는 표절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고민과 수정을 거쳐 ‘돈키호테’를 창작하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그 역이란? 똑같은 소설(돈키호테)로부터 똑같은 결과(돈키호테)가 아니라, 다른 파생작들(‘희고 푸른 밤’과의 스물일곱 가지 유사점으로 비난당하는 피터 메나드의 소설들)이 나타나고, 반면 작가는 (세르반테스와 피에르 메나르로 명백히 구분되는 대신에) 표절 시비로 인해 구분되지 않는 상태(피터 메나드는 베녜라인가 아닌가?)로 치환됩니다.

그러니까 피터 메나드, 그리고 베녜라의 또다른 후보로 거론되는 이반 쿠즈네초프가 금성(베녜라)의 이쪽과 저쪽. 저녁별과 새벽별입니다.

누가 저녁별이고 누가 새벽별일까요?

작품 해설 앞 마지막 일기에 ‘우리 피댜, 내가 널 저녁 하늘로 돌려보내 줄게.’라는 힌트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피터 메나드가 저녁별입니다.

작품 해설에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 대목을 봅시다.

그 외에도 이 텍스트에 부여한 장치는 몇 개 더 있다. 특히, 2008년 6월 9일은 금성이 외합에 있던 자리이고, 2009년 1월 14일은 동방 최대 이각, 2009년 3월 5일은 역행을 시작하는 날짜이다.

금성이 외합에 있다는 것은 태양을 사이에 두고 지구와 정반대편에 있다는 의미로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방 최대 이각이란 지구에서 보았을 때 금성이 태양으로부터 동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즉 우리 눈에 초저녁 서쪽 하늘에서 관측됩니다. (참고로 새벽별은 정반대로 금성이 태양의 서쪽에 위치할 때, 즉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보입니다.)

역행이란 지구와 금성의 공전 속도 차이 때문에 보이는 현상으로, 본래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다 동에서 서로 거꾸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시된 일기의 날짜를 순서대로 봅시다.

2008년 6월 9일은 (듣기로) 이반 쿠즈네초프가 사망한 날짜입니다.

2009년 1월 14일은 피터 메나드가 한국에 입국한 날짜입니다.

2009년 3월 5일은 피터 메나드의 유일한 연고, 룸메이트 류진혁이 출국한 날짜입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피터 메나드가 출현했을 때를 명백한 저녁별의 시기로 지정하셨군요. 그러니까 피터가 저녁별입니다.

그러면 이반 쿠즈네초프가 새벽별이겠군요?

그런데 저녁별과 새벽별은 사실 동일한 금성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소설적 소재가 등장합니다. 람찬-필립스 요법.

뇌 조각을 잘라 환자에게 다시 먹이는 요법으로 손상된 뇌신경을 재생시키는 판타지 SF적 설정인데, 이 소재는 다음의 문제를 던집니다.

람찬-필립스 요법은 신경 발생 코드가 개체별로 고유하다는 가정 속에서 출발합니다. … 어차피 원래 있던 것을 절단한 것이니 신경 코드 배열 자체는 기존 순서대로 형성되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뇌는, 글쎄요. 사례가 없어서. 다만, 코드 배열 자체가 섭취자와는 다를 테니, 섭취자의 기존 배열과 섞일 가능성도 있겠죠,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네요. 간단하게, 뇌를 도서관으로 비유해보죠. 이 대학 도서관의 책을 전부 다른 도서관으로 옮긴다고 생각해 보세요. 분류체계는 두 도서관이 같을 테니까 책들은 같은 카테고리에 묶이겠죠. 하지만, 책의 순서는 달라지겠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원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옆에 있었다가, 옮기고 나면 <절망> 옆에 있는 식이죠. … 그런 상황이 뇌에서 벌어진다면,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사람 하나가 완전히 바뀌어버릴 겁니다.

피터 메나드는 죽기 전에 자신이 베녜라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뇌의 시각적 기억을 투사하는 광반응 검사는 거부하죠. 그것이 베녜라 표절 시비를 가릴 가장 좋은 수단 같았는데도 말입니다.

나중에 목매단 자살처럼 보였던 피터의 죽음 이후, 광반응식으로 그 뇌를 검사하자, 숨막혀 버둥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장에 두 사람이 겹쳐 존재했던 기억이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피터 메나드가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했다고 떠들기 시작하죠.

하지만 그 기억이 그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게 아니었다면?

2009년 1월 14일, 피터 메나드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 아무도 그의 과거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반년 전인 2008년 6월 9일, 이반 쿠즈네초프가 죽었습니다.

2008년 6월 4일, 불과 5일 전. 베녜라가 블로그에 마지막 기록을 남깁니다.

