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 뭔가를 마시는 새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피를 마시는 새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살라만더, 1월 9일, 조회 56

1. 들어가며 – 이전의 요약

피를 마시는 새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간 몇개의 활자들을 찍었습니다. 이제 피를 마시는 새에 관하여 찍을 시간입니다.


피를 마시는 새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합니다. 정신분석상담, 트라우마, 새들은 무엇인가, 왕이란 무엇인가.. 선물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까지 . 그래서 그간 이영도 작품들에 관해 리뷰를 적었고 이제 그 이야기들을 모아 마지막으로 피를 마시는 새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자 합니다.

작가는 드래곤라자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그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 혹은 연결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상담이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적었습니다.

퓨처워커를 통해서는 정신적 트라우마와 그 극복에 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각각의 인물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그리고 그 이후의 자기성장을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이야기 합니다.

폴라리스 랩소디라는 작품을 통해서 이런 상담적 판타지 세계관이 사실 서양의 종교와 관련이 있지 않냐고 주장합니다. 7대죄라 불리는 죄의식과 무의식이 연결되어 있고 이것을 다루는 두 가지 방법, 그대로 ‘반영 : 키 드레이번’ 할 것인지.. 아니면 ‘수용 : 오스발’ 할 것인가 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이러한 상담적 판타지 세계관이 비단 서양이라는 주제로만 있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우리에게도 상담적 판타지 세계관은 존재 하지 않는가 라고 직접 묻고 있는듯 합니다. 하인샤 대사원을 보면 마치 스님들이 생각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세계관을 통해 마치 윤회하듯이 내려온(해결되지 않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케이건의 판타지 같은 삶을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업보적으로 마주치는 갈로텍의 모습을 통해 이것을 극복하는 삶 또한 우리네 상담의 모습 안에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급하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느라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왕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두억시니들과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 등 이겠지요. 그래서 이영도 작품에서의 왕이란 대체 무엇인가? 에 대한 이야기부터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1. 왕이란 무엇인가? – 히틀러 : 그리고 불교상담

이영도의 작품에서는 ‘왕’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왕’이라는 단어는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왕’을 알고 있는데 왜 ‘왕’에 다른 의미가 부여된 것처럼 말을 할까요? ‘왕’이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앞서 ‘투사적 동일시’란 말에 관하여 한 번 알아보도록 합시다.

‘투사적 동일시’ 란 상담심리적 개념으로 내담자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충동 을 치료자에게 유발하는 기제를 말한다. 즉 나에게 있는 감정이나 충동등을 남들이 느끼게 하고 또 그렇게 남들을 행동하게 하는 것이 ‘투사적 동일시’이다. 이런 ‘투사적 동일시’가 나쁘게 쓰이면 어떻게 되는가? 그 예를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무의식의 열등감과 증오감을 외부세상에 투사시켜 전쟁상황을 일으켰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투사적 동일시’ 입니다.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쓰이는 ‘투사적 동일시’란 무엇일까요? 드래곤 라자의 길시언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칼… 죽은 자의 부탁은… 평생의 빚이 되지요… 난 간교한 자… 그래서 당신에게 평생 벗어나지 못한 짐을… 부여하고자 하오… 부탁이오… 바이서스를… 지…켜… 허어억…”
“샌슨… 프림을… 프림을 부, 부탁… 후, 후… 서, 선더라… 너… 세, 세… 힘을 합… 만족…”
– 왕자 길시언 바이서스의 유언


길시언은 자기의 생각과 행동(바이서스 부흥)이 남들의 생각과 행동이 되도록 합니다.(비록 유언이라는 형태이긴 하지만.) 좀 어거지로 맞추긴 했지만 충분히 ‘투사적 동일시’라고 보여집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투사적 동일시’의 설명이라면 퓨처워커에도 있습니다. 천공의 3기사와 같이 싸운 다른 켄턴의 기사들은 자신의 욕구나 욕망이 아니라 천공의 3기사의 욕구와 욕망에 의존하여 싸웠기에 부활하지 않았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솔로쳐님. 저는 들었습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 많은 형제들이 저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하지만 그 형제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 다. 저만이 레티에의 길을 거부하고 이 지상에 미련을 “

“그게 아니오!”

