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너머로의 초대, “당신도 넷플릭스 구독자입니까?” 비평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흙은 흙으로 (작가: 율우영, 작품정보)
리뷰어: SewoL, 22년 3월, 조회 67

최근 몇 년간 이뤄진 장르문학의 약진은 ‘보통’과 ‘보편’에 대한 대중의 인식 변화가 불러온 바람이다. 더 이상 발전하거나 바뀌지 않는 사회적 통념과 사유의 정체 현상을 경계하고 우려하는 경향성이 문학 작품을 향유하는 방식에도 상당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다른 여러 장르 중에서도 유독 SF의 부상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반영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SF는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 세계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할 것인지를 상상해 보는 장르이다. 익숙한 패턴에서 벗어난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관점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보는 일은 이제까지와 다른 사유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

 

SF가 다른 세상에서의 이야기를 위해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하는 장르라면, 호러는 보편적인 논리가 통하지 않는 낯설고 기이한 장소로 독자를 초대하는 장르이다. 그곳에서 독자는 불가해한 대상을 조우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생경함과 불쾌감, 혹은 불안감 등의 감정이 공포로까지 승화하는 경험을 마주한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며 마침내 공포에서 벗어나는 독자는 비로소 직전의 공포를 야기한 일련의 상황이 어째서 그토록 낯설고 기이했는지를 돌이켜보게 된다. ‘그게 정말 그렇게까지 받아들이지 못할 일이었나?’ 자문해 보기도 하며.

 

미타의 소설 「흙은 흙으로」가 독자를 데려가는 곳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광기로 점철되어 있는 곳이다. 이 갑작스럽고 혼란한 무논리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독자는 은연중 어느새 광기의 발원지에 도착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발원지로부터 나의 삶이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지를 헤아려보는 일은 새삼 가슴 서늘해지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어렸을 적 빙의를 경험한 뒤 아마추어 퇴마사로 활동 중인 주인공이 대학 시절 은사인 윤 교수의 의뢰를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윤 교수의 딸 라미가 전에 보이지 않던 이상 행동을 보여 빙의가 의심되는 상황. 폭우 속에 숲길을 헤치는 등 혹독한 입사 의례를 치르고 도착한 윤 교수의 집에서 마침내 라미를 만난 주인공은 그녀가 발산하는 원초적인 매력에 단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퇴마를 구실 삼아 그녀 곁에 머물며 마음을 얻으려던 주인공은 순간의 방만으로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그간의 노력이 수포가 되려 하자 부지불식간에 돌변하여 그녀를 향한 기이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다.

 

( ※ 스포일러 주의! )

 

각자의 생애와 경험이 빚어낸 신념과 세계관은 모두가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관계로 서로 별개일 수밖에 없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에게 이해의 격차가 큰 상대의 말과 행동과 생각은 그야말로 별세계의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사람이 무리 지어 살기 좋아하는 탓으로 그들의 신념과 세계관 또한 서로 닮은 것들끼리 무리를 이룬다. 큰 무리의 신념과 세계관일수록 더 많은 추종자가 생겨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 편향 중 하나인 ‘편승 효과’ 때문인데, 같은 제품이더라도 구매 후기가 많은 제품이 더 높은 판매율을 보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결국 언동의 토대가 되는 개인의 가치관이란, 편의점 매대에 진열된 상품 같은 것이다. 잘 나가는 상품이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상품을 산다. 반짝하는 시류에 휩쓸려 짧은 기간 판매고를 높이는 상품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상품도 있다. 그리고 이런 스테디셀러를 우리는 흔히 ‘보통’과 ‘보편’으로 간주하여 표준으로 삼는다.

 

소설 속 주인공이 보이는 라미를 향한 집착은 표준에 미달하는 상품의 존재가치를 불인정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넷플릭스 구독자가 티빙이나 쿠팡플레이 구독자를 무시하는 형국인 셈이다. 넷플릭스의 지난해 4분기 국내 OTT 시장 점유율은 47%에 달한다(출처: ‘시사오늘, 시사ON’). 표준은 결국 숫자로 정해진다.

 

주인공은 라미의 기이해 보이는 언동을 귀신의 소행으로 규정 짓고 치료에 박차를 가한다. 라미에게 빙의한 귀신의 이름으로 추정되며, 그녀가 추종하는 것으로 보이는 ‘제이’를 핑계 삼아 그녀의 행동 교정에 돌입한다. 비유하자면 “샤오미 사장도 휴대폰은 삼성 쓴대” 하며 꼬드기는 식인데, 그녀가 슬슬 삼성 제품에 관심을 보이므로 주인공은 만족해한다.