피터 메나드의 머릿속에는 앞뒤로 붙어서서 다른 이의 목을 조르는 듯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금성이 외합에 위치한 때. 베녜라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진 바로 그날.

베녜라의 소설적 재능을 탐한 피터 메나드가, 이반 쿠즈네초프를 죽이고 뇌를 먹었다면? 그리고 람찬-필립스 요법에 따라 이반의 뇌가 피터의 머릿속에 재생되어 합쳐졌다면?

이반이 베녜라였다면?

그렇다면 피터 메나드도 베녜라가 됩니다. 피터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품 해설에서 베녜라의 정체를 단언하는 부분은 이렇습니다.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의 저자이지만, <돈키호테>를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세르반테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므로, 세르반테스는 피에르 메나르가 아닐 수 있고, 실제로도 세르반테스는 피에르 메나르가 아니었다. 둘 다 <돈키호테>의 저자임에도 말이다. 이처럼, 피터 메나드와 이반 쿠즈네초프는 다르다. 피터 메나드는 <붉은 벽의 괴물>, <총과 총성>, <전 인류의 행복>, <나무는 눈을 먹고 자란다>의 저자이고, 이반 쿠즈네초프는 <타일을 까는 남자>, <분노와 소리>를 썼다. 둘은 다르다. 둘 모두 베녜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베녜라는 그 무엇보다도 <희고 푸른 밤>의 저자이다. 그리고 <희고 푸른 밤>의 저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베녜라가 아니다. 베녜라와 <희고 푸른 밤>의 저자 사이에 놓인 등호의 필연성은 명확하다. 그러니 누가 베녜라인지도 자명하다.

작가가 그 개인성을 배제하고 작품으로서 구분되는 존재라면. 이반이 피터가 되었다고 해서 둘은 동일한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희고 푸른 밤>을 쓴 당시의 베녜라는 누구였을까요?

<희고 푸른 밤>은 러시아어로 쓰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작품에서 푸른색이란 새벽과 어둠,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선, 삶과 죽음 같은 ‘경계선’을 의미한다고 평가하며, ‘희고 푸른 밤’의 영역본 제목 <A Bleak White Night>를 비판한 루트비히 스미스를 인용합니다. Bleak는 차갑고 으스스하다는 의미이지 시각적으로 푸른 이미지를 담은 단어는 아니기 때문에, White와 대비되지 못하고, 곧 오역이라는 것입니다.

피터 메나드는 미국인이고 영어가 모어이며, 베녜라의 모어 러시아어는 이반 쿠즈네초프의 모어입니다. 영역본 제목에서 치명적인 오역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피터 메나드가 과연 베녜라인지 의심케 하는 요소입니다. 루트비히 스미스 역시 이반 쿠즈네초프가 베녜라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해옵니다.

<타일을 까는 남자>에서 타일에 두 가지 다른 색을 칠하는 것과 <희고 푸른 밤>에서 웃옷은 독일 군복을, 바지는 소련 군복을 입은 부상병은 닮아 있어요. 두 가지 모두 화자에게 불확실성과 모호성으로 인한 공포를 주는 장치로 작용하죠. 그리고 그 공포는 화자를 살인으로 유도해요. 베녜라의 가장 큰 특성이죠. 이중성에 대한 강박적인 수준의 공포. 베녜라의 작업은 두 가능한 상황을 하나로 줄이는 시도로 요약할 수 있어요. 문제는 베녜라 자신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여긴다는 점에 있죠. 타일이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 부상병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거에요. 그걸 구분하려면 지하실을 뛰쳐나가서 다시 폭격과 총탄에 죽을 각오를 해야 하고, 폭행당할 각오를 해야 하죠. 그러나 화자는 그럴 능력도 없고, 용기도 부족해요. 게다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까지 기저에 깔려 있어요. 그렇게 세계를 제한하기 때문에 화자는 두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뜻 긍정할 수 없어요. 그래서 파괴를 선택하는 거죠. 둘 모두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희고 푸른 밤’을 집필한 베녜라가 블로그 활동을 할 때까지만 해도 동시에 살아있었던 이반 쿠즈네초프가, 역시 베녜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작품 해설은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반 쿠즈네초프’라는 이름도 상징적이다.

