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작품의 전체 줄거리를 다루고 있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독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리뷰는 비평이 아닌 ‘감상’이며, 본문에 나타나 있는 읽기 방식과 해석을 작품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스포일러 및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원치 않는 분은 작품을 먼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발광發光이라는 단어의 매력은 가시광선을 통해 세계를 보는 우리에게 있어 저항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생물에게 적용되었을 때는, 전통적으로 낭만의 상징으로 쓰였던 ― 가령 반딧불이 같은 ― 몇몇 종족을 제외하고는 도리어 신비와 경외를 느끼게 한다. 적지 않은 수의 해양 생물이 생체 발광bioluminescence 기제를 지니고 있으며, 육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체 발광의 사례는 그에 비해 훨씬 적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생체 발광에 대한 최초의 기록에서는 ‘죽은 생선의 발광 사례’를, 플리니우스의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서는 ‘축축한 나무에서 발생하는 도깨비불foxfire’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1 그러나 이 고대인들의 선구적이고 예리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발광 기제가 바르게 연구된 것은 무려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생물의 발광은 그만큼 육상에서 관찰하기 드문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환상적인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발광하는’ 여자친구라니, 이 얼마나 기이한 제목인가? 여자친구라는 호칭어는 그 명명의 모호함 때문에 줄곧 오남용되어 온 단어다. 그런데 사회의 상투성 때문에 힘을 잃은 이 단어 옆에 낯설고 용례가 없는 연결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의 취약한 내면 세계는 친숙한 개념이 이방의 것으로 변모하는 순간 부조화를 느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진위에 관한 근본적 의문’이 호기심의 시작이다. ‘코스미시즘cosmicism의 현란하고도 기괴한 색채가 “여자친구”라는 허물을 입고 있을까?’ 제목을 보는 순간, 필자는 두 어절의 간극 속에 숨은 맥락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질적인 조합의 언어로부터 침습하는 속삭임에 과연 어느 독자가 저항하겠는가?
브랜디의 희미한 향기 위로 무겁게 깔린 ‘영민’의 초조함과 함께 글은 시작된다. 아이가 동양계 혼혈이면 베를린으로 돌아와야 할 거라는 여자의 메시지 ― 자신이 근원일지도 모르는 어느 소식을 대하는 ‘영민’의 태도는 건조하고 타산적이다. ‘확률 게임.’ 그것이 개인의 책임을 바라보는 ‘영민’의 해석 방식이다. 그는 본명을 걸고 데이트를 하지도, 자신의 희로애락을 전시하지도 않는다. ‘영민’은 베를린에서의 업보가 그를 추적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지만, 그는 여전히 재즈바의 어두운 조명 아래 죄악을 숨긴 밀수업자처럼 웅크리고 있다.
‘영민’의 리모델링 방식은 비상계단실의 난간을 제거하고, 형광등을 부수고, 콘돔을 장식으로 걸어두는 것2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안전장치의 해체로 이루어져 있다. 야릇하게 놀던 남자들에게 불쾌감을 느끼는 ‘영민’이지만, 그들이 재즈바를 찾게 만든 것은 결과적으로 그의 설계다. 그 자신은 힙스터의 유흥에 무관심하다 느낄지 몰라도, 그는 향락적인 공기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다소 뜬금없는 말이지만,) 인지·지각에서 가장 비중이 큰 감각은 시각이다.3 우리는 시각 자극을 해석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반면, 후각 자극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수준의 정의를 내리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4 특히 시각 단서가 제시되지 않은 향기는 그 자체로 미지의 영역이다. 그리고 책임으로부터 도망친 ‘영민’의 무방비한 정신을 향해, 미지는 “달콤한 향기”라는 미상의 형태로 돌연 다가온다.
당질을 섭취하는 생물에게 있어 달콤한 향기는 유혹의 신호다. 그리고 어떤 유혹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달콤한 향미를 지닌 물질 중 일부는 섭취·흡입 시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며, 어떤 포식자는 향기로 먹잇감을 유혹하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앞서 형성된 인물에 대한 선입견 탓일까, ‘영민’의 주의를 사로잡은 달콤한 향기가 어쩐지 불길하게만 느껴진다. 마치 한 사건이 인물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향취를 지닌 것처럼, 정체 모를 향기는 그 자체로 계기가 되어 ‘영민’을 움직이고 이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독일까? 아니면 포식자일까?
향기를 쫓는 ‘영민’의 시선이 몬스테라5의 구멍을 관통하는 순간, 글의 긴장 곡선은 드라마틱한 상승을 보이기 시작한다.