솔로쳐는 거칠게 외쳤다. 레틴드롤스는 입을 다문 채 솔로쳐를 바라 보았다.

그래요! 그 전투에서, 많은 레티의 검이 당신을 따라 자신을 파괴했 소.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소. 하지만 거기엔 분명히 차이가 있 소! 당신은 다른 누구의 본보기도 없는 상태에서 가장 먼저 그것을 시도했소. 당신의 불안이 가장 큰 것은 당연하잖소? 다른 형제들은, 제길. 내 입을 용서하시오. 그 작자들에게는 화려한 군중심리의 응원이 라도 있었을 거요. 네가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응원도 없었단 말이오. 도대체 뭘 부끄러워하시오? 당신은 힘든 길을 갔고, 혼자서 가야했던 그 여정에서 당신이 받았을 고통은 동정의 소지는 있어도 결코 경멸받을 수는 없는 것이오!”
– 솔로쳐와 레틴드롤스의 대화 中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여 그대로 행동하게 만들 수 있는 자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긍정적인 ‘투사적 동일시’가 가능한 자. 이런 자를 ‘왕’이라고 작가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왕’ 긍정적 투사적 동일시가 가능한 존재의 의미가 폴라리스 랩소디와 눈물을 마시는 새를 넘어서면은 더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불교상담에서 대의왕의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불교의 근본 목적은 고통의 치유에 있다. 불교만큼 삶의 고통에 대한 깊은 통찰과 가르침을 주는 종교나 사상은 없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종류의 고통을 불교는 해결하고자 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을 불교에서는 간략하게 사고(四苦)나 팔고(八苦)로 표현한다. 사고는 생(生)·노(老)·병(病)·사(死)의 네 가지 고통을 말하며 8고(苦)는 4고(苦)에 다음의 네 가지를 추가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물건과 이별하는 고통(愛別離苦), 원망스럽고 미운 대상을 만나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추구했지만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오온에 집착해서 발생하는 고통(五陰盛苦). 4고가 육체적인 것인데 비해 8고는 심리적인 감정이 개입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부처님은 당신 자신을 의왕(醫王)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질병을 포함한 모든 고통의 치유자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훌륭한 의사는 병의 증상을 잘 알고 병의 발생 원인을 잘 파악하고 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알고 나아가 미래에 다시 재발하지 않게 할 수 있다. 훌륭한 의사 중 최고의 의사는 병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해 주는 사람이다. 세존은 여래가 훌륭한 의사라고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여래(如來)는 큰 의왕이 되어 네 가지 덕을 성취하고 중생들의 병을 고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이른바 여래는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蹄)’라고 사실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集聖諦)’라고 사실 그대로 알며,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滅聖諦)’라고 사실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道聖諦))’라고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왕이라는 것이 단지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치유’ 혹은 ‘자기 각성’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것을 왕이라는 존재로 말을 합니다. 이상 위에서 한 말에 따르면 어째서 드래곤라자에서 칼과 샌슨이 바이서스의 신하가 되는지를,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라이온이 어떻게 왕이 되는지를,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사모페이는 왜 왕으로 추대되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케이건 드라카. 내가 너의 눈물을 마시도록 허락해줘.”
“부탁이야. 나는 나가 한 명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너의 왕이잖아? 내가 너의 눈물을 다 마시고 죽으면, 나가를 용서해주지 않겠어?
(중략)
“모욕적일 정도의 헛소리군.”
“그렇지 않아. 오레놀 대덕은 신들이 변화를 재생산할 거라고 말했지. 지금까지는 변화가 없었어. 우리는 아직도 대확장 전쟁 당시의 말을 사용하고, 대확장 전쟁 당시의 생활방식 그대로 살고 있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그렇다면 너 또한 그 옛날의 너 그대로일 거야. 다르다는 것을 기쁨과 감사의 대상으로 여길 줄 아는 너. 나가를 사랑하고 싶었던 너. 네가 살육한 그 많은 나가들에도 네 속 가장 깊은 곳의 너는 그대로일 거야. 너는 요스비를 사랑했다.”
케이건이 숨막힌 사람처럼 말했다.
“요스비.”
“그래, 너는 요스비를 사랑했어. 그걸 부정하지는 않을 거야.”
케이건의 어께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눈에서 의심과 불안이 흘러나왔다. 사모는 말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준비했어.”
“준비했다고!” 거의 비명이었다.
“그래, 너는 나를 준비했어. 너는 위기에 처한 북부를 위해 나를 왕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시 나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준비한 거야. 왜 나가일까? 북부의 왕으로 나가라니? 나가일 수밖에 없지. 나가가 아닌 다른 자는 불가능해. 너는 나를 희생하여 네 눈물을 지우고 다시 나가들을 사랑해야 하니까.”
“내가……, 내 눈물을 마실 왕을….., 준비했다는 것이군.”
“바뀐 것은 없어. 너는 나가를 사랑해.”
사모는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조건 없는 수용의 자세였다. 거기에는 자신의 죽음조차 수용하는 당당함이 있었다.
“나를 준비해 준 것에 감사하겠어. 이제 내가 네 눈물을 마시고 죽겠어.”
티나한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륜을 위해 죽으려 했던 사모는 이제 모든 나가들을 위해 죽으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정코 왕이었다.
“그 대신, 나가들을 살려줘. 그들을 사랑해 줘.
“나가라는 나무에 삭풍을 불게 하지 마. 이 영원한 여름의 땅 키보렌에 겨울의 폭풍을 가져오지 마. 내가 단풍이 되겠어. 내가 낙엽이 되겠어. 케이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사모는 남들의 눈물을 대신 마셔주고(무조건 적인 공감, 공감적 이해) 왕이 됩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을거 같던 프로이트(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불교상담(의왕)이 만나는 부분이라니 신기합니다. 아니 사실 모든 상담의 길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2-2. 그러면.. 두억시니는 뭔데?