이반 쿠즈네초프는, 어원을 따져본다면 이반이 사도 요한의 변형이고, Кузнец는 러시아어로 대장장이를 의미하니, 영어의 John Smith와 같다. 피터 메나드의 모어로 여겨지는 영어와 베녜라의 모어인 러시아어의 대립은 이 이름에 담긴 두 언어의 대칭성도 함의한다. John은, 이반이 러시아어에서 그렇듯이, 영어에서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Smith 또한 영어권 사람들에게 가장 흔한 성씨로 인식된다. 쿠즈네초프 또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러시아인의 성씨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화자는 마침내 이반 쿠즈네초프라는 베녜라의 유력한 후보를 발굴해 내지만, 이 이름이 갖는 보편성은 이반 쿠즈네초프를 어떤 특수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하고 불특정한 개인으로 상징화한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화자는 다시금 개별성, 특수성을 지닌 피터 메나드로 회귀한다. 모두가 베녜라임을 받아들이는 대신, 가상적인 누군가를 끊임없이 베녜라의 지시체로 상정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도달해버린 것이다.

작중에는 스미스 씨가 한 명 더 등장합니다. 바로 피터 메나드를 ‘희고 푸른 밤’과의 스물일곱 가지 유사점으로 비난한 평론가, 루트비히 스미스입니다. (이 점은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가 등장하는 소설이 그를 추앙하는 평론가의 입을 빌어 진행된다는 점에서 또한 대조됩니다.)

우리가 베녜라의 정체라고 의심하는 쿠즈네초프는 곧 스미스입니다. 그러면 평론가 이름은 왜 하필 스미스라고 작명했을까요? 루트비히라는 이름도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명망 있는 전사’라는 뜻은 그가 피터 메나드에게 싸움을 건 작중 역할에 대응될 뿐입니다.

혹시 스미스=쿠즈네초프라는 등항식에 근거해서, 루트비히 스미스가 이반 쿠즈네초프인 걸까요? 사실 이반 쿠즈네초프는 죽지 않았고, 자신을 표절한 피터 메나드에게 분개해 루트비히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피터를 공격한 것일까요?

피터 메나드는 그저 표절자에 불과했고 그가 가진 흐릿한 살인의 기억도 사실은 그 자신이 죽임당할 때의 기억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재판받는 피고인은 재수없는 절도범이 아니라 실제로 피터를 살해한 진범이었던 걸까요?

명쾌한 해답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반 쿠즈네초프가 어떤 특수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하고 불특정한 개인으로 상징’되어 버리는 점에서 해설의 일면과 부합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피터 메나드의 정서적 불안과 람찬-필립스 요법이라는 소설적 요소가 그러한 결말로 향하기를 방해합니다. 저는 위에서 내린 결론대로, 블로그상의 베녜라와 동시에 살아 있었던 이반 쿠즈네초프가 베녜라였다는 설을 유지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문단의 존재 의의는 무얼까요… 그렇습니다. 베녜라는 이반 쿠즈네초프다. 그러면, 이 보편적이고 평범하고 특정되지 않은, ‘이반 쿠즈네초프’는 누구인가?

 

소설에는 미스테리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피터의 룸메이트, (그리고 피터의 부탁으로 과거에 베녜라를 찾으러 간 것으로 추정되는) 류진혁은 누구인가. 그가 피터의 얼굴을 알고 있는 유리 노비코프를 찾아 노보시비르스크까지 향했나? “얘가 드미트리요.” 그의 기억은 왜 일기에 삽입되어 있으며 왜 작품 해설은 후반부에 일기로서의 기록 형식이 부정된다고 고백했는가?

그렇다면 화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화자는 피터 메나드의 죽음이 발견되고 다음날 두 형사의 방문을 받은 사람입니다. 출판사와 연락을 취하는 내용을 보건대 피터 메나드와 연결된 출판사의 직원처럼 보입니다. 연고 없는 피터 메나드와 평소 연락을 주고받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피고인이 보낸 사죄 편지를 전할 이를 찾고자 유일한 연고 류진혁을 추적하고, 노보시비르스크까지 갑니다.

하지만 2017년 4월 13일 일기부터 좀 수상스러워집니다. 일기는 피터와 마치 동거하는 자의 시선에서 서술되어 있습니다. 밤을 새운 끝에 베녜라를 찾아달라고 말하는 피터. 이 대목, 기존 화자가 맞나요? 류진혁의 기억 아닌가요? 아니면 더 옛날 단짝과 같았던 이반 쿠즈네초프의?

작품 내에서 핍진성 있게 화자가 혼동되기 위해서는 람찬-필립스 요법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화자가 타인의 뇌를 먹었어야 합니다. 출판사 직원이 그럴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해설이 인정하는 것처럼 일기라는 서술 형태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기가 아니라 소설 속에서도 허구라는 것입니다.

그럼 화자는…? 자신이 피터의 출판사 직원인 것처럼 가장해 이 기록을 쓴 누군가?