(같은 작가의 단편소설 〈자매의 탄생〉에서도 등장한) 재즈바의 사장 ‘리아’를 보러 갔던 ‘영민’은 그곳에서 ‘지아’라는 여성을 만난다. ‘영민’을 만류하는 ‘리아’의 태도와 ‘지아’의 이질적인 행색은 그에게 모종의 경고를 날리지만, ‘영민’은 “한여름의 태양”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외견에 사로잡혀 그 어떤 징후도 눈치채지 못한다. “중부유럽인 샘플”, “실험실”에나 어울릴 법한 “은색 캐리어”, “얼핏 봐도 복잡한 운수의 타로카드”는 그 사이에 낀 인간이 샘플처럼 다뤄질 운명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앞선 연락 때문에 꺼림칙해서) 자기도 점을 보러 왔다는 ‘영민’은 이때 눈치를 챘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지러운 타로 속에 비쳐진 운수에 그의 존재 역시 포함되어 있음을.
‘영민’은 ‘지아’의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이름은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낭만적인 거리의 풍경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지만, 향기의 근원이 ‘지아’였음을 확인한 ‘영민’은 그 기회를 놓쳐버린다. ‘영민’의 마음을 감춘 첫 번째 단추를 풀며 ‘지아’는 “너희 집으로 가자”고 속삭인다. 반복되는 그녀의 말은 모종의 주술적인 경문chanting이었을까? 엘리베이터는 존재하지 않는 지하를 향해 한참을 내려가다 “혓바닥으로 밀어내듯” 두 사람을 뱉어버린다. 일련의 기괴한 체험을 통해 ‘영민’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보잘것없는 인생에 커다란 운석이 떨어졌다는 것을.”
모호한 현실 감각을 느끼며 깨어난 ‘영민’을 반기는 것은, 그것이 꿈이 아님을 역설하는 은색 캐리어의 확고한 존재다. 자신의 집을 채운 샤워기 소리와 ‘지아’의 푸른 “허물”을 통해, ‘영민’은 독일에서 가명으로 데이트를 하던 때에 비하면 무방비하고 적나라한 상태라는 것을 체감한다. 그는 갈증의 추동을 달래며 정신을 차리려 애쓰지만, 욕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운석”은 ‘영민’이 현실 감각을 되찾은 것을 불허한다.
물에 젖으면 황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현란하게 색을 바꾸며 빛나는 피부6. ‘지아’가 가진 특징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영민’은 그녀가 아름다운 ‘외계인’임을 깨닫지만, 욕망을 북돋우는 황금색과 방을 한가득 채운 달콤한 향기는 ‘공포’보다는 ‘흥분’을 유발한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지만 ‘분별 가능한 신호’를 보이고, 그것은 ‘영민’을 “미치게” 만든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탐닉의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영민’은 오히려 “숨이 막히고, 갈증이 나고, 의문스럽고, 정신노동을 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영민’은 ‘지아’에게 어떤 질문도 던지지 못하고, 그저 그녀가 나타내는 적신호와 청신호에 맞추어 움직인다.
블랑카 한스Blanker Hans에게 죽을 뻔했다는 ‘지아’의 언급은, 그녀가 외계적 누미노제Numinose를 일으키는 불가해의 존재가 아닌지 의심케 한다. 블랑카 한스는 북해의 폭풍 해일을 이르는 말7로 게르만어권에서 회화나 노래의 제목으로 쓰일 만큼 알려져 있다. ‘지아’는 블랑카 한스를 분명하게 “신”이라 지칭하고 있으며, 북해에 무언가를 심으려다 “미치광이 신”에게 방해를 받았다고 말한다. ‘지아’는 정말로 ‘신’과 사투를 벌였을까? 과연 북해의 의지가 그녀를 거부한 것인가? 지구에게 있어 그녀는 외물이자 위험한 존재인 것일까? 그녀의 정체에 대한 추측은 명확한 답을 내놓기보다 오히려 의문을 더하기만 한다.8
그리고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수컷 항라사마귀의 모습이 ‘영민’이 가진 불안의 실체를 암시하고, 그 적나라하고 날카로운 송곳은 색채와 향락의 시간에 균열을 일으킨다. 곤충의 생태에 흥미를 가지고 ‘영민’의 몸을 조사하는 ‘지아’의 호기심은, 마치 대상의 존속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천진하면서도 위험한 냄새를 풍긴다. 그러한 불안은 ‘지아’가 “어떤 설명도 없이” 떠나버리는 것으로 실현되고, 여자를 버리고 도망쳤던 ‘영민’은 처음으로 “아이처럼 매달리고 우는” 입장에 놓인다. 그러나 ‘지아’는 무심하게 ― 그의 인생에 떨어졌던 날 말했던 “다른 길”이 있는 것처럼 ― 은색 캐리어만 남기고 사라진다.