작가는 뭔가를 마시는 새 세계관에는 5개의 선민종족이 있었다고 이야기 되어 집니다. 두억시니란 존재는 무엇일까요? 정녕 힌트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두억시니와 비슷한 존재에 대해서 작가는 이전 작품에서 언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퓨처워커의 ‘데스나이트’ 입니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공공포포! 절절망망! 어어둠둠의의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
– 데스나이트


 콜로넬 계곡에 도착한 아일페사스는 “지금 이 곳에는 4가지 종류의 종족이 있어. 드래곤, 드워프, 인간, 그리고 하나가 더 있네요.”라는 말을 한다. 가만히 보면 뭔가를 마시는 새의 두억시니와 닮았다. 언데드란 무엇인가 삶이 사라지고 남은 찌꺼기 아니던가? 두억시니 또한 자신의 다른 부분들이 완전해지고 난 후 남은 찌꺼기들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데스나이트와 두억시니는 거꾸로 완전해진 그 무엇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3. 선물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 각 종족들은 어떻게 변하는가? : 정신분석 그 이후

눈물을 마시는 새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4종족이 서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은  나가를 다시 사랑(나늬)하게 되고 정신분열(군령자)에 시달리던 나가는 다시 하나의 자아(이름)를 가지게 되고, 레콘은 물을 극복하였으며, 도깨비는 피를 뒤집어 쓰고도 멀쩡해졌다. 이쯤되면 궁금증이 생긴다. ‘선물이라는 건 그냥 주었을 때 좋은거 아니였던가?” “선물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정신분석에서 트라우마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병리에 가장 기본이 되는 원인으로 지목 된다. 인간이 가진 시스템이 해당 자극을 이해하거나 감당할 수 없을 때, 즉 자극이 인간을 넘어설 때 그 자극은 극복할 수 없는 기억이 되어 인간의 신체적 감정적 시스템이 망가지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안정감과 신뢰감이 상실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트라우마를 겪은 환자가 안정된 주변의 도움과 좋은 상담사를 만난다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트라우마가 극복된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트라우마 후 성장 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가령 이런 것들입니다. (https://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1940 참고)