2017년 4월 20일 화자의 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꿈을 꿨다. 사진 속의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다. 목을 졸랐는데, 그 사람 머리에서는 피가 났다.

목을 졸랐는데 머리에서 피가 왜 날까요?

뇌를 꺼내 먹었기 때문에?

 

소설 초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옵니다.

… 논문은 왓슨 박사의 말대로 뇌량이 절제된 사람의 인지를 연구한 내용의 논문이었다. 왼손으로 물체를 감각한 분할 뇌 환자는 그 물체의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왼손은 우뇌와 이어져 있고 우뇌는 언어기능을 담당하는 좌뇌와 이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환자는 자신이 왼손으로 무엇을 만졌는지 말할 수 없다. 왓슨 박사는 이 연구를 설명하며 편재성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인지적 능력이 대뇌의 양쪽에 편중되어 기능하는 성질. 마이클 가자니가는 후속 연구를 통해서 그렇게 분할된 우뇌는 스스로 언어적인 처리가 가능하도록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고 보고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분할 뇌 환자에게는 각 반구가 개별적인 자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위에 따르면 뇌는 서로 기능을 편중하여 분배하기 때문에, 절제하면 인지적 능력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할된 뇌는 스스로 그 능력을 회복하여 되찾습니다.

저는 소름 돋는 발상을 떠올렸습니다.

피터 메나드가 이반 쿠즈네초프의 뇌를 먹었고, 이반 쿠즈네초프의 뇌가 피터 메나드의 뇌에 결합되었다. 그리하여 피터는 베녜라를 지배했다.

그런데 일기의 마지막 부분이 어땠나요?

우리 피댜. 우리 피댜.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저녁 하늘로 돌려보내 줄게.

피터는 죽었습니다. 목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하지만 일기 형태의 기록물은 그를 ‘하늘로 돌려보내 준다’.. 즉 죽음을 선사하겠다는 듯, 다짐하고 있습니다.

절제되었던 이반 쿠즈네초프의 영역. 그가 제어권을 되찾고, 스스로 몸을 움직여 목을 맴으로써 피터를 살해한 거라면?

‘희고 푸른 밤’의 저자 베녜라는 이중성에 대한 강박적인 공포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괴를 선택한 거라면.

둘 모두를 없애버리기로 한 거라면?

 

바로 직전, 기록물의 형태에서, 화자는 피터의 얼굴을 아는 노인 유리에게 사진을 보여줍니다.

사진에는 4명의 얼굴이 있습니다. 피터 메나드, 이반 쿠즈네초프, 알렉세이 이바노프, 드미트리 자이체프.

유리는 이미 드미트리의 얼굴을 짚어주었습니다. 화자는 다른 얼굴을 지목하고 이게 피터냐고 물어봅니다.

“아냐. 그 친구는 바냐. 이반 알렉세예비치.”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다른 하나를 가리켰다.

“얘가 피터요. 미국 놈이었는데, 애들이랑 친했어. 애들은 이반이랑 피터 둘을 묶어서 카료, 카료, 하고 불렀지.”

노인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다른 하나를 가리켰다. 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4명의 얼굴이 있었고, 1명은 이미 부정되었며, 1명이 새로이 부정된 상황입니다.

그럼 2명이 남았는데 왜 다른 하나라고 물은 거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니까?

 

화자의 정체는 이반 쿠즈네초프의 손상된 기억이었던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특정되지 않는다는 이반 쿠즈네초프의 정체는 사실 화자였던 게 아닐까요?


 

이 리뷰는 순전히 개인의 감상이며, 아마 대부분 오독에 기반하였을 것이고 독자이자 소설가인 저 스스로 창작한 구석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함부로 공개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어차피 텍스트란 오독과 뗄 수 없는 존재임을 작가님은 알 것이며, (애초에 난해하게 쓴 작가님의 탓이 있는 것이고) 이 긴 분량의 리뷰는 독자 스스로 정말 재미있게 즐긴 미스테리였음을 입증하는 훈장이 될 것입니다.

이런 오락거리를 제공해주신 작가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브릿G에서 이 정도로 나보코프의 문법을 구현하시는 분을 만나뵙다니… 영광입니다.

보르헤스와 나보코프를 재현하는 작가로서의 자아, ‘독창적인 복제물’이라는 메타적 소재를 다시 소설화 삼으시는 이 기교… 대단하시군요. 그야말로 나보코프 스타일입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베녜라’는 지금, 자신만의 특수성을 가진 피터 메나드라고 봄이 맞았다, 라고 답해드려야 했을까요… 고민되네요.)

감히 덧붙일 말씀이 없습니다. 아주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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