“심심풀이”로 펭귄에게 성욕을 푸는 바다사자의 모습은 ‘영민’이 외면하지 말았어야 할 무언가를 적나라한 이미지로 제시한다. ‘영민’은 살육의 현장이 재생되는 것을 멈출 수도 끌 수도 없다. 그것은 ‘내적’인 형상이고 자동적인 ‘무의식’의 작용이다. 화이트 아웃 속에 부각되는 펭귄의 선홍색 살점은 알레고리에 대응되는 이름을 떠올리라고 경고하지만, “아둔한” 그는 대상objet과 쇼즈chose 사이의 단절 ― ‘지아’를 상실했다는 공백감에 묶여 잘못된 이름을 삽입한다. ‘영민’은 빛의 산란을 그리워하며 번화가에서 대체 가능한 오브제를 찾아다니지만, 에로스로 가득한 거리에 ‘지아’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은 사건의 연결고리였던 ‘리아’가 재등장하며 모호한 위기 의식을 선명한 결말로 끌어올린다. (“술만 마시면”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지아’는 “다른 별에서 왔으며” “남자를 임신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리아’의 증언은 솔티 독을 밀어내는 명확한 징후를 통해 확증되며, “아이를 낳는 것”이 꿈이라는 그녀의 말은 ‘영민’을 “동이 트는” 현실로 튕겨낸다. ‘영민’은 횡단보도 너머 은색 캐리어를 끌고 있는 ‘신사’를 발견하고, 그의 검은 머리 속에 섞인 “황금색 머리카락 한 가닥”을 발견하며 작품은 갈무리된다.
어떤 작문 이론은 “특정 색상을 지칭하는 단어를 묘사에 쓰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중에 언급된 색채는 ‘관습적’인 성격을 띄고 있고, 본작은 ‘상대적으로 표상하기 쉬워 인출 속도가 빠른 원색·천연색의 장점’을 잘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친숙한 사물들을 배치하면 그 장점은 극대화되고, 글자의 조합에 불과했던 문단은 우리의 보편 인식을 거쳐 하나의 ‘사실적인 장면’이 된다.
공상은 세계의 아름다움과 무심함 ― 그리고 그 속의 잔혹한 면을 함께 지니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그런 점에서 〈발광하는 여자친구〉는 필자에게 있어 ‘아름다운 괴담’이었다. 그러나 “괴담”이라고 선언을 마치기에는 조금 주저하게 되는 측면도 있다. 그것은 필자가 몇 가지 ‘사적인 이유9‘로 결말부를 코스미시즘과 공포의 측면에서 해석하지 않고, 네메시스적 해석을 중심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신화적 해석을 주 도구로 삼는 필자에게 있어 ‘영민’에게 내려진 응보는 “친숙한 소재”이자 “납득 가능한 결말”로 다가왔다. 정복에 성공한 국가의 주신主神이 타지의 신격이나 신앙을 흡수하고는 했던 고대에는, 외물을 통한 남신男神의 수태를 이질적인 소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태의 과정 대부분은 남신 자신의 ‘잘못’이나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두 번째로, ‘바다사자’와 ‘펭귄’ 등으로 나타나는 시각적 알레고리가 미지의 영역에 있던 불안을 ‘이해하게’ 만든다고 필자는 해석하였다. ‘지아’가 지구 외적인 존재임을 암시하는 서술은 그녀를 완전한 이방인으로 선언한다. 그러나 여기에 지구적인 생태를 상징으로써 병치하는 순간, 불가지의 존재에게 부여된 ‘위험한 신비’는 ‘적나라하고 분명한’ 이미지에 의해 이해 가능한 범주로 흡수된다.10
세 번째로, 진실을 알게 된 ‘영민’에게 던지는 ‘리아’의 말이 ‘괴담’이라는 장르의 궤도를 탈출하는 모멘텀으로 작용했다. ‘영민’에게 쐐기를 박는 ‘리아’의 대사는, 본래 이 지점에서 ‘괴담’을 완성시키는 ‘괴기스러움’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녀의 차분한 반응으로부터 필자가 느낀 것은 아이러니한 통쾌함이었다.
폭력은 소수자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힘을 앗아간다. 때문에 생존자들은 자신의 내밀한 소망을 고백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익숙하다. ‘임신’에 관한 ‘리아’의 대사는 다소 도구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MtF 트랜스젠더로서의 고충11을 그런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우리 안에 갇힌 발화의 열망을 정제된 언어로 실체화한 것”이다. (비록 그녀는 몰랐겠지만,) ‘배드 파더’를 향해 “임신한 거면 부럽다”고 말하는 ‘리아’의 모습은 필자에게 제4의 벽을 넘는 냉소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자연 상태에서 존재할 수 있는 불이익과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과학 기술의 사회적 효용이라 믿는다. 인간의 신체는 ‘미토콘드리아를 제공하는 생식 세포와 그렇지 않은 생식 세포 중 어느 쪽을 생산하는가’로 (다소 거칠게) 나뉜다.12 인류 사회는 이러한 생리적 차이를 전제로 어느 한쪽에게 인구 생산을 의존하였으며, 나아가 그것을 의무로 규정짓고 그 과정을 신성화하는 이념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이 ‘전통의 제국’도 이제는 옛날처럼 견고하지 못하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FtM 트랜스젠더가 제거하지 않았던 자궁을 통하여 자녀를 출산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기술의 발전은 인공 자궁과 같은 더 나은 대안을 채택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리고 있다.