1) 스스로 몰랐던 자신의 내적 힘을 깨닫게 된다든가(힘든 일들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다는 깨달음)

2) 삶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나만의 가치에 대한 감사를 느낌)

3)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며(인생의 새로운 진로를 설계)

4) 종교적 신념의 변화(신앙심의 변화)

5)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재정립(친밀감,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 감수성의 증가)하는 등의 과정을 포함한다.


트라우마 이후 잘 적절히 대처한다면 이것은 곧 성장을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선물이란 우리 각 인간이 완전성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아지는 변화하기 위한 선물.. 최소한 우리가 경험하고 열어보기는 해야할 어떻게 보면 가장 잔인한 선물.. 거의 죽음의 의미와도 밀접할 수 있는 선물일 수 있습니다. 오래된 표현을 빌린다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고나 할까요? 더 나은 성장을 위해선 그동안 안락했던 이전의 상태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각 네 종족은 더 나은 변화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눈물을 마시는 새의 마지막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듣고갈 음악 : https://youtu.be/Ay5spIdSWHs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 에반게리온 ost)

 

 

4. 치천제는 왜 ‘정신억압’을 이야기 하는가? – 시오네는 왜 ‘정신억압’을  거부하는가? : 짐은 그런식으로 정신억압하지 않는다!

대호왕 께서는 대호를 정신억압 없이도 따르게 하셨스뮤.. 정신억압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말로만 들어보면 언뜻 상대방의 정신을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 같다. 마치 내가 나의 몸이었다면 이렇게 움직였겠지. 혹은 나의 ‘생각’이나 ‘의도’를 따르듯이 움직이는 것을 말할테다. 직접 조종하지 않아도 내 생각이나 내가 규정지어진 ‘한계’ 내에서 움직인다면 그것이 곧 정신억압 아닌가? 어디서 비슷한 은유를 본 듯하다.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https://brunch.co.kr/@920hylee/64

프로이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결국 사람의 발달이라는 것이 어떤 부모 혹은 부모로 상징되는 그 무엇이 결정지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고 이것은 여러 신경증 들의 원인이 된다. 어떤 강박적인 규칙 내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부모가 한 ‘정신억압’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치천제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치천제는 스스로 정신억압하지 않는다고 그냥 너희들이 너희들의 욕구대로 살아가도록 자기 자신의 욕구 내에서 살아가도록 규정짓는 방식이 치천제의 정신억압 방식 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치천제의 발언은 정당하다.

그렇다면 칼에게 부탁? 받아 정신억압을 시도할 뻔 한 퓨처워커의 시오네는 어떠한가?

시오네는 끝내 함을 물지 않는다. 인간이 무의식이나 규정지어진 다른 의지에 의해 휘둘리지 않도록 자신의 의식, 자신의 자존심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마지막 감시자가 되기를 택한다. 자신의 욕구를 자신이 알면서 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천제는 달랐다. 마시는 새의 인간들 자신의 ‘진정한’ 욕구는 모르도록 만들어 원시제가 만든 미래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은 완전해 질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알아야 한다. 바로 자신의 부모를 죽이면서.

 

5. 다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엘시 ” 그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

엘시 엘더리는 그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런 엘시 엘더리는 마지막에 치천제를 죽이고야 만다. 엘시가 치천제를 죽이는 과정에서 다른 것들은 정신억압의 가능성 때문에 하지 못하고 오직 치천제만 죽이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정신분석에서 살해 라는 주제는 많은 경우 ‘부친살해’ 혹은 ‘모친살해’를 염두해 두고 진행된다. 여기서 엘시 에더리는 어떻게 ‘살해’를 저지르게 되었는가가 엘시가 가진 ‘죄’이다.