 

“그녀의 모든 특성들을 다듬고 지워 나는 나와 윤철이 속한 세계로 윤라미를 편입시켰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삼성 휴대폰으로 넷플릭스를 보는 세계에 속해 있다. 그에게는 이 세계가 표준이며, 이 세계만이 온당한 존재가치를 부여받은 세계이다. 삼성 아닌 다른 기업의 제품과 넷플릭스 아닌 다른 OTT 서비스는 그의 기준에서 매우 불온하고 불건전한 것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잘못된 세계에 발을 디딜 리 없으므로, 샤오미 유저나 구글플레이 구독자에게는 필시 세뇌 혹은 빙의와 같은 현상이 사전에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미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특정 상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세뇌나 빙의까지는 아니어도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어느 정도는 외부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유튜브 중간 광고나 홈페이지 배너 광고, 팔로잉 중인 인플루언서가 오늘 올린 사진에서 무슨 옷을 입었고 무슨 가방을 들었는지, 어느 상품의 어느 리뷰가 조회수가 제일 ‘핫’한지 등이 우리의 매 선택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퇴마사로 활동하게 된 계기 또한 주관적인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어렸을 적 겪은 빙의 현상을 기도와 신앙생활로써 극복해낸 바 있는데, 이를 취재하러 나온 기자와 인터뷰하는 도중 “귀신을 물리쳤다”라는 발화가 있었고, 이것이 부풀려지고 와전되면서 후에 그가 퇴마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기사가 만들어진다. 밀려드는 퇴마 의뢰에 곤혹스러워하던 주인공으로 하여금 고소득을 보장하는 의뢰에 한하여 수임에 나서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는 결국 ‘생활고’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기도와 신앙생활로써 자신에게 씐 귀신은 물리쳤을지언정, 그의 생활과 향후 진로까지 결정지은 외부의 영향력 앞에는 무기력하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이후 그는 라미의 길들지 않은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말하면서도 그녀의 이목구비나 몸매가 일반적인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스테레오타입에 갇힌 전형적인 인간으로 전락한다. 그는 자신이 갇힌 세계의 기준으로 라미를 재단하며,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주인공이 ‘기준선’에 집착하는 모습이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종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안에서 최대한 올바른 선택을 내려야 하는데 혼자만의 기준에 따르기보다는 이왕이면 여러 사람이 옳다고 믿는 기준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고 현명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표준이고 보통이자 보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걸었던 길이고, 설사 틀린 길이었다 하더라도 함께하는 많은 사람이 있기에 외롭거나 창피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연대 안에서의 평온과 자유는 그 어떤 향정신성 물질보다도 강력한 중독성을 띠고 있어서, 한 번 도취된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을 무리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연대의 비호를 지속하기 위한 당위성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에게 이는 꼭 필요한 행위이자 현상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이 공포로 작용하는 것은 바로 그 연대로의 편입 과정이 보일 수 있는 끔찍한 폭력과 억압의 행태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정상’이라는 범주가 제 영역을 확보하고 지키는 방법이자 하나의 원리라는 사실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라미가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기준에 따라 이해하고 판단한다. 아마추어 퇴마사인 그가 동시에 아마추어 번역가로도 활동 중인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번역가란 직업은 다른 영역의 언어를 내 영역의 언어로 옮겨오는 직업이니만큼 울타리 너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히 요구될진대, 주인공은 라미의 언어를 이해하기는커녕 자기 말을 ‘복붙’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경험을 하며 점차 기이한 강박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브램 스토커나 에드거 앨런 포의 고딕호러를 연상케 한다. 라미에 대한 관심이 점차 집착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겪는 내면의 갈등과 고뇌와 같은 심리 묘사가 보다 치밀하게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외부의 존재가 개인의 가치관 형성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빙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재치 있는 발상으로 보인다. 다만 라미가 지닌 기이함의 기원에 페미니즘과 퀴어를 두는 시도는 그저 우리가 표준으로 삼는 정상성에서 배제되거나 대치하는 소재로서 기능하는 데만 머무르고 마는 듯하다. 라미의 캐릭터가 보다 디테일하게 그려졌다면 그녀가 제이를 추종하는 것이 단지 ‘정상의 범주’에 들지 못했을 뿐,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긴 여운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소설은 마침내 라미를 표준형에서 멀어지게 만든 귀신의 실체를 폭로하며 마무리된다. 무신경하고 무자비한 몰이해의 대상이 가까스로 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으며 가해자를 단죄하는 결말은 일순 바람직해 보이지만, 마냥 통쾌해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스테레오 타입이 세상에 뿌리내린 역사가 몹시도 길기 때문이며, 동시에 필자 역시 보통과 보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있다면, 작품을 완독한 뒤에 작품의 소개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를. 작품의 첫머리에 선언처럼 새겨져 있기도 한 ‘그 문장’이 무척 가슴 서늘하게 만드는 작품, 미타 작가의 「흙은 흙으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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