자연적 조건이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유일한 이유가 될 수는 없으며, 능력의 차이 또한 차별의 당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류는 생리적 차이가 큰 의미를 주지 않는 수준까지 기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어느 한쪽 성별에게만 출산의 책임을 부과하는 사회적 압력’을 해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제는 우리가 느끼는 추상적 거리에 비해 실제로는 당면 과제에 가깝다.
필자는 여기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신·출산에 관한 현 담론과 비교해, ‘남성의 임신’은 여전히 괴담의 소재로써 전위적인가?” 작중에서 위기를 고조시키는 요소가 ‘외물에 대한 면역학적 거부감’임을 제외하고 보자면, ‘영민’의 임신은 필자에게 기괴한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했다. (물론 여러 문제로 인해 기술이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패러다임을 공유하느냐에 따라서는 “창작물에서 남자가 임신을 하는 게 뭐가 어때서?” 수준으로 반응이 갈릴 수 있지 않은가 필자는 주장해 본다.
덧붙여, 본작의 주제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배드 파더스’에 대해서도 일부 언급하고자 한다. 양육비 미지급자의 신상을 공개하던 ‘배드 파더스’는 2021년 12월 23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관한 2심에서 유죄(벌금 100만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배드 파더스’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며 ‘양육비 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일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판결 이후에는 2022년 2월 18일에 ‘양육비 안 주는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만큼 양육비 미지급은 컨센서스가 확고하면서도 좀처럼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다.
양육비 미지급 문제는 ①절반도 되지 않는 이행률, ②제재 수단이 무력화될 수 있는 일부 예외조항, ③양육비 미지급자의 실거주지 파악 불가, ④해외 도피 가능성 등 해결에 있어 여러 한계점을 겪고 있다. 양육비 미지급 금액은 가장 많은 1000만원~2000만원을 기준으로 다양한 분포를 보이며13, 영아기~고등학교까지 자녀 1명을 양육하는 데 필요한 금액은 약 2억 3천만원임14을 감안하면 미지급 금액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계측 가능한 양육비 이행 접수건수 중 이행건수는 4분의 1에 불과했다. 상술한 배경으로 미루어 ‘배드 파더스’의 출현은 그 정당성이 확고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통계만으로 묘사할 수 없는 측면도 존재한다. 양육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는 아이 뿐만 아니라 책임을 홀로 떠안게 된 사람에게도 고통을 야기한다. 임신은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의 급격한 증가, 혈류량 변화, 요추 및 장기 압박, 그리고 기분 부전 장애를 수반한다. 심신의 변화 과정에서 겪은 신뢰의 붕괴는 평생에 걸쳐 당사자를 괴롭힐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필자는 위기-절정 단계에서 보인 ‘영민’의 반응을 ‘그와 같은 고통을 외면한 대가’로 해석하였다. (본작을 네메시스의 관점에서 독해한 것이 너무 편향된 해석이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배드 파더스’를 중점으로 한 읽기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음을 필자는 조심스럽게 변호해 본다.)
〈발광하는 여자친구〉는 필자조차 그 연결고리를 유추하지 못할 정도의 무수한 지식의 합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많은 정보가 어떻게 한 사람의 지성에 의해 통합되었다가, 이내 흩어져 텍스트의 바다 속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광범위한 정보와 의제를 “황금 같은 문체”에 녹여낸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작가의 전작 〈자매의 탄생〉에서도 보여주었던 안정적인 문체가 본작에 이르러 원숙하고 대담해졌다는 것이다.
본작은 퇴폐미 속에 ‘관습적인 색채 감각’과 ‘강렬한 이미지로 구현된 알레고리’, 그리고 ‘낯선 존재에 대한 이질감’을 세련미 있게 병치한 수작이다. 크리처creature나 랩lab 호러에서 느낄 수 있는 ‘생리적 불안감’이 데카당스의 외피를 두르고 현란하게 반짝이는 중반부는, 필자에게 있어 “심해의 초롱불을 향해 빠져드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질감과 아름다움의 쌍곡선 가운데 서서히 드러나는 주제 의식은 (이 이야기가 괴담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장담컨대, 당신은 이 작품의 색채와 향취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발광하는 여자친구〉와 〈자매의 탄생〉 모두를 읽어볼 것을 필자는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