원시인의 죄는 무엇인가? 엘시 에더리가 작중 똥으로 벽화를 그리는 장면은 마치 원시인의 그림을 그린다면 이런식인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기원적이고 원시적이다. 엘시는 원시인 같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빌리면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토템은 씨족 전체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토템은 먹을 수 있는 짐승일 수도 있고 해롭거나 이로운 동물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식물일 수도 있다. 토템을 소유한 씨족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근친상간이 금지되어 있어서 족외혼이 성립한다. 프로이트는 원시사회에서 같은 종족 안의 근친상간이 금지된 이유는 생물학적 근거가 아니라 사회학적 근거에 있다고 본다. 서로 다른 종족 사이에서 성이 교환됨으로써 문화 왕래가 이루어지고 의사소통의 길이 열린다. 매년 씨족 구성원들은 한 번씩 토템 짐승을 죽여서 그것을 먹는 의식을 거행했다. 원시인들은 힘센 가장들과 그들의 여자들로 구성되는 작은 집단 사회에서 매일을 보냈다. 남자아이들은 일단 성인이 되면 여자를 얻기 위해서 늙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심한 경우에는 아버지를 먹어치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끔찍한 근원적 성적 범죄에 대해서 깊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근친상간과 살인을 금지하는 토템법에 해당하는 터부(금기)가 자연히 성립하게 되었다.

 


즉 인류는 사실 원시때부터 어떤 죄를 짓고 살고 있으며 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이야 말로 인간에게 지워진 숙명이자 운명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죄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고 또 자신에게 지워진 강박적인 신경증을 극복하는 것이다. 만약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부친살해를 하지 못한자들의 운명은 어떠한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자들의 운명은 어떠한가? 케이건처럼 트라우마를 안고 살게 되거나 갈로텍처럼 정신분열로 대표되는 신경증 혹은 정신증을 앓게 된다. 자식들은 부모를 사랑하지만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제는 그런 시간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서로를 상처주는게 너무나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래서 죄가 없는자(엘시)를 준비시키고 치천제를 키워내 변하지 않는 황제가 되도록 옹립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4종족이 완전해지는 시간 , 서로를 이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 자식은 부모를 살해하고 변하고 어른이 된다. 엘시 에더리는 자기 자신이 황제의 복제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결국 황제를 살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엘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정우를 껴안는다. 결국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6. 왜 상처를 꿈으로 보내버리나요?

프로이트는 꿈에 대해서 3가지 정도로 나누었다. 첫번째 꿈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꿈. 두번째는 억눌러진 욕망이 있지만 가려진 꿈, 세번째는 억눌러진 욕망이 있지만 가려지지는 않은 꿈이다. 자신의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나 욕망을 꿈은 억압하거나 감추거나 혹은 감추어진걸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우가 가지고 있는 꿈은 불이 난 상처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프로이트 적이다. 그래서 그럴까? 엘시는 그 어떤 죄의식도 없기에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그러기에 정우를 사랑하기 위해 꿈을 꾸기 위해 죄를 지어야 , 부친 혹은 모친인 치천제를 죽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7. 변한 종족들에 관하여.

눈물을 마시는 새 끝에서 각 종족들은 변했다. 피를 마시는 새 끝부분에서는 더 많은 종족들이 변한다. 지멘은 배도 타고.. 그러나 모두 다 변화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실은 자신 안에 있는 황제를 살해하고픈 욕구를 잊는다. 부정한다. 자신에게 있는 욕구를 인정할 것이냐. 부정할 것이냐. 변할 것이냐 변하지 않을 것이냐. 작가는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를 통해 우리 안의 완전성이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열린답을 구하려고 하는것 같다. 그게 4종족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 피를 마시는 새의 진정한 주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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